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시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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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9:3-8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루 온종일 지난 한 해 동안 보살펴 주시고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떠올라지는 그런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마음에 담는 자들이 누리는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감사 주일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이 추수감사절을 맞은 오늘 성경의 한 인물을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데요.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한 마디로 왕손 아닙니까?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될 뻔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5살이 되던 때에 인생이 완전히 몰락하는 절망적인 사건을 경험합니다.
아시다시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할아버지였던 사울 왕과 아버지였던 요나단을 비롯한 두 삼촌이 길보아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너무도 다급한 상황이 되니까 유모가 이 5살짜리 므비보셋을 산속으로 데리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왕손이니까 제거 대상 1호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황급히 도망을 가다가 그 과정에서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두 다리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훗날 그 후유증으로 두 발을 절게 되는 중증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인생이 몰락하는 비극을 경험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불구의 몸을 가지고, 깊은 산 속에서 20년 넘게 숨어지내다 보내게 되었는데요. 여러분들 사극 같은 것 보시면 아시겠지만, 반란을 일으켜서 정권을 차지하고 나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전 왕족을 다 멸절시키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새로 등극한 왕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므비보셋의 할아버지였던 사울에게는 철천지원수 같은 존재에요. 그 유모가 므비보셋을 키우면서 날마다 주입시킨게 뭘까요? 다윗에게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면 죽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므비보셋의 신세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부모 없이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도 참 비극적인 일인데, 자기 목숨을 해치려는 사람이 언제 밀고할지 모르니까, 스스로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늘 피해의식이 가득하고 좌절감이 엄습하고 분노가 차오르고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의 말씀을 보면 그 내면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8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다윗이 수소문해서 그를 자기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니까, 그가 다윗 앞에 가자마자 던졌던 말이 이겁니다. “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여러분, 므비보셋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죽은 개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호흡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지,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면서 늘 마음에 상하고 찢겨진 마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므비보셋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도 비참한 인생으로 몰락한 므비보셋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니까
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하루하루를 비관하면서 절망 속에 살아가던 므비보셋을 다윗 왕이 거두어 준 거예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준 2가지 큰 은총이 뭔지 아십니까? 첫째로는 물질적인 보상입니다. 7절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어떤 은총입니까?)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이렇게 첫 번째 은총을 베풀고요.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명예 회복입니다. 역시 7절 후반부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왕궁에서 다른 왕자들과 더불어 왕의 식탁을 누리게 해주는 것은 명예 회복을 시켜 준 것입니다. ‘죽은 개’같이 생각되던 자기 존재가 왕자의 반열에서 대접을 받는 명예 회복의 은총을 입은 것이죠.
저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면서 자꾸 마음에 이 므비보셋이 떠올랐습니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감사절이 되면 이 므비보셋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요. 이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받았던 은혜가 우리 하나님에게서 제가 받았던 은혜더라고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던 우리 인생이요. 내버려 두면 그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어서 눈앞에 있는 것만 급급하다가 끝날 인생이었는데, 십자가로 거두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이 되고, 새로운 신분이 되었다는 이 감격이 넘치니까요. 므비보셋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성도님들 가운데 여러분들 스스로 이 므비보셋이 자기를 인식했던 것처럼 자기를 인식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어떤 실패를 통해 인생이 꺾였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회복은 되질 않고 이렇게 저렇게 애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좌절감과 실패감으로 ‘나는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혹시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스스로를 ‘죽은 개’같이 여기며 숨어 있던 므비보셋을 다윗이 수소문하여 찾아낸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원근 각처에서 찾아내셔서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이 추수감사절 아침에 므비보셋에게 임한 다윗의 은총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한 은혜의 손길이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소망이 없던 삶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공급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이 다윗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포인트가 한 가지 있는데요. 바로 다윗의 ‘시각’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다윗이 가지고 있던 두 가지의 시각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첫 번째 시각이 무엇입니까? 다윗에게는 “요나단으로 말미암아”라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이냐면은요. 한 번 보세요. 므비보셋을 불러왔습니다. 다윗이 그를 딱 보니까 므비보셋 안에 두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는 부정적인 모습이고 하나는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부정적인 모습은 누구일까요? 할아버지였던 사울 왕입니다. 다윗의 원수였던 사울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던 인간,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복달했던 사울의 모습이 므비보셋에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한 시각, 누구입니까? 요나단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장 힘들고 고독했을 때, 자기를 거두어주고 도와주었던 은인 같았던 친구 요나단이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요. 저를 포함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대인관계 속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 속에 사울과 같은 원수 같은 모습만 있는 사람이 없고요. 요나단처럼 생명의 은인과 같은 모습만 투영되는 그런 사람도 없습니다. 이 둘이 섞여 있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관계 아닙니까?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죠.
