231117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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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여러분 반갑습니다. 다들 추운 날씨 가운데 이렇게 교사세미나로 모여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것은요, 바로 교회가 무엇이냐?입니다.
사실 제가 여러분들께 어떤 것을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그럼 교회론을 한번 나눠봐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들 교회론이 뭔지 들어보셨나요? 우리 기독교 교리의 한 부분입니다. 뭐 신론, 기독론, 구원론 등등 여러 가지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교회론이죠.
사실 그러다보니 처음 교회론! 이라고 듣게 되면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 교회론은 그렇게 따분하거나 그러한 내용이 아니구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이곳! 어디에요? 바로 교회이죠. 그리고 여러분들은 매주 주일만 되면 교회에 오고, 그 외에도 더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뭐냐라고 물어봤을 때, 대답을 못하면 안되겠죠. 그렇기에 교회론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들이 많아요. 세례는 왜 하는 것인지, 성찬은 또 뭔지, 그리고 교회 안에 장로, 집사, 이런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교회에 나름 열심히 다니고 20년 이상 다녔다고 해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들이 태반일거에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을 기회로 해서 그럼 대체 내가 있는 이 교회는 뭐냐,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아마도 교회 공동체를 향한 여러분들의 사랑이 모를 때보다는 더욱 커지지 않을까 소망해봅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우리 한번 질문을 나누어볼게요. 여러분들은 교회를 뭐라고 정의하시나요?
여러 답이 나올 수 있는데요, 가장 스탠다드한 답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거에요.
세상 사람들은 보통 교회 하면 건물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아무리 삐까번쩍한 교회 건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믿는 이들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는거에요.
반대로, 아무리 누추하고 비좁고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믿는 여러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곳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모여있는 이 곳도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럼 교회에 대한 정의가 끝났습니다.
그럼 또 제가 질문할게요.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몇개가 존재할까요?
이 질문의 답은 두가지에요. 하나는 단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다른 답은 셀 수 없이 많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이야기냐 싶을 텐데요, 이것은 교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내용입니다.
가장 먼저, 여러개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당연히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교회들을 지칭할 수 있겠죠. 여기 삼일교회도 있고, 또 다른 곳에도 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여러개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교회는 동시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그럼 뭘 가리키느냐, 바로 우리가 앞서 교회의 정의를 뭐라고 했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했을 때, 모든 믿는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을 통칭하여 교회로 말할 때 교회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어떤 단어로 표현하냐면, 보편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라고도 합니다. 영어로 뭐라고 할까요? Catholic Church 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 단어를 들으면 저기 있는 성당을 생각하게 될 텐데요, 그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그 단어가 바로 보편교회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고백할때도 거룩한 공회라고 하죠? 거기서 공회가 바로 이 카톨릭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쟤네가 자기들을 카톨릭 교회로 칭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만이 정통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에요.
그들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천국의 문을 여는 권세를 베드로에게 주셨고, 그리고 그 베드로가 자신들의 첫 교황이 되면서, 그 정통이 자신들의 교회에만 이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벗어나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교회가 곧 보편교회라고 여기겠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패했고,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러한 정통성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교회라고 할 때,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해서 모이는 그것을 지칭하죠.
에베소서 4:15–16 NKRV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에베소서의 말씀이 바로 교회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요, 여기에 나타나는 것처럼 모든 교회가 서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되어 모이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지만, 그 안에서도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겠죠.
자 그러면 이제 여러개의 교회는 잠시 내려놓고, 하나된 보편교회로 생각하면서 논의를 진행해볼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었죠? 여러분들, 몸은 어디서 에너지를 받아서 생활하게 될까요? 머리로부터 받게 됩니다. 입으로 먹고, 눈으로 보고, 뇌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렇게 몸은 움직여지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에너지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통해 연결되어 에너지를 받게 된다는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교회는 유기체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유기체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죠? 각 기관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공생하며 살아 움직입니다.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거에요. 각 기관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서로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힘들 때는 일으켜 세워주고, 좋을 때에는 함께 기뻐하고 하는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퍼즐을 할 때 안쪽으로 들어와있는 부분을 다른 퍼즐의 튀어나온 곳이 채우듯이, 우리의 부족함은 다른 이의 강점으로 채우고, 다른 이의 부족함은 나의 강점으로 채워나간다는 것이죠.
