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2 수요]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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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찬송 270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 250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묵도후 찬송 277 양떼를 떠나서
본문 호1:1-2:1
11월 25일(토) 원로목사 추대식과 담임목사 위임식. 예식은 11시에 시작하지만 찬양은 10:45부터 시작한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45분까지 모두 예배의 자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되도록 미리 오셔서 기도로 준비하셔도 좋을 것 같다.
그날 교회 오실 때 개인차량으로 오시는 분들은 가능한한 외부에서 오실 손님들을 배려하셔서 차량은 교회에서 멀리 주차해주셨으면 좋겠다. 교회셔틀이 운행하니 가능하시면 셔틀로 오셔도 좋을 것 같다.
예식 이후 점심식사는 12:30부터 가능하오니 미리 식당에 가봐야 밥 안준다고 한다. 그리고 식당 장소는 당일 공개예정이라고 하오니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린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께서는 식당 이용시에도 되도록 교회 셔틀을 이용해 주시길 바라며, 부득이 자차를 이용하셔야 하는 분들은 다른 성도님들을 차에 태워 함께 이동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은혜로운 추대식과 위임식이 되도록 우리가 이번 한 주 특별기도주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목, 금 2일 남았는데, 새벽에 이 일을 위해 기도에 힘써 주셔서 화평과 양보와 하나됨의 은혜를 누리는 예식이 되도록 계속해서 마음을 모아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절박한 심정은 많은 경우에 죄에 대한 진노로 표출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죄를 미워하신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아담이 죄에 빠진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딜레마에 빠지셨다.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의지와 더불어, 죄에 빠진 인간을 미워하실 수 밖에 없는 공의의 의지를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사랑하실 수 밖에 없는데, 정작 그 인간은 하나님께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죄에 빠진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려고 사랑의 의지를 계속 발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계속해서 사랑의 손길을 베푸시나 사악한 인간은 그 사랑의 손길을 계속 거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주시기 위해 어느날 호세아 선지자를 부르셨다. 그러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말씀은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선지자에게 이러한 명을 하시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호세아는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던 신실한 종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음란과 부정을 멀리하며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던 하나님 의 종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이런 명령을 받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더군다나 2절을 보면 이 때가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처음 그 입에 말씀을 주실 때,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가운데 그 첫번째 말씀으로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하시는 것이다.
2절 초반부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호세아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이다.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열두 소선지서 라고 부르는데, 많은 신학자들은 호세아서를 열두 소선지서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열두 소선지서의 책들이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세아서가 요엘보다 연대적으로 더 나중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선지서의 제일 앞에 위치한 것은, 호세아서가 열두 소선지서 전체를 푸는 첫 단추임을 입증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호세아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 이라는 구절은 이제부터 이어질 열두 소선지서 전체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하는 하나님 말씀의 첫번째 구절, 신약이 도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어진 소선지서 말씀의 첫 신호가, 임박한 진노와 멸망 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거나 힘을 주시는 말씀이 아닌, 참으로 전하는 자나 당시 호세아의 말씀을 듣는 자나,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째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종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단정하고 조신한 여인과 결혼하라 하지 않으시고 어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들을 낳으라고 말씀하시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처절한 심정을 대변하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결혼식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로 파기될 수 없는 언약적인 결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가 언약의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의 결혼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모세의 중재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았지만,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의 음행은 멈추지 않았다. 사사들과 선지자들과 경건한 왕들의 영향력이 미칠 때는 잠시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 같다가도, 그들이 죽고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다시 음행을 저질렀다.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며 이방인들이 행했던 음란하던 우상숭배의 행위들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음란한 행태들을 예배 안으로 가져 들어오기까지 하였다.
