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세상에서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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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세상에서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서론]
부조리,,,우리 삶의 차가운 현실을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그 뜻을 찾아보니 이치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말 그대로 조리에 맞지 않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철학에서는 이 단어를 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할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영화 밀양에서 신애라는 주인공은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습니다.
그녀는 신앙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간 자리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괴범의 얼굴이 너무 평안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피해자인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벌써 유괴범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인 자신은 이토록 괴로운데, 가해자인 유괴범은 너무 평안한 그 모습을 보며 신애는 절망합니다.
도저히 이런 하나님을 믿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예전에 수백채 빌라 전세사기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많은 가정들이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빚을 낸 사람도 많고, 전재산을 넣은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몇몇 가장들은 목숨을 스스로 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기친 사람은 수사가 시작되자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사과도 하지 않았고, 감옥에 가지도 않았고, 돈을 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런 일은 신앙이 있다고 일어나지 않는게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신앙이 있다고 재앙이나 재난이 우리를 피해갑니까?
신앙이 있다고 사기를 피할수 있습니까?
어느 것 하나 신앙이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도대체 신앙을 갖는다는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본론]
욥기에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세번의 사이클 형태로 등장합니다.
친구가 충고하면 욥이 이를 반박하고 또다른 친구가 욥에게 재반박하고, 그것을 또 욥이 재반박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욥이 번갈아가며 세번의 논쟁을 갖습니다.
그중 15-21장이 두번째 논쟁 사이클 지점입니다.
오늘 본문인 21장에 나온 욥의 답변으로 두번째 논쟁 사이클이 끝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이 했던 주장들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원리대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성공할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조상들의 지혜와 경험들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욥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분명 자신도 모르는 죄를 지은 것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꾸 자신의 죄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내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것이 숨겨둔 죄때문이든 하나님에 대한 무지때문이든 아무튼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게 확실합니다.
이게 바로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이에 대한 욥의 반응입니다.
2-3절입니다.
너희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아라.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 내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어라. 조롱하려면 내 말이 다 끝난 다음에나 해라.
욥이 친구들에게 원하는 진정한 위로는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자꾸 자신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면서 우리도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가르치는 직업 특히 선생님이나 목회자같은 사람들이 자주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위로와 격려를 원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가르치고 책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이런 일때문에 많이 싸웁니다.
최고의 위로와 격려는 경청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러나 욥의 궁극적인 분노는 친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자신의 고통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4절입니다.
내가 겨우 썩어질 육신을 두고 논쟁이나 하겠느냐? 내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데에는, 그럴 이유가 있다.
욥은 친구들과 싸우며 논쟁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욥이 현재 논쟁하고 싶은 사람은 친구들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그럴만한 이유’란 뒤를 읽어보면 결국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욥이 괴로워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도 원래 친구들의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신앙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인이 받아야할 벌을 무죄한 자신이 받고 있으니 이게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조리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아니기에 너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제 친구들이 주장하는 지혜가 틀릴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목에 핏줄을 세우며 충고한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신앙이 적용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의 현실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7-13절입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그들의 수소는 틀림없이 새끼를 배게 하며, 암소는 새끼를 밸 때마다 잘도 낳는다. 어린 자식들은 바깥에다가 풀어 놓으면, 양 떼처럼 뛰논다. 소구와 거문고에 맞춰서 목청을 돋우며, 피리 소리에 어울려서 흥겨워하는구나.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하게 스올로 내려간다.
그 당시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지던 것이 장수하는 것과 자손을 많이 낳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람들만 그 복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욥이 보기에 이 세상에는 권선징악의 공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오히려 장수하고 그 자손들이 번성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 재앙이 없이 일생동안 평안을 누리는 것도 복입니다.
재산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복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들은 선한 사람들만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악인들의 가정에 재앙이 없고 평안합니다.
자녀들은 악기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면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심지어 짐승들도 새끼를 잘도 낳아 재산은 갈수록 불어나기만 합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따르면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됩니다.
악인들은 갑자기 재앙으로 벼락맞아 죽어야 하고, 그 후손은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합니다.
그 후손들은 결국 대가 끊어지거나 가진 것을 다 잃고 거지가 되어 구걸하러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욥이 보기에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뿐입니까?