그렇게 서로 도와갈 때,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유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자. 여기까지 우리는 교회의 특징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머리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움직이는 유기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 제가 한가지 또 질문을 해볼게요.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 있죠? 그러면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 고민이 될 것 같아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 그럼 교회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긴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면, 교회의 성도라는 것이 구원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교회 안에서 성도라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신앙생활을 하는게 맞나 싶은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뭐 물론 그 사람들은 다 구원 못받았다라는 것은 아니지만요, 분명한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 중에도 확실한 믿음이 없는 이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교회 공동체의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대표적인 곳이 어디겠어요? 이단들이 그렇죠. 그들은 자신들을 교회라고 말하지만, 전혀 말씀을 제대로 말하지도 않고,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죠.
그런 곳은 교회라고 할 수도 없고, 당연히 그 안에 있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할 수도 없겠죠.
그러면 성당은 어떨까요?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말씀과 그들의 교리가 제대로 되어있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안에서 구원을 확실히 받는다고 말하기가 어렵겠죠.
그래서 교회론에서는 이를 놓고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합니다.
참 교회는 정말로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진정한 교회일 것이고, 거짓 교회는 그렇지 않은 잘못된 곳으로 향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냐는 것이죠.
겉보기로는 정말 멀쩡해보여도, 그것이 잘못된 교회일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특히 요즘 이단은 상당히 교활해서, 기존 교회처럼 가장하고 성도들을 끌어들이는 경우도 많죠.
그러면 참 교회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교회의 표지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물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확인하는 외적 조건들이 있죠. 발이 몇개고,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이런 식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는거에요. 교회에 참 교회의 표지들이 명확히 발견이 된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참 교회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참 교회를 구분해주는 표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교회의 표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른 말씀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잘 선포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이 제대로 선포가 되어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몸인 교회가 잘 받을 수 있겠죠.
한번 확인해보죠. 우리 교회는 어떤가요? 말씀이 잘 선포되고 있나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단들은 어떨까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교주가 드러나죠. 첫 표지에서부터 우리는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당장 우리조차도 말씀을 잘 모른다는 거에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지를 잘 모르니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표지로 한번 넘어가 봅시다. 두 번째 표지는 바로 성례입니다. 성례는 뭐에요? 거룩할 성에 예배 예 자죠. 즉 거룩한 예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거룩한 예식은 어떤게 있을까요?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여기에 결혼 예식, 사제가 되는 예식, 치료하는 예식 등 갖가지 것을 붙여서 7성례라고 하는데, 저희는 이것을 말씀에 없는 것으로 여겨서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여기죠.
그렇다면 세례와 성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여러분들 중 세례 받은 분들 있나요?
받으신 분들은 어떻게 받았나요? 유아세례? 아니면 그냥 세례? 혹은 침례 받으신 분 있나요?
그렇습니다. 세례는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세례는 어떻게 받아야 옳은 것일까요?
일단 성경에서 등장하는 세례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마태복음 3:5–6 NKRV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이 말씀이 혹시 어떤 말씀인지 아시겠나요? 네 바로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물로 세례를 주며 회개를 외쳤죠.
예수님 역시도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들이 말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말씀에 등장하는 세례의 모습은 어디서 이루어지죠? 요단 강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아예 몸을 담그는 침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 그러면 나는 그냥 목사님이 물을 뿌려서 해주셨는데, 그건 잘못받은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이유와 그 효과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단 세례를 물로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할 때 사용하는 물은 성스러운 물이라서, 그것을 접촉하는 순간 갑자기 성스러운 기운으로 몸이 가득차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죠.
