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입니다①(골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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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입니다①(골 4:7-11)
<서론>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7-18에 무려 열 명의 동역자들 이름을 열거합니다.
더구나 이들의 이름을 아름다운 수식어를 곁들여, 일일이 거명하는 것은 자신의 복음사역이 동역자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을 『우리는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입니다』라고 길게 쓴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7–11절을 지배하는 한 단어는함께”입니다.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을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7절에서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에서 ‘함께’가 나옵니다.
9절에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에서 ‘함께’가 또 나옵니다.
10절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에서 ‘함께’가 또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에서 또 ‘함께’가 나옵니다.
교회는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어느 훌륭한 리더 1인을 따라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함께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의 공동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는 유기적인 한 몸이기 때문에, 각 지체들이 다함께 자신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함께 섬기는 동역자들의 도움이 없이 교회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오직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를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우리는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입니다!
본문 골로새서 4:7-11은 사도바울의 소중한 『동역자 5인을 소개합니다. 이 시간 이들이 함께하는 동역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교회 열방교회를 섬겨야할지 은혜 나누겠습니다.
<본론>
1. 우리는 사랑스러운 형제요 신실한 일꾼으로, 주를 함께 섬기는 성도입니다(7, 8절).
먼저, 우리는 교회의 동역자로서 사랑스러운 형제요 신실한 일꾼으로, 주를 함께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소개되는 사도바울의 첫 번째 동역자는, 사도바울의 모든 형편을 골로새교회에 전해 준 사랑스러운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함께 종이 된 두기고(7절)입니다.
두기고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직접 골로새교회에 전해 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4에 따르면 두기고는 소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사도바울의 전령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의 섬 그레데에서 사역하던 디도에게 편지를 보낼 때도 두기고를 통해 보냈고(딛 3:12), 골로새서, 에베소서(엡 6:21)도 두기고 편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두기고는 에베소서 6:21-22에서도 골로새서 4:7-8과 비슷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두기고는 바울의 마음과 상황을 가장 잘 전달(8a)하였으며, 성도들의 형편을 이해하고, 저들을 적절하게 위로하는 일을 잘하였습니다(8b).
그래서 바울은 두기고 손에 자신이 쓴 편지를 들려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며, 두기고에게 이런 별 별명을 붙입니다. ‘사랑스러운 형제, 신실한 일꾼, 그리고 주 안에서 함께 종 된 자’(7a).
두기고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자’로, ‘신실한 일꾼’으로 인정받은 것은, 바울의 사정성도들의 사정바로 알고 바로 나눌 수 있는주안에서 함께 종 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정해진 시간에 교회 출석하여, 예배하고, 선한 결심을 하고, 삶의 자리로 흩어지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고 소통하여, 서로의 사정을 알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아픔도 함께하는 일이 있어야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픈 이야기를 교회 지체들과 나눌 수 있어야합니다. 내 허물이 드러나니까, 창피하니까, 믿고 말했는데 가쉽나 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온전한 교회 공동체가 아닙니다.
기도로 아픈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서로 믿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한 몸, 한 지체가 되어, 세상 어느 공동체와도 비교될 수 없는 신뢰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의지할 수 있는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 교회 성도들로부터 어떤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습니까?
아니 어떤 사람으로 불려지기를 원합니까?
정말 나를 대신해 누군가를 다른 곳에 보내야 할 때, 그 사람이야말로 나의 마음과 형편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전달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다른 누군가의 그런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교회의 필요와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필요들을 잘 알아서, 채워줄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사랑스러운 자’ ‘신실한 일꾼’ ‘주안에서 함께 종 된 자’로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신실하고 사랑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9절).
두 번째,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로서, 신실하고 사랑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9절에서 소개되는 이 오네시모는 골로새 지역 출신의 노예였습니다. 그것도 주인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그런 노예였습니다(몬 1:18).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노예가 도망가는 것을 아주 중한 죄로 다루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망간 종을 집에 숨기거나 재워 주기만 해도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동안 오네시모를 만나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그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 1:10)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 믿기 전의 오네시모를 두고, 주인 빌레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였다고까지 적었습니다(몬 1:11a).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주인인 빌레몬에게도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몬 1:11b).
빌레몬서 1:12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내 심복’ 곧 ‘내 심장’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심복’이라는 말로 사용된 헬라어 ‘스플랑크논’‘장과 콩팥’ 등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배(요 7:38)”를 『전인격의 근원』으로 보신 것처럼, 고대 헬라인들은 이 ‘장과 콩팥’을 『마음의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도망친 노예, 민폐만 끼치던 노예, 가치 없던 노예에 불과했던 오네시모가, 이제 바울 자기 마음과도 같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오네시모는 복음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바울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므로, 언제나 곁에 두어야 할 존재라고까지 말했습니다(몬 1:13).
