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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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72:8
제목: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반박문 붙이면서 종교개혁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 날을 우리가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 1학년 친구들은 유튜브 중등부 채널에서 작년 종교개혁주일 설교 꼭 시청하세요. 루터의 가장 큰 업적은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발견했죠. 이걸 우리가 매년 기념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을 항상 기억하기 위함이에요.
루터는 종교개혁의 경종을 울렸다는 측면에서 위대하지만, 칼빈은 단언컨대, 루터와 비교하기 어려울만큼의 세계사적으로 방대한 업적을 남겼어요. 굉장히 대단하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칼빈 때문에 종교개혁은 곧 인류개혁이 되었어요. 칼빈이 없었으면 지금의 여러분의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없었어요.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 라파엘,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 등등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칼빈보다 인류 역사에 큰 유산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학교 세계사에서 칼빈을 생각보다 중요하게 다루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이 시간에 집중하셔야 돼요.
칼빈의 대표적인 저술인 <기독교 강요> 초판에 인용된 이 구절이 칼빈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오늘 설교 들으면서 항상 이 말씀 기억하기.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다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오늘 설교는 간단히 칼빈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다루면서 종교개혁이 우리의 신앙 뿐만 아니라 삶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칼빈에 대해서 강의를 듣긴 하겠지만 저는 오늘 칼빈의 신학 자체보다는 – 사실 매주 설교가 칼빈 신학이에요 - 칼빈의 신학을 나오게 한 그의 생애와 인격을 좀 들여다 볼 겁니다. 그래야 칼빈의 사상도 우리가 오해하지 않고 잘 이해할 수 있고요,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보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꼭 집중하세요!
칼빈은 1509년에 프랑스의 누아용(Noyon)이라는 작은 마을의 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루터와 거의 25살 차이가 나서 종교개혁 2세대로 여겨지고 있어요. 칼빈의 나이 11살 때 칼빈이 공부도 잘하고 신앙도 좋으니 누아용 교회에서 칼빈을 사제 보조직으로 임명해서 ‘성직록’(고위 성직자 신분)을 수여합니다.
1523년, 칼빈이 14살이었을 때 파리로 유학을 가서 라 마르세대학이라는 곳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바로 그 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대학교 안에 있는 가톨릭 대학인 몽테귀대학에 입학합니다. 거기서 거의 굶고 잠 못자면서 각종 인문학을 배우게 됩니다.
당시 파리대학도 그렇고 중세 유럽에서 신학을 전공하려면 철학, 논리학과 같은 인문학과 라틴어를 섭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아직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이었는데, 칼빈의 아버지가 갑자기 칼빈이 변호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뜻을 바꿨습니다. 변호사가 미래가 보장되는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신학을 중단하고 1528년, 칼빈이 19살일 때 오를레앙 대학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때 누아용 교회의 눈엣가시가 되었습니다. 신부가 되라고 성직록을 수여했는데 신부가 안되겠다고 선언했으니까요.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거의 밤새도록 공부해서 건강이 엄청 안좋아졌대요. 그런데 이 시기가 칼빈의 인생의 반환점이 됩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주의 사상, 즉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 때문에 칼빈이 결정적으로 종교개혁가가 됩니다.
오늘 이 인문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다른 데서 칼빈 강의에서 잘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줄게요.
인문주의가 무엇이냐면 14세기부터 발흥한 중세 유럽의 학문 운동인데요, 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이에요. 여기서 근원이라고 할 때, 근원이 무엇냐면 바로 언어를 의미해요. 인간이 표현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이 바로 ‘언어’, ‘글’입니다. 언어를 깊이 연구하는 것 없이는 학문적인 발전이 힘들어요. 우리 학교에서 공부할 때 숫자로만 배우나요? 그렇지 않죠. 모두 대부분 한국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어에 대해서 깊이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외국인이 한국어로 된 문헌을 공부하려면 한국어를 엄청 잘 해야하죠. 중세 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서양 학문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아야 발전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언어를 잘 분석하고 섭렵하면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원작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서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간성’, 도는 ‘인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휴머니즘’이라고 해요. 칼빈이 인문주의를 접하게 된 법학도 바로 인간에 대한 것이죠. 당시 모든 학문이 그랬다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인간이 표현하는 방식 중에 ‘예술’도 있습니다. 그래서 글과 예술을 연구해서 다시 부활시켰다는 의미에서 ‘문예부흥’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르네상스’라는 표현도 사용하는데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풍성한 학문과 예술을 부활시키자는 거예요. 그래서 인문주의, 르네상스, 휴머니즘, 문예부흥 다 같은 말이에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것이라면 무시론적인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휴머니즘의 무신론적 사상은 18세기 이후, 그니까 최근에 생겨난 사상이에요. 원래 르네상스 휴머니즘 인문주의는 무신론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이지 않았어요. 전혀 달랐어요. 당시는 모두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죠. 자, 이제 인문주의가 왜 기독교 신앙에 아주 중요한지 설명해 드릴게요. 저는 좀 더 직관적인 ‘인문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게요.