여러분, 이를 지켜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하나님은 신실한 남편으로서 단 한번도 자신의 아내 이스라엘을 버리시거나 외도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의 신부인 이스라엘은 밥 먹듯이 바람을 피우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기웃거린다. 신랑이신 하나님은 자기 아내를 오래 참으사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아내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끊임없는 헌신과 노력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신부를 생각하니 그야말로 마음이 찢어질 듯 괴롭고 고통스러우셨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신의 처절한 마음을 생생하게 전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선지자를 부르셔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 명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심정을 전해주신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우상을 사랑하며 영적 간음을 저지르는 것을 보시며 그 괴로워하시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한글성경에는 다소 약하게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정확히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다. 2절 중반부 부터 보시면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왜냐하면 이 땅이 여호와의 뒤를 떠나 크게 음행하였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 아주 당황했을 것이다. 세상 어떤 남자가 천박한 여자와 결혼하길 기뻐하겠는가? 세상 어떤 남자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말씀에 즐거이 순종하겠는가?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처절한 심정을 깨닫게 되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리고 음란한 여인들을 찾으러 다닌다. 적당히 음란한 여자가 아니라 아주 최고조로 음란한 여인을 찾으러 다닌다. 그 여인은 바로 최고조로 음란하였던 이스라엘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그녀와 결혼을 한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아주 평행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식을 올리기도 전에 이미 금송아지 사건으로 음행을 저질렀던 음란한 백성들이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최고조로 음란한 여인이었다. 또한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숭배하며 음행을 저질렀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우상 중 하나로 하나님을 섬기며, 우상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겼던 그들이었다. 이스라엘이나 고멜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이 주어질 때의 배경을 잠시 생각해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여로보함2세의 통치 말년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남유다 히스기야의 통치 초기까지 대략 40여년 간 사역을 감당했다. 이 때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최고조로 번성했던 시기였다.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변 나라들의 침략도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던 시기였다. 강대국이었다.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이 없을 정도로 황금기를 맞았지만 정작 그들의 영적인 측면은 가장 어둡고 가장 부패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회적 정의는 완전히 무너졌고, 특권층은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약자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넘치는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저버리고, 오히려 복의 근원을 바알에게서 찾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알숭배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쳐졌다. 탐욕과 소유욕을 향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방식이 매우 음란했기 때문에, 그들의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바와 아주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큰 메시지를 던져 준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힘들게 산다 하더라도 오래 전 보리고개와 같은 절대 빈곤은 거의 없어졌다 해도 무방하다. 경제적으로만 보아도 대한민국은 세계 순위 안에 들어가는 경제 대국이 되었고, 우리나라의 거대 기업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름을 알리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기업만 그러한가? 교회 규모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그러면 교회가 부흥한 만큼 한국교회 교인들의 믿음도 성장했는가? 교회의 숫자가 늘어가는 만큼 우리는 복음이 주는 확신과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는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신만큼 우리의 경건생활도 깊어졌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짐으로 세상 가운데 공평과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되었는가? “내가 다른 사람들은 다 못 믿어도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믿는다”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는가?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오늘날 만큼이나 교회의 신뢰가 무너진 때도 없고, 오히려 경건의 능력은 과거 어떤 때보다 곤두박질 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가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넘치는 축복들이 교회의 발목을 잡아 넘어지게 만들고 있다. 어줍잖은 가짜 복음들이 십자가 복음을 희석시키며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바알과 아세라상을 올려두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가운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땅의 부요함과 안락함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신앙적인 결단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을 하며 좋은 추억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교회 밖의 저 죄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께 헌금도 착실하게 하고 있고, 주일예배도 안빠지고 있으니 쟤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지식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지만, 실제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그저 좋은 구색을 갖추고 있는 “종교인”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면서 실제로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했던 것처럼, 오늘날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했고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이라고 지어주셨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명이었던 “이스르엘”을 호세아의 장남 이름으로 지어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스르엘은 북이스라엘의 도시 이름인데, 지리적으로 이스르엘 땅은 이스라엘 땅에서 보기 드문 평지였고, 땅도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눈독을 들이던 땅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이곳에서는 온갖 죄악의 사건들이 벌어졌었다. 열왕기상 21 장을 보면,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살해하고 그의 포도원을 갈취했었던 그 일이 이스르엘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열왕기하 9 장을 보면 예후가 요람과 이스벨과 그 밖의 아합 집안 사람들을 살육한 곳이 바로 이스르엘 땅이었다. 한마디로 이스르엘은 피로 물든 땅이었고, 살육과 폭력의 대명사와도 같던 곳이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첫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이라고 지으시며 심판을 선고하신다. 내용인즉슨 이스르엘 땅에서 흘린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며,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시겠다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르엘 땅에서 온갖 악행과 범죄를 서슴지 않음으로 인하여 공의의 하나님이 마침내 진노하셨다. 사람들이 모두 갖길 원하던 그 땅에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어야 할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이토록 황금기를 주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그들에겐 비극이었다. 풍요와 성공의 원천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주신 선물에만 매달려 정작 만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 타락한 죄인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이스라엘이 음행을 저지르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호세아의 말도 안되는 결혼을 통해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를 주시며 회개할 시간을 주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라고, 지금이라도 너희들의 신실한 남편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이다. 세상에 이런 바보같은 남편이 어디있단 말인가. 음란한 아내를 하염없이 눈물로 기다리며, 지금이라도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지난 일은 다 잊어줄테니 그냥 돌아오기만 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정말 미련한 남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영적 간음을 일삼으며, 하나님보다 바알을 더 사랑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워 하시며 정확히 20년 후에 5절 말씀처럼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어”버리셨다. 이스라엘의 활이 꺾이는 날이란 곧 예후 왕조가 패망하는 날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주전 733년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이스라엘 땅을 침공하여 수많은 성읍들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활, 곧 이스라엘의 그 막강하다 여겨지던 군사력을 완전히 꺾으셨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셨던 이스르엘 땅에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한 죄만 일삼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심판하셨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서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것들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게 만드셨던 것이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마음에 사모하는 이스르엘 땅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선물로 주셨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복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가? 존 파이퍼 목사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최대 적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고 주시는 온갖 복된 선물들이 자칫 우리를 패망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분이 가진 재능과 은사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여러분이 가지신 지식, 학력, 친화력, 사교성, 리더십은 모두 여러분의 성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살아왔던 환경, 형편, 소유, 배경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다. 이에 동의하시는가? 과거 이스라엘이 이스르엘 땅에서 자신이 누려오던 많은 것들로 악랄한 죄악을 일삼는데 사용하자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셨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된 선물들을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악랄하게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여러분이 가지신 그 이스르엘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계속된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또 임 신하여 이번에는 딸을 낳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 라고 지을 것을 명하신다. 히브리어로 ‘로’는 부정의 의미이고, 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라 는 의미이다. 따라서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라는 의미이다. 진노와 심판 중에도 자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으려 하겠는가? 그럼에도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딸의 이름을 통해 6절처럼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라”고 선언하셨다.
