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음모
에스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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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5장 1-14절, 지혜와 음모
337장 / 342장
기도제목
예배와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목장과 우리 각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에스더 5장의 내용을 살피면 4장에 이어서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에스더 왕후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하만과 그의 집안은 여전히 악의와 음모가 가득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축구 경기를 보더라도, 경기 전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감이 돕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면 어느정도 승패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기 전에는 상대방이 준비한 패가 무엇인지, 그들의 실력이 진짜 어떠한지 정확히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막상 경기를 펼치게 되면, 훈련량이 월등히 좋은 팀, 팀웍이 좋은 팀, 전략이 우수한 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5장에서는 아직 수면 아래에서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5장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통찰력은 무엇일까요? 5장은 에스더와 하만의 무리가 선명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대조를 통해서 악의 단기적인 성공은 착각이라는 것을 다시금 보여줍니다.
지혜와 음모는 남들이 갖추지 못한 기지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닮아보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때로 악이 승승장구하기에, 단기적으로도 악이 유리한 것처럼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것을 취하고, 또 어떨 때는 저것을 취하는 편리에 따라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양갈래의 길처럼 악의 길에서 선의 길로 옮겨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18절에서는 이들의 길이 미끄러운 곳에 있으며 급히 파멸로 빠짐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73:18 (NKRV)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오늘 에스더를 살펴보면, 지혜와 음모는 서로 병립할 수 없고, 어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각 양상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선한 삶을 살아가기에 감사할 수 있는 이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에스더는 5장 내내 지혜로 빛납니다. 지혜라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할 때에 진정한 용기와 아름다움이 빛나는 법입니다.
4장에서 이미 에스더가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믿음으로 서는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5장에서의 에스더는 없었을 겁니다. 금식의 효과는 우리의 혈기를 가라앉게 합니다. 인간적인 힘이 앞서지 않게 합니다. 극도로 흥분되고 조급함이 들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기도하면서 점차 복잡한 상황이 심플해졌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모든 유다 민족의 운명을 자신이 짊어지려니 그 답답함이 가슴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제의 본질이 보입니다. 왕의 마음을 바꿔야하는 거죠. 모르드개의 말처럼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는 것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러한 생각 끝에 그녀는 이제 담대하게 왕후의 기개로서 왕 앞에 서 있습니다.
에스더 5:1-2 (NKRV)
1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은 이러한 에스더의 모습에 다시금 깊은 매력과 사랑을 느꼈을 겁니다. 에스더는 원래는 이렇게 담대한 성격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이토록 담대함이 생긴거죠. 왕 또한 왕비가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나오면 죽게할 수도 있음을, 그러한 제도를 너무나 잘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왕의 눈에는 왕비의 기개로서 보이는 것이죠. 제국의 왕궁이기에 왕비가 선 어전 맞은편까지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 어떤 특별한 치장이나 꾸밈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왕후의 기개와 당당함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살피게 되는 지혜의 1차적인 특성은 이러한 용기입니다. 반드시 움직여야할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낼 수 없는 용기를 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바로 이러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도우심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잠언(21:1)에서도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에스더가 왕의 눈에 아름답게 비추이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을 겁니다.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고서 다시 보면 참 반갑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보지 못한지 30일이 되었습니다. 또 혹자들은 에스더가 3일간 금식한 것이 다이어트가 되어 아름답게 비춰졌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를 초월해서 간섭하셔서, 왕의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의 다양한 사본들 중에서 70인역에서는 명백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온유함으로 바꾸셨”기 때문에 에스더가 왕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고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과 상황을 섭리하셨습니다.