그런데 당시 신부들과 사제들은 고대 그리스어를 전혀 할 수 없었어요. 라틴어만 할 수 있었죠. 그래서 사제들이 엄청 멍청했어요. 그래서 르네상스 이전 시기를 ‘중세 암흑기’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이 설교를 하니까 교회가 제대로 굴러갈까요? 그럴 수 없겠죠?
그래서 이때 교회가 어떻게 굴러갔냐면, 그 중심에 ‘스콜라주의’라는 게 있었어요. 스콜라주의가 무엇이냐면, 쉽게 말해 “인간에 관심이 없는데 복잡한 신학”입니다. 가령 “바늘침 위에 천사 몇 마리가 춤을 출 수 있을까?”를 가지고 토론해요. 이게 여러분의 삶과 상관이 있을까요? 머리만 아프죠. 원래 칼빈이 사제가 되려고 공부했던 몽테귀대학도 성경 말씀보다 복잡하고 사변적이고 삶에서 쓸데없는 이런 스콜라적인 신학을 연구하던 곳이었어요. 만약에 계속 몽테귀대학에 있었으면 칼빈도 그런 멍청한 사제가 되었겠죠.
어쨌든 그래서 당시 신자들은 대부분 멘붕에 빠졌어요. 신부들이 설교할 때 이런 식의 말을 하고 앉아 있으니까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삶과 신앙이 오히려 괴리가 느껴지기 시작하며서 많은 성도들이 실족하고 있었어요. 여러분도 신앙과 삶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되죠? 이때가 그랬어요. 사제들은 인간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쉽게 말해 종교개혁 전까지 서구 유럽은 고대 중국보다 못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인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까 윤리, 과학, 도덕, 예술, 수학, 이런 것들이 거의 없었죠.
하지만 인문주의 학자들이 그리스 철학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인문학의 원전, 예를 들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 원전을 읽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를 분석했는데, 이게 바로 그 신약성경의 원어와 같은 헬라어입니다.
그래서! 인문주의가 일어날 때 루터가 성경을 헬라어 원어로 통해서 면밀히 분석하니까 로마가톨릭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거죠.
칼빈도 오를레앙 대학에 재학 시절에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면서 성경을 깊게 연구했고, 루터가 남긴 많은 저술들을 읽으면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죠. 칼빈이 법학을 통해서 인간성, 인간다움을 연구하는 인문주의가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왔다는 거예요. 칼빈에게 인문주의는 성경을 아주 깊게 분석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어요.
그래서, 보세요, 칼빈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성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했더니, 하나님 말씀에 더욱 깊게 연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실력을 얻게 되었어요.
이게 왜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냐면, 칼빈이 인문주의자로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다보니,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을지, 삶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신앙이 해결하는지를 관심을 갖고 볼 수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삶을 위한 신앙으로 종교개혁의 신앙을 더욱 업그레이드 해놓았어요.
인간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알게 되고, 그 상태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다 보면 우리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나 삶의 원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더욱 가까이 해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아요. 따라서 말해보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분리될 수 없다.”
“아! 가톨릭처럼 하나님 말씀이 인간과 상관없는 게 아니구나! 모든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문제가 해결될 수 없구나!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가장 하나님적인 것이 참된 인간적인 것이구나!”라는 걸 깨닫고,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정치든, 개인적 고민이든, 인간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게 되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의 통치가 더 적극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칼빈은 삶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렇게 전세계인들의 삶을 바꾸어놓는 사상들을 엄청 많이 쏟아낼 수 있었죠. 살아있고 활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을 알면 인간의 문제를 더욱 잘 알게 되고, 인간의 삶에 대해서 깊게 고뇌하면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는 상호작용이 계속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도 학교 공부에 성실해야 합니다. 무조건 시험을 잘보라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이 갖고 있는 문제에 여러분이 직접 부딪혀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통치로 해소하는 연습이 바로 신앙이에요.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삶에 있습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바꿉니다. 하나님을 알면 인간을 잘 알게 되어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정말 거짓말이에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궁금하게 되어 있어요. 예체능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을 알려고 하다 보면 공부도 열심히 하게 돼요. 왜냐하면 평일에 어쩔 수 없이 성경을 못보는 시간에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니까요. 그래서 삶에 충실하다 보면 하나님이 너무 궁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신앙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했어요. 그리스도인은 성경은 기본이고 삶을 통해서도, 서적을 통해서도, 공부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곳에는 열정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삶을 통치하고 계신다고 믿으니까요.