세례때 사용하는 물은 우리가 씻고 먹고 하는 물과 동일한 물입니다. H2O라는 것이죠.
그럼 왜 아무런 특별할 것 없는 물을 사용하느냐, 바로 우리가 물을 통해 세례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물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나요? 그 중에서는 씻어낸다라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에서 물이 하는 역할은 바로 세례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가 씻어짐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물이 우리에게 닿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몸을 씻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서 우리의 죄악이 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에서 사용되는 물을 세례의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물에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신묘한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거에요. 그럼 세례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인데, 굳이 그렇게 중요하게 할 필요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물에 어떤 다른 능력이 없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예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물 자체에는 능력이 없어요. 하지만 물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은혜를 떠올리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물로써 세례를 받을 때, 진정으로 그 마음에 세례를 향한 마음이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올리도록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 그러면, 저 세례 안받았는데, 안받으면 구원을 못받는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우리의 구원은 무엇으로 결정되죠?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다른 어떤 외적인 행동으로 믿음의 여부가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마음 속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세례를 통해 인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도장을 찍는다는 것이죠.
우리가 도장, 요즘으로는 네임택을 달때, 언제 그렇게 하죠? 그 물건이 내 것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달게 됩니다. 네임택을 안단다고 해서 내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원래 아니었다가 네임택을 달아야 내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내것이지만, 이것이 내 물건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네임택을 달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내게 확실히 있는지를 내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외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확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나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 나의 주변 사람들, 또한 사탄의 세력에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 바로 이 세례라는 것입니다.
오! 세례가 그렇게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저는 세례를 여러번 받고 싶어요! 받으면 받을수록 나의 확신이 더해지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례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죄사함이기 때문이죠.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례를 받음을 통해 우리는 내 안의 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확실히 사함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이 능력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죠? 그의 존재와 능력이 온전하시고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세례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죄른 단번에 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하나님은 시간에 매여 있지 않으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후에 행한 미래의 죄까지 우리는 모두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세례는 오로지 단 한번으로만 행해져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라면, 당연히 한번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는 있습니다. 바로 잘못된 세례를 받은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이단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수 있겠죠. 그런 경우라면 그 세례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 되고, 그는 참된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세례와 그렇지 않은 세례는 어떻게 구분하나요? 성경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세례라면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을 할게요. 카톨릭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그러면 참된 것일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세례에 대해서는 참된 세례라고 여깁니다. 그곳에서도 세례를 줄 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가 회심하여 우리에게로 온다면, 우리는 그에게 세례를 다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도록 한 후 그대로 우리 공동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세례에 대해서는 한가지만 남았습니다. 바로 유아세례에 대한 이야기겠죠.
우리는 앞서 세례에 대해서 뭐라고 했죠?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아들은 어떤가요? 그들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나요?
물론 주님의 능력으로 그럴 수 있겠지만, 사실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믿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일까요?
그 부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족 공동체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신명기 6:4–7 NKRV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이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족 공동체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으로 가르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믿는 가정의 부모는 자녀에게 신앙으로 가르치고 자녀가 하나님을 믿는 굳센 믿음이 있도록 해야 하겠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부모의 믿음을 가지고서 자녀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태어나자마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됨을 표시하는 것처럼,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주어 부모가 그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심히 키워나갈 것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죠.
그렇게 어린 아이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이후 만 14세가 되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입교를 통해 이전까지 부모님의 신앙었던 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자 그럼 여기까지 우리가 세례에 대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성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 중에 성찬에 참여해보신 분들 있으신가요?
아마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참여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찬의 때에는 무엇을 하죠?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라 하시면서 서로 나누어 먹었던 것을 따라 우리도 떡과 포도주를 마십니다.
보통 교회들에서는 카스테라랑 포도주스나 즙을 만들어서 마시는 것 같아요.
카톨릭 교회에서는 동그란 동전같이 생긴 것을 신부가 성도들에 입 속에 넣어주고, 잔은 신부가 대표로 마시게 됩니다.