여러분들 남편을 한번 보세요. 고맙기만 한가요? 남편의 모습에 요나단의 모습만 있습니까? 저만 하더라도 제가 사울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물론 저희 아내는 저에게 요나단과 같은 고마운 사람이죠.”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저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부분 배우자의 모습에 사울과 같은 모습도 있고, 고마운 요나단과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나단과 같이 도움을 주고 고마운 사람이 남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각도로 보면 사울처럼 내게 이렇게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 세상에 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뭐 고부간에 갈등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에게 상처 주고 내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을 책으로 쓰려면 이렇게 두꺼울 것입니다.
그러나 또 반대로 그래도 나를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고 사랑해주는 그 요나단의 시각으로 보면 고마운 마음을 또 책으로 쓰려면 책 한 권이 뭐예요? 몇 권은 쓸 수 있을 거예요.
이 두 가지 시각이 같이 공존하는 게 대인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주로 어느 쪽을 택합니까? 9가지 요나단의 시선이 내게 담겨져 있고, 1가지 사울의 기억이 있는데, 우리는 참 희한하게도 이 9가지는 버려버리고, 이 1가지 사울의 기억을 마음에 담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의 다윗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므비보셋 안에 투영되어 있던 사울의 모습과 요나단의 모습이 있을 때, 다윗은 사울을 택하지 않고 요나단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절 말씀을 한 번 보십시오.
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내가 사울로 말미암아 모두 멸절시키겠다’ 이게 아니에요.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7절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을 딱 보니까 사울도 생각나고 요나단도 생각나는데, 다윗은 누구를 택했습니까? 요나단의 시각을 선택합니다.
저는 오늘 이 추수감사절에 이 다윗의 시각이 여러분에게 부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에서 좋은 면도 기억나고 나쁜 면도 기억이 난다면, 요나단의 기억만 남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시각도 똑같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두 가지의 시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적인 측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살아가는 피조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다른 하나님의 시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런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어느 시각으로 보실까요? 내 행위로 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으로 나를 보시고 대해주시는 거예요. 전혀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하세요. 그냥 그렇게 마음을 먹으셨어요. ‘칭의’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봐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보면 어떻게 우리가 의롭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혜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우리가 불의한 행동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십자가의 구원으로 바라봐 주시는 은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도 우리의 시각이 다윗처럼 교정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제가 다윗에게 감동한 두 번째 시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은혜의 시각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1절에서는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은총을 베풀겠다고 했는데, 그런 인간적인 은총에 머물지 않고 3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그 하나님의 은총이 너무 감격적이어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므비보셋에게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사울의 모습과 요나단의 모습이 공존하는 므비보셋을 보면서 어째서 사울 쪽으로 기울여서 그를 처단하는 게 아니라, 요나단 쪽으로 기울여서 돕는가 봤더니 그 바탕에 하나님의 은총의 시각이 있었습니다. 나도 용서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나도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상대하다 보니까 므비보셋을 향한 긍휼함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시는 분들일수록 정말 ‘용서의 대가’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성경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연약한 자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는 다윗과 같은 마음. 사랑의 대가가 되고 용서의 대가가 되어가는 그 아름다운 모습요. 품지 못할 자가 없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로마서 1:14-15절을 보니까요. 합독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바울이 무슨 야만인에게 빚을 졌습니까? 바울이 언제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졌습니까? 빚진 적이 없어요.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내 행위에 초점을 두지 않으시고 멸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시각으로 나를 거두어주신 그 은혜가 가슴속에 있으니까, 자기를 괴롭혔던 야만인이 내가 빚진 자처럼 느껴지더라는 거예요. 용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빚진 자의 심정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가운데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빚진 자의 심정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왜 그래야 한다고요? 주님이 요나단의 시각으로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그를 용서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하는 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다윗 안에 있던 이 두 시각이 성도님들의 대인관계에서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요나단의 시선, 하나님 은혜의 시선. 이 두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우리 하름교회는 훨씬 더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자, 이렇게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다음에 세월이 꽤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다윗 왕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성들은 물론이고 믿었던 자기 신하들도 여러 사람이 등을 돌리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요.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을 가는데, 당연히 그 과정에서 므비보셋도 ‘나도 왕과 동고동락해야지’ 하면서 준비를 하는데, 비극이 일어납니다. ‘시바’라고 하는 신하가 계략을 꾸며서 다윗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사무엘하 16:3 합독
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여러분, 다윗에게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줬는데, 자기가 지금 쿠데타를 당해서 정권을 놓칠 처지가 되었더니 므비보셋이요. ‘이제야 내가 정권을 다시 차지할 날이 왔다’고 그러는 거예요.