악인들은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때도 고통없이 평안히 죽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친구들에 따르면 악인들은 비명횡사를 해든지, 오랜 고통가운데 비참하게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면 이러면 안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욥의 고통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렇게 부조리하니 악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요?
14-16절입니다.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자기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무엇이냐고 한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이기에 그를 섬기며, 그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용납할수 없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생이 행복하고 너무 잘 나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성공은 오직 자신들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왜 심판하지 않으실까요?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은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부모님 재산 물려받아 다이아몬드 수저네, 금 수저네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난뿐만 아니라 병까지 대물림받아 살아가는듯 합니다.
어느날 텔레비전을 보니까 가족 모두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구요.
이런 모습들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까닭없이 이뤄지는 이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들입니다.
무슨 이유를 댈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을 가져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악인들이 결국 지옥가서 고통받고 잘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 평안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욥이 원하는 것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어도 이 땅에서 내 삶에 보장된 도움이 없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욥의 반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7-18절입니다.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욥은 앞서 친구들이 말한 악인의 운명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번영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앙이나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람의 날리는 검불, 폭풍에 날리는 겨는 모두 곧 사라져버릴 악인의 운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그렇게 잘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악한 자들이 실패하거나 재앙을 겪거나 응분의 벌을 받는 일이 몇 번이나 있던가?
불운을 겪는 경우는 또 몇번이나 있던가? 그리 많지 않네.
분명 악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악인들이 마땅한 벌을 받는게 얼마나 되냐는 것입니다.
힘있고, 돈있고, 빽있으면 비싼 변호사써서 법의 심판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욥의 친구들은 설령 아버지의 죄값을 치루지 않더라도 아들대에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욥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19-21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 하고 말하지만, 그런 말 말아라! 죄 지은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제 죄를 깨닫는다. 죄인은 제 스스로 망하는 꼴을 제 눈으로 보아야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 무너진 삶을 다 살고 죽을 때가 된 사람이라면, 제 집에 관해서 무슨 관심이 더 있겠느냐?
욥은 아들대에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사람은 평안히 죽었으니 자기 아들이 죄값을 치루던 말든 알게 뭐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욥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때 자신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23-26절에서도 욥의 반론은 계속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기력이 정정하다. 죽을 때에도 행복하게, 편안하게 죽는다. 평소에 그의 몸은 어느 한 곳도 영양이 부족하지 않으며, 뼈마다마다 생기가 넘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다 함께 티끌 속에 눕고 말며, 하나같이 구더기로 덮이는 신세가 된다.
무슨 말입니까?
의인으로 살든 악인으로 살든 죽으면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 살펴보시면 욥은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살다 평안히 죽고, 어떤 사람은 평생 고생하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은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교통사고나 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이 악인이라서 죽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징계가 될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27-34절입니다.
너희의 생각을 내가 다 잘 알고 있다. 너희의 속셈은 나를 해하려는 것이다. 너희의 말이 “세도 부리던 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악한 자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느냐?”한다. 너희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 본 일이 없느냐? 너희는 그 여행자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한다. 그 악한 자를 꾸짖는 사람도 없고, 그가 저지른 대로 징벌하는 이도 없다고 한다. 그가 죽어 무덤으로 갈 때에는, 그 화려하게 가꾼 무덤으로 갈 때에는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골짜기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빈말로만 나를 위로하려 하느냐? 너희가 하는 말은 온통 거짓말뿐이다.
친구들에게 더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여기 저기 다 돌아다녀본 사람에게 물어보면 악인들이 번성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친구들이 주장은 우물안 개구리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욥의 말에 틀린 말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마치 하나님은 믿는 우리들을 도와주시지 않는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을 가져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22절을 빼놓고 설명했는데요.
욥이 인정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있는 자들까지 심판하는 분이신데, 그에게 사람이 감히 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하늘의 천사까지도 심판하시는 그런 분인데 어떻게 감히 사람이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옳다고 믿는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강요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욥의 말입니다.
이 땅에 권선징악이 예외없이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겠습니까?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악인들이 생겨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우리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우리는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해할수 없기 때문에 믿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믿음이 필요없습니다.
믿음은 이해할수 없어도 그 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왜 신앙을 갖습니까?
정말 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하박국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하박국 예언자처럼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기뻐할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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