자. 이렇게 성찬의 모습도 서로 다른 모습들이 있는데, 과연 성찬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피를 한번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이것이 자신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 = 몸, 포도주 = 피 라고 말씀하신 것인데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성찬에 참여할 때,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나요? 정말 내가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라고 생각하나요?
사실 이 성찬으로 인해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인들에게 카니발리즘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떡과 포도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교회 역사에서 상당한 논쟁이 되었습니다. 왜냐, 성찬에 대한 것이 종교개혁자들에게 개혁의 대상으로서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찬에 대해서는 네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단 첫번째로, 화체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냐, 떡과 포도주가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두번째는 공재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닌데, 그 떡과 포도주 바로 옆에 예수님의 몸과 피가 붙어서 그것을 함께 먹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영적 임재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먹게 되는 떡과 포도주는 그냥 그대로 떡과 포도주이지만, 성도가 그것을 먹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생각할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각 성도에게 그 효과를 주신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 네번째는 기념설입니다. 이것은 떡과 포도주 모두 그대로 떡과 포도주이고, 먹고 마시는 것 자체도 아무런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을 생각하고 기념하기 위한 의미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들 어떠신가요?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떤 것이 가장 맞다고 생각이 드시나요? 한번 손을 들어봅시다.
그럼 차례대로 각 주장이 누가 한 주장인지를 말씀드릴게요.
첫번째 화체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는 성스러운 성물로서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을 손대지 못하게 하고, 사제들이 손으로 들어 그들의 입에 넣어준 것이죠. 혹시나 떡을 떨어뜨리거나 하게 되면 신성모독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위험성은 잔의 경우에 더 크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도가 잔을 받지 않습니다. 그저 사제가 대표로 그것을 취하게 되죠.
두번째 공재설은 마틴 루터의 주장입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화체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였지만, 그 역시도 예수님의 몸과 피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이와 같은 공재설이 등장하게 되었죠.
세번째 영적 임재설은 존 칼빈의 주장입니다.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이 성도에게 섭취되었을 때, 성령께서 일하셔서 성도들에게 성찬의 효과를 준다고 여겼던 것이죠.
마지막 기념설은 츠빙글리의 주장입니다. 그는 성찬 자체가 그저 기념을 위한 것일 뿐이지 어떤 영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저는 세번째 영적 임재설의 입장을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도 이 입장에서 성찬에 대해 더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적 임재설은 사실 언뜻 듣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그냥 떡과 포도주일 뿐인데, 그걸 먹는다고 해서 어떤 효과가 있을 수 있을까 싶어지죠.
하지만 이미 우리는 이 성찬이 작동하는 방식을 어느정도 알고 있습니다. 왜요? 앞서 세례의 작동 방식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앞서 세례에서 사용되는 물이 어떻게 작용한다고 했죠? 물이 씻음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기에, 우리가 그것으로 씻어졌을 때, 우리 죄가 용서받음을 확실히 느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에요. 떡과 포도주는 물처럼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생각하게 된다는 거에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향한 더 큰 은혜와 사랑의 마음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또 질문을 해봐야겠죠? 앞서 세례는 오로지 단 한번만 시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찬은 어떨까요? 성찬도 한번만 하는 것일까요?
아마 교회생활을 하신 분이시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거에요. 왜? 교회에서 자주 하니까.