이어서 2절을 살펴보게 되면 지혜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왕후 에스더는 왕의 사랑스러운 아내로서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1장의 와스디 왕비와는 또 다릅니다. 왕후로서의 기개가 있지만, 왕에게는 한 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서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놀라운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 금 규를 내밀었습니다. 왕의 권한을 상징하고,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금 규를 내밉니다. 그러나 왕후 에스더는 왕에게 가까이 가서, 그 앞에서 한 없이 자유롭지만 동시에 사랑스러운 왕후로서 섭니다. 그녀는 금 규 끝을 만집니다. 어느 누가 왕의 금 규를 만질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분명 왕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지금 앞에 서 있습니다. 마치 그녀의 손 끝으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게 당신은 왕이기 보다는 남편입니다.” “저는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이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왕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할지,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에스더의 행동에서 일관성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3장 끝에서 하만과 왕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는 취하였고, 그 아래 성의 백성들은 혼돈하였습니다. 그러한 왕을 다시금 지혜와 명철의 자리로 이끌어 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더불어 참된 사랑으로서 이끌어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
의 두 번째 속성을 보게 됩니다. 지혜는 참된 용기와 더불어서 사랑과 인내를 내포합니다. 급속히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에스더 왕비는 그 가운데서 왕과 하만을 잔치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사실 지금 잔치로 초대하여서 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정신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민족이 죽게 되었다고 왕 앞에서 통곡하고, 울부짖어도 모자랄 판입니다. 가슴은 어찌보면 피멍이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사랑과 인내하는 지혜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방식이 효과가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도 동일합니다. 국정의 스트레스가 많은 왕을 위해서 돕는 자로 서 있는 것이지요. 술과 방탕과 쾌락이 아닌, 참된 사랑의 즐거움으로 이끌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에스더를 향한 더 깊은 신뢰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3절과 6절을 보게 되면, 왕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6절에서는 “곧 허락하겠노라” “시행하겠노라”라는 말이 더해집니다. 그럼에도 왕후 에스더는 다시금 왕을 잔치로 초대합니다. 이미 확실해진 왕의 마음을 더욱 한층 단단하게 붙잡는 지혜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잔치의 자리에 하만을 초대한 것이 기이합니다. 왜 하만을 초대했을까요? 여기서 지혜가 더욱 빛납니다. 지혜는 원수라고 할지라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그와 맞섭니다. 그를 초대함으로 인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선대하였음을 더욱 증명하는 겁니다. 에스더가 하만을 초대하지 않고 그를 고발하는 것과 그를 이러한 잔치에 초대하고서 고발하는 것의 효과는 극명합니다. 유다 민족은 그를 적대하지 않았으나, 그는 돌이키지 않고 유다 민족을 멸족시키려 했음을 부각시키는 것이지요. 이러할 때에, 하만을 고발하면 그의 악함이 정죄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것이 또한 지혜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겁니다. 악을 무서워하거나 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방식으로 대응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선함으로 악과 맞설 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죽음을 향해 정면돌파하셨습니다.
로마서 12:21 (NKRV)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처럼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에스더가 참으로 아름답게 빛납니다. 잠언에서 현숙한 여인과 또 유사하지만 또 사뭇다르게 지혜의 여인으로서 빛납니다.
반면에 9절에서 악인들의 무리가 보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음모를 모의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더 높아진 영광에 취합니다. 교만은 이처럼 진짜 실상을 파악하지 않고, 표면적인 것에 깊이 만족하고 취합니다. 그렇기에 교만은 ‘술’과 같습니다. 자신의 높아짐이 더해질 때, 사실은 가장 위험할 수 있음에도 경각심을 갖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9절에서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긍휼을 조금도 베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교만과 분노로서 그를 해할 방법을 찾습니다. 악은 이처럼 사망을 향해 치닫되, 그 끝을 모르는 것과 같이 달려갑니다. 이들은 마침내 약 1년의 긴 시간을 기다릴 것도 없이 모르드개를 즉각적으로 죽일 계획을 준비합니다. 약 2미터 30cm의 장대를 세우고 거기에 모르드개를 매달기를 왕에게 구할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악은 음모를 꾸밉니다. 모르드개를 매달기를 왕에게 구한다 할지라도, 정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음모로 함정을 파듯, 진실은 교묘히 감추고, 거짓된 정보로 말미암아 그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인들은 모두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들은 자신의 치밀함과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착각입니다.
사실 이 장대에 모르드개를 처형할 것을 기대했지만, 거기에는 하만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반전입니다. 악은 자신들의 무기를 구체화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지만 사실상 자신들이 그곳에 매달릴 겁니다.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탄 또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죽이려 십자가를 준비했고, 실제로 거기에 주님을 못박았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의 승리를 자축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된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고, 또한 부활의 길을 여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까지 깨뜨렸습니다.
악은 하나님의 지혜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서, 지혜의 근원자 되시는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 자신을 내어드릴 때에, 마치 에스더의 고백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주님께서 내 삶을 사용하신다면 기쁘게 내어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서 지혜는 옵니다. 에스더와 같은 고백으로 주 앞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크게 역사하시는 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혜에 용기 있게 하실 것이며, 지혜에 사랑과 인내를 더하실 겁니다. 또한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시고 최종적인 승리를 선포할 지혜를 경험케 하실 겁니다.
때로는 지혜와 음모가 팽팽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끝은 반드시 하나님의 지혜가 승리할 것입니다. 악의 끝은 급격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악을 조금도 부러워 말고, 오늘의 선한 싸움을 기뻐하는 우리 모두되길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으며, 주시는 지혜로 담대히 살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