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9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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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하나님
부당한 하나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모든 친구들을 환영합니다.
이제 지난주에 수능을 끝내면서 11기들이 사실상의 졸업을 했습니다. 이제 12기와 13기 친구들이 함께하게 되었는데요,
다들 지난주에 컨퍼 잘 다녀왔나요? 주말간 잘 쉬고 왔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이제 우리 친구들은 기말고사 준비 모드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아마 올해 마지막 고난의 시기이겠죠?
이 고난의 시기에 맞추어 우리가 지금 고난의 성경인 욥기 말씀을 본다는 것도 어찌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오늘도 욥기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 욥은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또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지,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실 지난주에 11기들과만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에 중간 부분을 아마 못듣고 지나간 친구들이 많을거에요. 그래서 연속성을 위해 간단하게 지난주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시작하도록 할게요.
지난주에는 3장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거에요. 내가 태어난 날이 없었어야 한다고 말이죠.
이렇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유가 있어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한탄을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허공에 대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한탄한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한탄이 잘못되었음을 함께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 우리는 모든 상황, 심지어는 불평이 나오는 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 토로해야 한다는 것이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가 주님께 고백하고 도우심을 구할 때, 주님은 함께해주시며 일어날 힘 주신다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3장의 욥의 한탄을 시작으로 친구들이 이야기를 시작하죠.
가장 먼저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4장에서 등장하는데요, 그는 욥에게 분명한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분명히 너가 잘못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신다. 물론 너는 자신을 온전하게 여기겠지만, 너가 하나님보다 더 온전할 수 있느냐, 그냥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너를 평안하게 할거야.
이 내용이 5장까지 길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3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욥은 이 모든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신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6장에서 욥은 답을 시작합니다. 먼저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도 괴롭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죄가 없지만 나를 싫어하사 나를 멸망시키고자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까닭이 없음에도 자신을 죽이고자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욥은 22절부터 친구들에게도 한마디를 합니다. 아니, 내가 너희한테 재물을 달라거나 지금 상황에서 구원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왜 나를 꾸짖을 생각만 하느냐,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라. 나는 불의하지 않다. 내가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러면서 7장부터는 이제 하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님 왜 나를 치십니까. 이 고통 속에서 저는 곧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냥 지금 저를 놔주십시요.
왜 사람을 만드셔서 그에게 관심을 두시고 함께하십니까. 왜 저에게도 그렇게 계속 관심을 두시는 것입니까.
제가 범죄를 했다고 한들 그게 주님께 어떻게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왜 저를 그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주께서 내 허물과 죄악을 제거하시지 않기에 저는 이제 곧 죽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욥의 말에 어떤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이제는 강한 한탄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체념한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욥의 마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인식이 되고 있죠? 이전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백성에게 벌을 기꺼이 내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같이 죄가 없음에도 하나님은 무작정 그에게 벌을 주시기도 하신 분이 되었습니다.
욥의 이 말에 이제는 또다른 친구인 빌닷이 반박을 시작합니다. 빌닷은 시작부터 강하게 나갑니다. 아마도 욥이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고, 심지어 자신들에 대해 뭐라고 하기까지 하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너가 언제까지 그렇게 말할 것이냐, 네 말대로 하면 하나님이 정의를 굽게 하시는 분이시냐,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네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그래도 아직 살아있으니 아직 희망이 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다시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씀으로 이야기하죠.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네 나중은 창대해질거야.
그러면서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라 말합니다. 물이 없으면 빠르게 마르는 갈대처럼, 튼튼하게 짓는다고 해도 건드리면 끊어지는 거미줄 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은 빠르게 망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순전한 자들은 버리지 않고 구하시지만, 악한 자들은 붙드시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다면 너는 웃음과 즐거움을 갖게 될 것이고, 너의 원수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거야.
빌닷의 말은 강하게 욥을 압박합니다. 심지어는 자녀를 잃은 슬픔이 가시지 않은 욥에게 너희 자녀들은 죄를 지어서 죽었어! 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물론 욥에게 극약처방을 내리기 위해 그랬다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빌닷과 같은 말이 욥에게 위로가 될지는 확신이 생기지 않기는 합니다.
결국 욥은 또 그 말에 반박합니다. 9장부터 오늘 말씀 10장까지 길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먼저 9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빌닷 너가 말한 것처럼 삶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겠어. 우리가 아무리 변론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단 하나도 이야기할 수 없을거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니 나는 그분을 인식할수도 막을 수도 물을 수도 없다.
그냥 그가 진노하시면 나는 받아야 할 뿐이다.