그렇습니다. 성찬은 세례와는 다르게 여러번 반복하여 시행됩니다. 그렇다면 왜 성찬은 세례와 다르게 여러번 시행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세례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뭘 받는다고 했죠? 죄 사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찬을 통해서는 어떨까요?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성찬을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향한 그 사랑이 더욱 커져나가 우리의 삶 가운데 거룩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찬을 여러번 하면서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함을 채워나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칼빈의 경우에는 성찬을 매주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성찬이 우리에게 주는 거룩의 유익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여기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례인 세례와 성찬을 바라보았습니다. 세례는 물로서 우리에게 주는 죄 씻음의 표지이고, 성찬은 떡과 포도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룩의 표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잘 보시면 이 성례가 우리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세례를 통해 죄 씻음을 단번에 받았음을 알게 되고, 성찬을 통해 우리의 거룩함을 쌓아감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뭐냐?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을 말하는 두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 돌이키는 회심을 해야하고, 거듭나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것을 고백하면 회심을 한 것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만 가지고는 뭔가 설명의 부족함이 느껴질 것 같아요.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 안에는 계속 죄성이 있고, 부족함이 존재하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확신이 들었다가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거에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정리한 개념이 바로 칭의와 성화입니다.
먼저 칭의는 무엇이냐? 말 그대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무죄와 무혐의의 차이를 아시나요? 무혐의는 아예 그러한 사실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무죄는 사실은 있었지만,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판부가 그것을 죄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실 죄를 지었어요. 죄가 많죠. 하지만 우리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죄를 죄가 없는 것으로 선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대신 그 값을 치르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있지만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이 칭의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는 죄가 가득한 인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진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결정이 되었습니다. 의롭게 되었어요.
하지만 실제 우리 안에는 죄가 많습니다. 그 죄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미 의롭다고 칭함 받았으니까 괜찮은 것일까요? 그러면 구원파가 겠죠.
여기서 성도는 성화의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의롭다고 선언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바를 따라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간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성화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그 성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고, 우리를 이끄시어 반드시 성화의 단계로 이루어나가실 거에요.
어떤가요? 칭의와 성화를 설명했는데, 어느정도 세례와 성찬과 연결이 되죠? 세례가 칭의와 맞닿고, 성찬은 성화와 맞닿습니다.
결국 우리는 성례를 통해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칭의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우리가 성화된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그 길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례와 성찬, 이 성례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성례가 바르게 세워져야지만 교회가 참된 교회로서 작동할 수 있겠죠.
자 그러면 이제 참된 교회의 마지막 표지를 보겠습니다. 바로 권징입니다.
권징은 바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면, 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교회는 온전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더 많은 공동체이죠.
그러다보니 우리 안의 죄성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여러 잘못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면, 공동체 안에 큰 상처가 나타나게 되고, 심하게는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올바르게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질서가 잘 확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교회에 권징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 권징을 통해 우리는 교회를 올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럼 권징은 어떻게 받게 되는가? 교단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속한 장로교에서는 장로들과 담임목사님의 모임인 당회에서 결정하여 권징을 시행하게 됩니다.
대표적이 것이 근신, 수찬정지 등이 있겠죠.
당분간 혼자서 반성을 하거나, 앞으로 당분간 성도로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워낙 교회들이 많고 하다보니 권징을 한다고 해도 다른 교회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회개하지 않기 떄문에 이것이 잘 사용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권징이 있다는 것은, 교회에 분명한 질서가 있다는 것인데, 그 질서는 과연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는 바로 말씀이겠죠. 우리가 말씀을 보며 살아가듯, 말씀대로 순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또다른 질서도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보통 직분하면 어떤 것을 알고 있죠?
목사님,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 이런 분들 알고 계실거에요. 맞습니다.
성경에서는 여기에 더해 사도, 선지자, 전도자를 추가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직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뭔가 좀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거에요.
왜냐하면, 교회는 분명히 위계가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죠. 예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죠. 그러면 이 직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직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각자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맡기시기 위해 제정하신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교회를 유기체라고 했잖아요? 유기체에게 손이 있고, 발이 있고, 팔이 있고 하듯이, 교회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 직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은 다르지만, 관계는 평등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교회에서 장로님들을 엄청 모시고 높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사실은 직분상으로 높은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장로라서 대우한다기보다는, 교회의 어른이라서 대우해드리는 측면인 것이죠.
그러니 장로라고 해서 막 엄청 무서워할 것도 없고, 나중에 여러분들이 장로가 되서 누리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다시 돌아와봅시다. 제가 직분을 이야기할 때,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사도, 전도자, 선지자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직분을 두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항존직이라는 것과 비상직이라는 것이죠.
