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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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야 11:1-9
제목: 크리스천 프로메테우스
주제: 인식의 불일치는 우리의 방향성의 초석이다.
목적: 인식의 불일치를 이겨내고 죽음을 소망으로 바꾸신 주님을 보고 나아가도록.
배경
제가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는 설교 결론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배경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의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지난 2주 동안 설명했습니다. 선지서는 가까운 시점과 먼 시점을 모두 복합적으로 예언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가까운 시기의 예언의 의미를 알아야 먼 시기인 예수님의 때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는 BC 732년 경에 앗수르가 아람을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을 합병하여 남유다를 포위한 상태까지 봤습니다.
BC 701년 경에 앗수르가 남유다를 포위합니다. 이때 앗수르의 왕은 산헤립이에요. 그리고 남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왕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남유다가 기적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오늘 말씀 11장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새의 후손이 왕이 되어 그 왕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고 원수였던 이방 족속들과도 화목하게 지내는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모두 이 예언이 이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하나님과 유다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났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1장의 예언을 알고 있는 유다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예언이 성취가 된 게 아니네?”, “예언이 거짓밀인가?”, “앗수르가 물러나고 평화가 온다고 했는데?”
그런데 히스기야가 죽고 그 뒤에 즉위한 므낫세라는 왕은 엄청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도저히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볼 수 가 없죠. 상황은 더 악화되어서 200여년이 지나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었어요.
평형깨기
상황이 더 심각해 진 거에요. 실패한 예언이잖아요. 그러면 거짓말이라는 거 잖아요?
그런데 신기한 게 있씁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200년이 지나 포로된 백성들은 이 말씀을 꼭 성취될 예언으로 어떻게 신뢰할 수 있었을까요?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고, 실패한 예언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그 이유는 남은 자들,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른 예언들은 모두 성취되었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포로들은 예언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낙심하고, 차라리 바벨론처럼 사는 게 훨씬 나아 보여서 바벨론의 신을 숭배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 즉 남은 자들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꿋꿋이 지켜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우리는 적어도, 아무리 믿음이 부족해도, 2천여년 전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은 압니다. 또 우리는 뭐라고 고백하냐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어때요? 세상의 포로로 살아가는 거에요. 히스기야처럼, 므낫세처럼 현실에 넘어지는 겁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면서요?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왜 달라요?” 포로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질 세상이 온다고 했는데 왜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거에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성경 말씀과 내 삶이 일치를 이루지 않는 것, 이걸 “인식론적 불일치”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복음을 믿으면 기쁘다고 하는데 기쁘지 않아요. 성령님이 거하시면 능력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안느껴져요. 예수님께서 속히 온다고 하셨는데, 안오신지 2천년이 넘었어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요. 성도가 성도답지 못해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매주 배우고 기도하는데도 왜 나는 더 나은 신앙적인 경험이 없는 것일까요? 시간이 갈수록 왜 더 신앙이 안좋아지는 것 같을까요? 이런게 인식론적 불일치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고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방향성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에요. 우리가 나아갈 절대적인 방향을 제공하시기 위함이에요. 인식론적 불일치는 삶의 방향성을 제공하는 초석과 같은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려드릴게요.
여러분이 본받고 싶은 완벽한 롤모델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나의 모습은 초라해 보여요. 이게 인식론적 불일치에요. 이 차이만 인식하면 나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 불일치 때문에 ‘롤모델’이 가능한 거에요. 그 롤모델을 본받아서 그 롤모델을 따라하면서 닮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이게 바로 방향성이고, 의미가 있는 삶이죠.
만약 여러분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뚝딱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노력하려고 애쓰지도 않아도 돼요. 여러분은 어떤 세상을 꿈꾸십니까? 게임만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면, 여러분은 게임을 하기 위해 노력이란 걸 안해도 됩니다. 그러면 의미가 필요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냥 게임하는 기계가 되어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상적인 세상을 뚝딱 이루시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게 방향성을 제공해주시기 위해서죠. 완벽한 영원한 모델이 있어야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잘못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죠.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있어야,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꿈꾸며,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는 거죠.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있어야, “이렇게 죄 많고 더러운 세상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는구나”라는 의미와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거에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요일 3:2).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연약하죠. 그런데 우리에게는 예수님이라는 롤모델이 있으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나아갈 수 있는 거에요. 그렇지 않고 당장 우리가 예수님처럼 뚝딱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얻는 은혜를 모르게 되는 것이죠. 어떤 은혜죠? “내가 이렇게 연약하고 죄가 많은데, 나를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 거룩한 형상으로 회복시키는구나”라는 은혜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인식론적 불일치가 지속되어야 하는 거에요.
세상을 보세요. 세상적 가치관은 적절한 모델이 없습니다. 누가 모델이냐면, 내가 모델이에요.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서 혼란스럽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것만 남았어요. 이제는 틀린 것도 ‘맞다’고 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이걸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죠.