그래서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스런 한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했습니다(몬 1:16).
이런 오네시모를 오늘 본문 9절은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9a).
도망친 무익한 노예 오네시모를 놀랍게도 ‘믿을 만하고 사랑스러운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 누구라도 오네시모처럼 고의적인 잘못이나,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치며, 영적으로도 크게 어긋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함께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크게 부담을 주거나, 본의가 아니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이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아니, 사실 그런 사람이 예전의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동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동역자로 세워지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고, 우리 인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 앞에서 큰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믿음직한 동역자로 설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의 모습이 어떠했던지 불문하고, 우리도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의 부족했던 우리의 모습을 훌훌 털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서로에게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동역자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어제 우리의 연약과 부족은 지나간 것입니다. 오늘부터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어 주님 교회의 아름다운 동역자 함께 세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10, 11절).
세 번째, 우리는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로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0, 11절은 아리스다고, 마가, 유수도라 하는 예수를 소개합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례파(11a)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 중에 자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사역하는 자들이며,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들(11b)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언급된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 19:29에 등장합니다. 그는 마게도냐 지역의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에게 잡혀 연극장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바울과 동행했고(행 20:4), 바울이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항해할 때도 함께 했습니다(행 27:2).
본문 10절에 따르면, 바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죄수의 몸(10절)이 되어 바울 곁에서 동고동락하며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다음으로 소개되는 할례파 인물은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바울을 발탁해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바나바의 생질(사촌, 친척)이었습니다(10).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를 데려고 1차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도중(밤빌리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 집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행 13:13).
바나바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할 때, 마가 때문에 심각하게 다툽니다. 바울은 마가를 전도여행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바나바는 그래도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합의를 보지 못하고, 팀을 나눠서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배를 타고 구브로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육로응 통해 소아시아 지역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행15:36-41).
이처럼 한 때는 바울은 마가 요한이 범한 실수로 인해 그를 아주 엄격하게 대했지만, 이제 마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그를 환영하며 맞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10b).
왜냐하면 이전에는 복음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큰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소개되는 할례파 동역자의 세 번째 인물은 『유스도라 하는 예수』입니다. 「유스도」는 「예수」를 라틴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마리아라는 이름과 함께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우리에게 철수나 영희라는 이름처럼 흔한 남자의 이름이었습니다.
유대인 출신인 그도 사도바울이 갇힌 감옥에 함께 갇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사역하는 동지 가 되었습니다.
세 동역자들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1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열방교회 안에, 여러분이 있기에, 서로에게 큰 위로를 주고 얻는 성도입니까?
한 때의 갈등과 실수를 뒤로 하고, 이제는 복음과 교회에 너무나 유익한 존재로 서 있습니까?
힘들어도, 함께 하기에,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서로 크게 위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감옥에까지도 함께 했던 세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함께 동역하며 서로 위로를 안겨주는 아름다운 믿음의 동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image 레드우드 01>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국립공원은 Sequoia계통의 나무인 ‘레드우드’(미국 삼나무) 자체가 공원인 곳입니다.
이 레드우드는 키가 무려 116m까지 자라기도 하고, 직경이 7.9m, 둘레 25m)나 되고, 어떤 나무들은 수명이 1200-1800년, 심지어 2000년 정도 되는 나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수량도 많지 않은 지역에서, 해안의 거친 바람을 견뎌내며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덩치도 큰 이 나무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을까요?
<image 레드우드 02>그것은 나무들의 그 뿌리가 서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분과 영양분을 함께 공급받고, 거친 바람에도 뿌리가 쉽게 뽑히지 않고, 견고하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뿌리가 서로 얽혀있지 않다면, 레드우드의 어마어마한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도맡아 하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고, 기독교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목회자요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 자신의 드라마와도 같은 신앙 체험, 젊어서부터 갈고 닦은 실력, 성실하고 치밀한 삶의 태도가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그 모든 요소가 제대로 활용되고 효과를 보게 한 것은, 「함께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으로, 서로 뿌리가 얽혀 있던 동역자들이 함께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함께 섬기는 동역자입니다. 사랑스러운 형제요 신실한 일꾼으로 주를 함께 섬기는 성도, 신실하고 사랑 받는 성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진정한 소망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이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드러내는 열방교회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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