고멜은 또 임신하여 이번에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 라고 지어 주신다. 암미는 히브리어로 ‘내 백성’이라는 의미 이므로,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범죄하여 회개하지 않으시면 그들을 “로루하마”라고, "로암미”라고 여기시며 진노의 심판을 내리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많은 은혜의 복들을 주셨는데 그것을 합당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온갖 악을 일삼는데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복들을 바꾸사 저주와 심판의 도구로 삼으신다. 내가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화로 바꾸실 것이고, 내가 그토록 의지하던 모든 것들도 단숨에 꺾으사 흩어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진지하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 허락하신 이스르엘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신 이스르엘 땅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르게 사용하길 원하신다. 이 목적을 위해 복을 주셨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복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이것들을 사용하고 있는가? 내가 머리로는 하나님도 알고 은혜도 알고 말씀에 대한 지식도 있는데 그것들이 실제 삶의 현장 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잘 연결되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세상 사람들처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이 말씀 앞에 그 누구도 고개를 떳떳하게 들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말씀을 증거하는 저조차도 심히 부끄럽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복들을 주셨는데,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내가 받은 많은 복들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건가? 자문하게 되었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을 잘 사용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더라.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어쩌면 지금 우리의 신앙행실들은 하나님 앞에서 로루하마, 로암미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우리 중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자랑할 수 있으랴. 그저 부끄러움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의 목적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릴 다시금 그분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7절 말씀에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방금 읽은 말씀을 자세히 보시라. 지금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을 밝히시는데, 그들을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마병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무엇으로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되, 세상의 강력한 힘으로 여겨지는 칼이나 활이나 마병등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통해 그들에게 확실한 구원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유다 족속에 영원한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궁극적인 사건은 무엇인가?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그 사건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신 것 같지만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활과 칼로 그들에게 샬롬의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다. 10절 말씀대로 이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졌다. 바울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혈통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다. 지금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다. 언약의 자손, 즉 함께 모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참 이스라엘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한 이스라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받으신 여러분, 도저히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었고, 거룩하신 분의 백성이라 일컬어질 수 없던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긍휼을 입을 자들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우리에게 이토록 크신 은혜를 베푸신 것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들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작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중에서도,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 하였던 이스라엘의 모습들이 보일런지도 모른다. 우리 조국과 전세계를 바라볼 때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던 이스라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오늘날 주변을 돌아보면 그 영적 음란함이 얼마나 심각한가? 온갖 탐욕과 쾌락에 젖어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더욱 음란을 좇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풍조가 얼마나 악한가? 성적인 부분들부터 시작해서 온갖 윤리적인 부분들이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용인되기 시작하고, 교회 안에서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방종함과 나태함,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기이한 신앙형태들이 결국 여호와를 떠나 음란하게 만들기 시작하며, 어쩌면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위기 가운데 놓여있는지 모르겠다.
악하고 음란한 시대 가운데 더욱 이런 풍조가 교회를 향해 밀려올 것이다. 다가올 세대는 이전 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훨씬 악하고 음란한 시대적 유혹 앞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라. 비록 이 땅이, 이 나라가, 우리 한국 교회가, 설령 내 삶이 온갖 불법과 악행들이 넘쳐나는 이스르엘 땅과 같을지라도, 이 무너진 땅을 회복하실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뿐임을 기억하라.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물들어 무너져내리는 내 삶을 다시 일으키실 분도 우리의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뿐임을 확신하라.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노라고 친히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여전히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심을 확신하길 바란다.
여전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곳 저곳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 뿐이지만, 주님께서 이 땅을 붙드실 때, 주님께서 이 나라를 붙드실 때, 주님께서 이 교회를 붙드시고 나의 삶을 붙드실 때, 로루하마가 루하마로, 로암미가 암미로 새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며 여전히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님, 악하고 음란한 시대 속에서 무너지고 있는 내 삶을 붙들어주옵소서. 도저히 긍휼을 얻을만한,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 받을만한 삶이 되지 못하오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 의지하여 이 시간 간구하오니, 주여 무너진 우리의 삶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옵소서.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옵소서. 악하고 음란한 시대 속에서 이 나라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또한 함께 기도하실 때,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은퇴식과 취임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합과 화평과 하나됨의 은혜가 임하는 예식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하자.
사랑하는 주님, 도저히 루하마와 암미라고 불려질 수 없는 죄인들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만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왔사오니, 주여 우리의 삶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다시금 주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지금이라도 돌아오길 원하시는 우리 신랑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돌이키는 모든 주의 백성들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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