이런 절대적 가치의 종말이 궁극적으로 언제 이루어졌는지 아세요? 물론 철학적으로는 니체가 있었던 19세기이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반향이 확실히 일어났던 때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식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소망이 완전히 무너진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객관적 지식, 절대적인 가치가 쓸모없다는 사상이 퍼집니다. 특히 독일이나 미국-영국 모두 기독교적 국가라는데 최대 7천만명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하는 걸 보니, 절대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기독교도 답이 아니라는 거에요.
제가 얼마 전에 오펜하이머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정말 명작입니다. 그는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이상적인 결과를 꿈꾸며 핵개발에 참여했어요. 그런데 정작 만들고 나니 그 핵무기가 인류의 종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죠. 그래서 그는 핵무기 반대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가 직면했던 두려움이 무엇이었냐면, 절대적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거에요. 핵무기를 만들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그 방향성이 상실되었어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어요.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믿었던 방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이상적인, 절대적인 모델이 필요한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고 절망과 우울과 허무함에 빠집니다.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인식론적 불일치에 속아서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편승합니다. 그들의 신을 숭배합니다. 왜? 인식론적 불일치, 즉 하나님은 힘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남은 자들, 소수의 성도들만이 이 절대적인 말씀을 끝까지 지킨 겁니다. 왜죠? 같은 이유에요. 인식론적 불일치 때문입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성취 예언이 필요한 것이에요. 앗수르와 바벨론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안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굳게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극복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묘사하는 그 이상적인 나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임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6절부터 자연계를 묘사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이리, 표범, 사자, 곰, 독사, 이런 강한 동물들, 맹수들은 무엇을 상징하냐면, 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앗수르 또는 바벨론이겠죠. 그러니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앗수르 또는 바벨론과 이스라엘과 화목하게 서로 부대끼며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게 자연적인 질서가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납득이 될까요? 그렇지 않죠. 저들은 원수들이고, 언약 밖의 백성이고,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인데.
그런데 로마서 4:5절에서는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앗수르든 바벨론이든, 예수님은 그런 자들 또한 ‘의롭다’고 하십니다. 납득이 되세요? 이건 원수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 중 남은 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다는 거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요나가 앗수르의 도시 니느웨에서 말씀 선포를 했더니 니느웨가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초대교회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죠.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로마도 국교를 기독교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로마교회가 타락하자 남은 자들이 열방으로 나아가서 종교개혁을 하고 세계선교를 했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왔어요. 우리나라 보세요. 쇄국정책 펼치며 외세는 모두 대적했던 나라가, 이제는 교회를 통해서 열방에 선교사를 보내며 화목하게 지내는 국가가 되었어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경험되는 겁니다. 이게 다 핍박과 억압 속에서 이뤄졌던 인식론적 불일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우리의 삶을 보세요. 세상은 교회를 대적합니다. 그러니 교회도 세상에 대적해야 할까요? 물론 대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그들을 사랑하고 끌어 안아야 해요. 우리가 믿는 그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사명이고, 이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기능이에요.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통치자, 권세자 등등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탄의 권세를 뜻해요. 우리가 싸우는 방법은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을 끌어안아주는 거에요.
끌어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 나라의 모델, 이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여러분이 스스로 지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식이 여러분의 재능과 직업, 달란트, 삶을 통해서 발휘될 때, 오늘 본문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저와 여러분은 살든지, 죽든지, 고난을 겪든지, 성공을 경험하든지,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죠. 본문 9절 읽어봅시다.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지식으로만 살지 않아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얻는 세상 지식은 모두 핵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결과만 낳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를 다녀야 하는 이유에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지식을 통해 이사야 11장의 나라를 이루고 싶다면,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시험기간이든 방학이든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이 절대적 가치를 따르는 것부터 세상에 이미 강하게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 작은 행동이 이미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을 용서하는, 세상보다 큰 사람으로 여러분이 성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 제목이 크리스천 프로메테우스이죠. 이건 오펜하이머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죠.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어 인간이 문명을 발전할 수 있게 하죠. 이 때문에 제우스가 분노하여 프로메테우스에게 영원한 벌을 주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핵무기’라는 불을 주었습니다. 이를 대가로 본인은 벌을 받았습니다. 스파이로 낙인 찍혀서 정치적인 벌을 받고, 심리적인 벌을 받게 되죠.
크리스천 프로메테우스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소망을 불로 주셨습니다. 이 소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비극적인 결말들과 다르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이라는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인식론적 불일치의 상태이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을 보고 달려갈 수 있는 거에요.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있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여러분의 삶과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지식이라는 겁니다. 이 지식만이 인식론적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소수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망하며, 지식을 절대적으로 지키며 세상보다 큰 용사가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