이제 칼빈이 어떻게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삶에 적용시켰는지를 보고 마칠 겁니다. 이거 보면 감이 바로 올 겁니다.
첫째로, 개신교 신앙고백을 처음으로 체계화했습니다. 프랑스 개신교인들이 국왕에 의해 탄압 받고 있을 때 칼빈이 “우리는 광신도가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러한 것이며 정통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탄압하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개신교의 신앙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변호하는 최초의 책이 바로 그 위대한 <기독교 강요>입니다. 칼빈이 27살 때 이 책을 썼습니다. 칼빈 때문에 저를 포함한 많은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이 시험에 들었죠. 이 책이 장로교 뿐만 아니라 감리교, 침례교 등 지금의 개신교를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모든 교단이 다 칼빈에 빚졌습니다. 모든 개신교 교파가 <기독교 강요>에 정초하고 있어요. 여기서 강조점만 살짝씩 달라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입니다. 필독서에요. 칼빈은 자기가 쓴 이 책을 프랑스어로 자기가 번역하고, 다시 개정하고, 다시 번역하고, 다시 개정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지금은 엄청 두꺼운 책으로 최종판이 완성되었어요. 초판은 여러분이 읽어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만화 기독교 강요>라도 꼭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둘째, 교회 정치를 바꾸었어요. 목사 제도가 바로 칼빈이 만들었어요. 성경을 근거로 만든 겁니다. 목사, 장로, 교사, 집사 이렇게 4개의 직분으로 교회가 구성되도록 했습니다. 목사만 혼자 권력을 잡으면 타락하니까 장로들이 같이 회의체를 꾸리도록 했어요. 그리고 교사들을 통해 처음으로 다음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했고, 수요기도회 전통도 칼빈으로부터 나오게 되었어요.
셋째, 교회 안의 화려한 조형물과 성가대를 없앴어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성경을 못봐서 이러한 우상들로 자신의 신앙적 욕구를 채웠는데, 직접 말씀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죠. 화려한 조형과 따라 부르기도 어려운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는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지금 성가대랑은 달라요. 그때 성가대는 어떤 성가대였냐, 천상의 소리를 내겠다고 어린 남자아이를 거세해서 남자인데 여자와 같은 미성을 내는 가수인 카스트라토를 육성했거든요. 얼마나 비인간적이에요?
넷째, 회중찬양을 시작했어요.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회중들이 같이 찬양할 수 있도록 회중찬양을 칼빈이 구성했어요. 지금 우리가 같이 부르는 찬양이 가능한 것도 칼빈이 처음 시작한 거예요.
다섯째, 소명을 강조했어요. 하나님이 교회 공간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성도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예정론이 여기서 나타나요. 선택받은 자는 선택받은 백성답게 살게 된다는 거에요. 예정되었다고 막 사는 게 아닌 거죠. 그래서 나중에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의회 자문위원이 되는데, 원래 창녀와 사기와 인분으로 넘쳐나던 끔찍한 스위스 제네바가 칼빈의 윤리 지침 덕분에 깨끗한 도시로 바뀌어요. 이후로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유명해지는데 이렇게 되도록 처음 시작한 사람이 칼빈이었어요.
여섯째, 자유시장경제 개념이 처음으로 생겼어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니까 공정한 거래가 가능해진 거에요. 지금 자본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정부의 적절한 간섭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원래는 그 역할을 직업의식,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려는 신앙이 이걸 가능하게 했어요. 그래서 스위스로 세계의 돈이 모이지 않습니까?
일곱째, 국가의 정치제도를 바꾸었어요. 성경을 보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시스템이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의 삼권분립 시스템이라는 것을 칼빈이 발견했어요. 권력이 분산되어야 국가를 균형있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칼빈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삼권분립을 제안했어요. 미국의 청교도가 여기에 영향을 받아서 지금의 미국식 민주주의가 발생한 거에요. 그러니까 사실상 우리나라도 칼빈이 제안한 정치제도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입니다. 칼빈의 한 편지에서 나온 말인데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영역에 미칩니다. 교회 따로, 학교 따로가 아닙니다. 칼빈은 인문주의 덕에 신앙과 삶 사이에서 씨름을 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 고민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해요. 오늘 묵상한 말씀, 주일에 들은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고민해야 해요. 왜 적용이 안되지? 왜 말씀과 내 삶이 관련이 없는 것 같지? 고민하는 거를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야 내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칼빈을 통해서 우리는 그 증거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의 삶을 너머 전 세계를 변화시켰다는 것을요. 그러니 말씀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기로 결단한다면 여러분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화될 것을 믿으세요. 삶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칼빈처럼 씨름하세요. 그렇다면 땅끝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