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9 청년교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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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9:17–21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18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20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우리 한국 문화중에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정" 이다.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문학인 르 클레지오 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한국 문학을 정으로 평가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정이란 개념이 참 오묘하고, 독특하다, 영서, 불어 사전을 뒤져봐도 번역할 길이 없다"
정은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과 바로 정이 들지 않는다. 정이 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은 시간의 흐름을 기본으로 ‘든다 또는 들다'와 같은 말이 어울린다. 그래서 정이 들다, 정이 들었다. 라는 표현을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논리적으로 ‘들다'의 반댓말은 ‘나가다', ‘빠지다' 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정"에 사용하지 않는다. 정이 들다의 반댓말은 정이 나가다가 아니라 “정이 떨어진다” 이다. 이건 시공간에 따라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뚝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 가치판단을 뛰어 넘는 정은 싫어도 생겨난다. 싫어도 생기는 마음이 단순히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원한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오묘한 마음이다. 그래서 심지어 “미운 정"도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문화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우리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내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 내 아빠,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아빠, 우리 엄마라고 부른다. 내 아들, 내 딸이 아니라, 우리 아들, 우리 딸이 된다. 이러한 것들이 발전되어 정의 문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 성장하면서 우리보다는 내가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화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독특한 정의 문화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얻지 않는다면 그것을 통해 내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관심을 두지 않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JESEMBLER 공동체에는 정이 있길 바란다.
오늘 본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을 권면하며 시작한다.
본문 17절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일이니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갚아 주신다.” 다시말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단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잠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권면을 꾸준히 하고 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 둔감하게 살아가는 것을 꾸짖기도 한다.
잠언 14:31
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잠언 21:13 (NKRV)
13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여러분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는가? 경제적 도움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 주느냐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 중하나가 바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삶이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꾸어주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시겠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정도로 하나님은 지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레위기 19:9–10 (NKRV)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것을 기꺼이 나누며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이다.
어느순간부터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내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여러분들에게 있길 바란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뭐 가진 것이 없는데, 이다음에 내가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을 때, 그때 나눠야지..” 아니다. 지금도 못하는데 많은 것들이 생기면 그것을 나눌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길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또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을 위해서이다. 그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저 한끼를 해결 할 수 있게, 아니 허기라도 면 할 수 있게 내게 있는 것을 나누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경에 밭 모퉁이를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하면 되는 것이다. 모퉁이를 1m로 정하든지 1cm정하던지 10m로 정하던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단 모퉁이를 남겨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면을 둘러보아야 한다. 단지 재정적 어려움 뿐만 아니라, 힘들어하는 지체가 있으면, 외로워 하는 지체가 있으면 그들에게 잠깐 말 벗이 되어주고, 다가가 위로의 한마디라도 걸어주라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 공동체에 처음 출석하는 청년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야 한다. 신앙 생활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에 온 것 아닌가? 그러면 따뜻하게 맞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누구 집에 갔는데 아무도 반겨주지 않고 자기를 보면서 서로 수근수근 하면 그게 좋겠는가?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터전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 주변을 둘러보며 도움이 필요한 그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일본으로 선교를 가고 남아공으로 선교를 가고 노방에서 전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 내 옆에 있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성도로써 이땅에서 살아가는 지혜인 것이다.
또 오늘 본문을 보면 여러 권면이 있지만, 특별히 우리의 삶의 주인이 주님임을 인정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오늘 본문 21절에
잠언 19:21 (NKRV)
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사람의 모든 계획이 헛된 것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마치 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게 바진다. 그러나 사람이 계획한 것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우리가 많이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우리가 아무리 계획한다고 해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것의 없다. 우리는 당장 사진이 살고 죽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계획이 헛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계획을 세우지 말고 무계획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늘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선하게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 계획이 하나님보다 우선되거나 먼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참새 두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져 팔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갈라디아서 2:20 (NKRV)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었고 그로인해 우리의 주권은 내게 있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있다. 는 이 말씀에 우리는 진심으로 아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 삶이 진행되어도 우리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그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면 나보다 내 삶을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겠는가?
지금은 은퇴하신 김동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비행기를 꽤 자주 탑니다. 그런데 조종실 문을 두드려 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조종실 문을 두드리며 “제가 자동차 운전 경력이 30년 정되 되는데, 비행기 조종이나 자동차 운전이나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피곤하시면 제가 당신 대신 비행기 조종을 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 받을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비행기 조종사가 조종석을 제게 넘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비행기는 추락하고 맙니다.
비행기 조정은 누가해야 합니까? 비행기 조종사가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세상은 누가 조종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저는 늘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애씁니다. ‘나 정도면 잘났지, 꽤 유능하잖아, 하나님, 저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저는 추락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부인하고, 또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야, 나는 무능해, 까불면 죽어, 하나님 붙잡아야 살아"
우리의 주권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길 바란다. 우리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나의 삶의 키를 하나님께 맡긴 삶인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것을 명령하시고 그냥 가만히 아무말도 안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떻게 만들라고 정말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성경을 보며 실제 크기로 방주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자세하게 방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방주를 움직일 키 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에는 방향을 움직일 키가 없다. 그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 배를 움직이는 것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 자에게 그가 경영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무엇을 계획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계획한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하나님의 계획하심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