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8주일예배_시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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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려 사는 삶
어울려 사는 삶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우리는 오늘 아름다운 시편의 말씀을 함께 보았습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한글판개역)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표준새번역) 이 말씀은 형제자매가 어울려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두 가지 은유로 표현합니다. 마치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흘러 옷깃에 흘러내리는 것과 같고,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은유는 오늘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잘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고귀하고 찬란한 어떤 것을 말합니다.
아론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향기 나는 기름의 은유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지니고 있는 제사장 아론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 앞에 나서는 제사장의 옷은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습니다. 거기에 길게 늘어뜨린 수염은 권위와 위엄을 나타냅니다. 거기에 향기 나는 기름이 드리워졌으니 그 수염은 더욱 빛을 발하며 아름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 은유는 고대 근동의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렬하는 태양 빛 아래서 모든 것이 시들어버렸다 한밤중에 내리는 이슬로 그 모든 것이 다시 생기를 얻는 장면은 찬란합니다. 더욱이 건조하기 그지없는 사막지역에서 이슬로 생기를 얻는 생명들의 모습은 더없이 찬란합니다. 저 북쪽 헐몬산에서부터 남쪽 유다의 시온산에 이르기까지 이슬이 내리는 일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팔레스타인 일대 나라들의 수원지 역할을 하는 헐몬산은 그 지역에서 가장 우뚝 선 산입니다. 그 가장 높은 산에서 그보다 낮은 산에 이르기까지 온 땅에 내리는 이슬의 은유는, 온 땅이 생기를 얻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형제자매가 어울려 사는 것은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지금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까요? 형제자매가 어울려 사는 가정의 아름다운 표본을 두고 노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서 거꾸로 그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 아름다운 시편의 이면에는 어떤 아픔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형제자매들이 한 땅을 유업으로 삼아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이 당연한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땅에서 대가족이 동거하는 것이 저절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땅에 사는 그 큰 가족들 안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갈등과 다툼이 심심치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그 갈등은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형제간의 갈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은 그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형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했고, 아브라함과 롯은 한 땅에 살 수 없어 갈라섰고, 에서와 야곱은 늘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국가가 형성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시인은 형제들의 갈등이 심화된 현실에서 거꾸로 형제자매가 어울려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단지 함께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어울려’ 함께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표준새번역은 ‘어울려’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은 ‘연합하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은 제도와 관습을 따라 한 땅에서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것, 단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하여 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해관계가 합치하지 않을 때 갈라설 수밖에 없는 삶의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마음으로부터 함께 어울리며,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시편은 혈연적 대가족주의를 단순히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형적인 대가족주의를 옹호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노래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전형적인 대가족을 이루는 가족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가족에게는 아픔을 안기는 슬픈 노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시편은, 진정으로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서로 함께 진정으로 어울릴 수 있다면, 그것은 혈연적인 형제자매 관계가 아니라도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어울려서 함께 사는 형제자매’, ‘연합하여 동거하는 형제’의 아름다움을 새삼 강조하고 노래합니다.
어울려 함께 사는 일, 그것은 제도가 묶어 주고 혈연이 이어 주고 이해관계가 얽히게 해 주어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아끼며, 결국에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가운데 어울려 사는 것을 말합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삶, 뿐만 아니라 서로의 기쁨과 슬픔 이면의 삶의 진실까지 헤아리며 감싸 안는 삶을 말합니다. 기쁨 이면의 어떤 아픔을 헤아리고, 슬픔 이면의 어떤 꿋꿋함까지도 찾아내 더욱 북돋아주는 삶의 관계, 그것이 함께 어울려 사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형제자매의 모습입니다. 설령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면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상, 교회의 꿈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일입니까?
오로지 능력만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척도가 되고 있고, 이해관계로만 똘똘 뭉치는 삶의 관계가 더욱 확대되어 가는 현실에서, 거꾸로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어울려 사는 삶에 대한 꿈을 더욱 소중히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