내가 만약에 의롭더라도 나는 죄인일거야. 하나님은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다 멸망시키시니까 재난으로 죽더라도 그는 죄인일거야.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살아가려 해도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시니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옷마저도 나를 싫어할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떠나셔야 내가 그제서야 말을 할 수 있을거야.
여기까지가 9장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욥의 이 말을 어떻게 느끼시나요? 욥의 마음이 많이 무너져내림을 확인할 수 있죠. 그러면서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 비꼬는 것으로까지 느껴지게 됩니다.
욥은 이어지는 10장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정죄하지 마시고, 왜 이렇게 하시는지를 알려주십시오. 왜 주님께서 지으신 나를 학대하시고 악한 세력에게 힘을 주십니까. 주님은 제가 악하지 않은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나를 만드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셨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나를 죄인으로 만드시고 나에게 고난을 주고자 함을 압니다.
주님께서 계속 여러 사람을 통해 나를 정죄하시며 진노하시니 군대가 치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왜 제가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처럼 평안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얼마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은 시간만이라도 저를 평안하게 두시고 평안하게 죽도록 해주십시오.
여기까지가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인 10장의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욥기에서 진행되는 첫 토론의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양측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욥의 주장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 고통은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셔서 나에게 고난을 내리시는 것이다.
상대측인 친구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욥은 분명히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욥이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욥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친구들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여러분들이 결정하시기는 참 어려울 것 같아요. 일단 우리는 이전의 말씀에서 보았기 때문에 욥이 정말 잘못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욥에게 있는 고난이 그의 죄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욥이 맞다고 하기에는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죄인을 만드시는 분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거에요.
그렇다면 대체 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여기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는 욥과 욥의 친구들이 동일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한 가지의 세계관 때문입니다.
그 세계관은 바로 보응신학이라는 것이죠.
보응신학이 뭐냐면요, 하나님은 죄에 대해 고난으로 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가 죄를 저질렀기 때문인 것이죠.
아마 성경시대의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믿었던 이들은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현재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죠.
벌 = 죄라는 것은 간단한 도식이지만 꽤나 많은 것들이 그것으로 설명되기에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오늘 어떠한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이전에 내가 이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것일 거야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세계관은 사람의 죄를 억제하는 것에는 아주 좋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관에 큰 문제가 있죠.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벌주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이 보응 신학이 온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합당한 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보응 신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 이 욥기의 말씀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은 보응 신학의 관점에서는 절대로 벌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당연히 욥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고, 욥 역시도 인지부조화에 빠져 하나님을 부당한 분이라고 여긴 것이죠.
하지만 결국 답은 무엇이었나요? 고난이 반드시 죄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욥만 봐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죄가 없는 고난은 대체 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동일한 시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은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된 것이냐고 예수님께 묻는 것이죠.
분명히 저렇게 앞을 못보는 고난을 당하는 것은 누군가의 죄로부터 온 것일 텐데, 대체 그게 누굴까?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의 눈을 치료하여 빛을 보지 못하는 맹자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보여주시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사탄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욥과 그 친구들에게도 보응신학이라는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았나요? 죄를 지으면 고난이 올 것이 두려워 지속적으로 억지로 죄를 짓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올바른 모습은 아닙니다. 왜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대로 살기로 작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삶은 말씀대로의 삶을 살기 위한 노력들이 되겠죠. 당연히 죄의 길에 서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싸워나가다가 죄의 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고난을 두려워하고 떨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죄로부터 건져내주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어린 조카가 있는 친구들이 있나요? 저도 갓 두돌 된 조카랑 이제 몇 달 된 조카 까지 두명의 조카가 있는데요, 작은애는 아직 누워만 있지만, 큰애는 열심히 걸어댕깁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자유롭게 걸어댕기면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죠? 탁자에 머리를 박거나 어디 걸려서 넘어지거나 합니다.
그래서 보통 부모님들이 어떻게 하죠? 그 아이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다녀도 부모님의 손이 있으니 위험한 곳을 피할 수 있고, 설사 넘어져도 금방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손을 잡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고 이곳저곳 다니면 그 역시도 자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자유는 안전장치가 없는 자유이겠죠.
하지만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면, 정말로 안전하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고,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죄로 인해 절대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겪게 되는 고난은,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게하는 고난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은 죄가 두려워 벌벌 떨면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이 너무나도 좋아서 자연스럽게 죄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오늘은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보면서 고난이 반드시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기에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여러분들이 한주간을 살아갈 때에도, 고난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무서운 하나님을 섬기는 것 보다는,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고난과 두려움 모두 이겨내는 우리 하늘고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