먼저 비상직을 살펴볼게요. 비상직이라는 것은 평상시가 아닌 특별한 때에 필요한 직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죠?
결국 비상직은 뭐냐, 처음 교회를 세워야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세워직 직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바로 사도, 전도자, 선지자들입니다. 사도는 어떤 이들이죠? 예수님의 제자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도 행하고, 많은 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
전도자들은 그런 사도들을 도와서 옆에서 함께 복음 전파를 감당했던 인물들입니다. 디모데나, 실라와 같은 사람들이겠죠.
그리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고 예언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자. 어때요, 이 세가지 직분은 지금 존재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사도가 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지금은 비상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와 전도자, 선지자들이 활약했던 것은 교회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를 세울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교회가 다 잘 세워져있죠, 그래서 하나님은 더이상 이 직분을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항존직을 세우십니다. 항존직이란,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뜻으로,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 교회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항존직은 바로 목사와 장로, 집사입니다.
여기서 어! 하시는 분이 있으실텐데, 왜 권사는 없냐라는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권사는 사실 직분은 맞지만 항존직은 아닙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세우신 직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뭐냐? 권사는 교회가 여성 성도들이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세워준 직분입니다.
왜냐하면 장로와 집사는 여성이 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집사도 여자 있잖아요! 여기서의 집사는 그냥 서리 집사가 아니라 안수집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감당하는 직분들은 안수를 받는 남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럼 왜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느냐?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현재 제가 속해있는 장로교 합동에서 여자 목사나 장로를 세우지 않는 것은 일단 말씀에 그렇게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5–6 NKRV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디모데전서 3:2 NKRV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그리고 성경에서 하와를 돕는 배필로 삼으셨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원리를 따라야 함을 그 이유로 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장로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기본적으로 장로는 세 가지 일을 맡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알리는 것이죠.
두 번째는 심방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는 일인 것이죠.
마지막은 치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던 권징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성도들이 있을 때 그것을 바로 잡고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인 것이죠.
이러한 측면에서 목사 역시도 장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집사의 일은 어떤 일을 해야할까요? 집사의 역할은 바로 교회의 행정적인 일들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관리하고, 교회의 재정을 맡아 집행하면서, 어딘가에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그러한 교회의 행정적 일들이 바로 집사에게 맡겨진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모든 직분까지 살펴보면, 무엇을 알 수 있어요? 모든 직분이 서열이 있는 것이다? 집사가 성도보다 높고, 장로가 집사보다 높고, 목사가 장로보다 높은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직분자들도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같은 성도입니다. 그저 어떤 특정한 일을 맡아서 감당할 뿐인 것이죠.
그러므로 직분자들에게는 특별히 겸손이 요구됩니다. 교회의 일을 행하면서 그것을 나의 특권으로 삼아서 자랑하거나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오랜 시간 교회의 의미부터, 특징, 그리고 참된 교회를 알 수 있는 표지와 교회의 직분까지 많은 것들을 함께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때요? 교회가 그저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알 수 있겠죠? 교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세우신 곳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실 최근에 우리가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한가지 큰 변화가 생긴 것이 있어요.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냥 혼자 온라인으로도 예배 드릴 수 있는데, 굳이 공동체에 속해야 하나? 라는 생각인거에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 우리가 방금까지 보았듯, 더욱 바른 신앙을 소유할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이 홀로 신앙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에 공동체를 통해 각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이야기)
여러분들, 긴 시간동안 함께 교회에 대해서 나누었는데요, 여러분들이 속한 이 교회라는 곳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곳인지를 기억하면서, 그저 나만을 위해 기도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보내신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함께 신앙하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함께 기도할텐데요, 가장 먼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1 하나님의 부르심
기도 2 우리의 삶과 비전을 놓고 (고3)
찬양 2 비 준비하시니
기도 3 각자의 기도와 서로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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