평상시 같으면 불러서 자초지종을 알아보면서 조사를 할 텐데 다윗 본인이 너무 다급한 상황이니까 그 자리에서 졸속으로 처리를 해버립니다. 사무엘하 16:4
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못된 므비보셋의 재산을 다 몰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므비보셋이요. 왕이 피난 가는 데 따라가지도 못했습니다. 이 므비보셋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이 어이없는 모함인데, 그것도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하는 다윗에게 엄청난 상처를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므비보셋의 태도를 보세요.
이제 쿠데타가 진압이 되고 다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나니까 므비보셋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십시오. 사무엘하 19:24(새번역) 합독
24 그때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도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그는, 왕이 떠나간 날부터 평안하게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다.
알고 보니 므비보셋은 ‘내 생명의 은인인 다윗 왕이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발 뻗고 잘 수 있겠느냐?’ 했던 것입니다.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습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다음이에요.
므비보셋이 그런 태도를 보이니까 다윗이 혼란이 왔습니다. 이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이 자가 아주 배은망덕한 사람인데, 태도를 보니까 좀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어정쩡하게 판결을 내립니다. 역시 19:29(새번역)요.
29 그러나 왕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그 이야기를 또 꺼내느냐? 나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어 가져라!“
시바와 함께 밭을 나누라는 어정쩡한 판결을 내렸는데요. 그런데 30절에 므비보셋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30절(새번역) 합독
30 므비보셋이 왕에게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서 안전하게 왕궁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이제 그가 그 밭을 다 차지한들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섭섭하게 대했던 다윗에 대한 상처가 하나도 없어요. “왕께서 건강하게 돌아오시면 나는 이 물질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처음부터 욕심이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죽은 개와 같은 나를 거두어 준 고마운 왕이신데, 이까짓 재산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거예요.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윗과 므비보셋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런 용어를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은혜의 선순환’
여러분, 19장에서의 므비보셋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 므비보셋은 다윗이 자기를 볼 때, 두 갈래의 시각으로 봤던 것처럼 므비보셋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주어졌습니다. 죽은 개와 같은 자기를 구원해 준 고마운 다윗의 모습과 19장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해서 자기의 재산을 몰수한 후에 자신을 내쳤던 두 시선이 므비보셋 앞에 있는데, 여러분, 므비보셋은 어느 쪽을 택합니까? 죽은 개와 같은 자신을 건져 주었던 고마운 다윗의 모습을 택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선순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은혜는 악순환이 아닌, 선순환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선순환해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감사와 관련해서 세 가지의 권면을 짧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죄인 되었을 때,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 그래서 오늘 성찬식을 거행할 때, 그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받으시면서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 표현하기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의 성도님들은 “하나님께만 감사하면 되지” 그런 마음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주변에 고마운 사람을 자꾸만 찾으세요. 그리고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박미화 전도사님이 지난 주일에 퇴근하면서 “담임목사님과 부목사님과 함께해서 덕분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시더라고요.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 그 고마움을 표현하셨습니까? 고마움을 전해 보세요.
오늘 주보 안쪽에 보시면 감사일기 쓰기가 있습니다. 오늘만큼은 주보를 가져가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고마운 사람에 대해 가만히 묵상해 보시고 한 번 작성해 보세요. 막연하게 “그저 감사합니다” 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에 와닿으실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요. 나의 므비보셋은 누구인지 돌아보기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그 사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가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할 므비보셋과 같은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은혜를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는 은혜의 선순환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우리 잠시 눈을 감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길 원하는데요. 말씀드린 세 가지를 잔잔히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하기. 나의 므비보셋은 누구인지 돌아보기
잠시 함께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다윗처럼 요나단의 시각이 회복되어 므비보셋과 같이 은혜의 선순환이 일어나길 소망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