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로 말미암은 회복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 views
Notes
Transcript
[예배의 자리 맨 앞자리로 당깁니다]
왜 임재가 필요합니까. 임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계신다는 겁니다. 임재라는 주제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망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서도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일상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번 주를 포함해서 3주간 <임재>라는 주제를 가지고서 나아갈 방향을 잡고자 합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임재하심이 우리에게 소망임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에서는 에스겔이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인데, 사무엘과 같이 시대를 예견한 대선지자였습니다. 사실 그의 활동 무대는 어디냐면, 바벨론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아닌 곳 왜 바벨론에서 활동했느냐. 그것은 그가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고국 남유다 왕국은 거듭되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차례 차례 국력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성이 정복된 것이 아니라, 성벽이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도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에스겔은 왕국이 무너지는 중간기였던 2차 시기에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남유다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견대로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왜 본문의 시대를 주목하는 겁니까. 우리는 왜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한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 또한 오늘날 전도가 안되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더욱 힘들다고 말합니다. 또 여러분들도 스스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스스로 무언가가 힘들다고 말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나 또한 때때로 한계를 느낍니다. 우리 모두 분명히 돌파구가 필요하고, 반드시 회복이 필요한데, 우리 안에서 방법을 찾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소망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겠습니까.
에스겔 37장에서는 남유다의 완전한 멸망 이후에 다시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다. 이 회복은 단순히 에스겔이 주도하는 회복이 아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체가 되시는 회복을 이야기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과연 기대할 수 있는 바일까.
사실 에스겔의 이러한 사역은 곧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부흥의 역사와 맥을 잇습니다. 이러한 부흥은 항상 막다른 벽과 같은 상황 속에서 일으키십니다. 미대륙의 부흥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추수감사절의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토록 신앙의 자유, 정말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서 살아가기 원했던 신앙의 1세대들이었지만, 약 100년이 지나서 영적 침체가 오게 됩니다. 이 시기에 다시금 하나님의 부흥이 경험되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경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사람인데, 그를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늘 깊이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감격함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중심되어서 주변에 회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이 부흥은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주변 사회와 지역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부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삶과 예배의 자리를 새롭게 감화시키시는 겁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이들의 삶은 표현하자면 메마른 뼈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다운 삶이 없었습니다. 삶의 주체성들을 모두 상실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강력한 제국의 지배 아래서 조금도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뼈 몇 개의 황폐한 삶이 아니라, 모든 뼈들의 황폐해짐과 같습니다. 모든 뼈들이 메말라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민족들이 이 상황을 공감하겠습니까. 주변의 민족들은 오히려 이들을 조롱하고, 오히려 바벨론으로 끌고 가도록 협조하고, 자신들의 고국 땅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소망이라는 공기를 숨쉬게 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능력이 이들 가운데 필요한 것이지요. 무엇이 이들을 새롭게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만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지나치게 메말라 있습니까. 노력하는데도 어그러져 있습니까.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알수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37장에서 무슨 말을 주고 있습니까. 영적인 사람을 세우십니다. 에스겔과 같은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언하게 하십니다. 강권적인 하나님의 손이 그를 다스리고 함께 하십니다. 이 영적인 사람은 꼭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누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열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깊이 사모하는 사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깊이 사모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영적인 은혜가 임합니다.
이 가운데서 2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뼈들이 아주 말랐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오히려 우리의 소망이 철저히 부서졌을 때 임합니다. 아주 마른 상황 가운데 옵니다. 모든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은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소망이 안 보이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부르짖고, 찾으십시오. 그 분 안에서 소망을 찾아야지 어디서 우리가 소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길에 나서서 사람들을 붙잡는다고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애원한다고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겠습니까. 꿈깨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매달리고, 그 분 앞에 기도할 때에 그 분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3절을 주목하십시오. 먼저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에게 묻습니다. 황무한 상황을 보이시면서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여러분들이 만약 에스겔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과학적인 사고가 발달한 친구들은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기에 불가하다고 말할 겁니다. 그껏해야 박물관 정도나 될거라고 말이죠. 저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같이 말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에 의해서 학살되었고,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도저히 뼈를 맞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 곳에 쌓아둡니다. 정말 갖은 노력을 한다하더라도 겨우 몇몇의 짝을 맞출 뿐이겠지요. 이것이 과학적인 식견의 대답입니다.
한편 이에 대해서 예술가와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있으시니 가능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가운데 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만 완전히 깡그리 메마른 뼈들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에스겔의 이 고백 속에는 과학적인 사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가와 선지자적인 사고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도저히 알 수 없다면, 에스겔처럼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회복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4절을 또한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또 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4절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7절은 에스겔의 순종입니다. 4절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대언하여’라는 단어입니다. 이 대언이라는 단어는 사실 예언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지만, 반드시 미래에 이와 같이 일하신다는 약속이자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사실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마른 뼈들에 귀가 있겠습니까. 우리 또한 동일하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도무지 귀가 있어야 말할 것 아닙니까. 제가 말한다고 한들 이것이 저들에게 들리겠습니까. 이 예언의 말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그런 너의 인식을 버려야 한다는거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듣거나 말거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일이기에 예언하라는 겁니다. 저 메말라 산산히 흩어져있는 뼈들을 향해서 예언하라는 겁니다.
그 예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갈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생기를 담아내도록 물리적으로 너희들을 먼저 회복하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을 보면 뼈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며 가죽으로 덮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이를 따라 7절에 대언했더니, 7절에 그 수 없이 쌓여 있고, 뼈들의 골짜기 같던 곳이 자기 짝을 찾아서 뼈가 맞물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실 다시 재창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물리력으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뼈가 연결되는 뼈에 힘줄이 생기고, 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뼈 그 자체로는 생기를 머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에는 이러한 어떠한 변화들이 감지될 겁니다. 갑작스레 하나님을 깊이 사모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부흥의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올해 초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애즈버리 대학교에서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특별한 임재의 예배가 진행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떠나시면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시면 더 남아있어서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들 가운데서 먼저 자기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 기도 모임 속에서 점차 사람들이 더해집니다. 그리고 밤새 기도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곧 이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예배는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17일간 지속되고 멈추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배가 이어졌습니다.
이 부흥의 조짐들이 계속해서 여러 캠퍼스로 또 사회 각처로 이어질 겁니다. 오늘날 MZ 세대들 속에서 이러한 부흥이 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이 부흥은 우리의 후세대들을 통해서 다시 평가받을 겁니다. 지금은 이 시기를 쉽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합니다. 그 자리 가운데 정말 진정어린 기도를 드리기를 간구하십시오. 정말 하나님 앞에 전인격적으로 내어드리십시오. “주여 내 존재가 변할 수 있을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주인되시는 주님, 당신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우리 또한 이와 같이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드리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도 제가 접한 정보에 의하면, 유튜브의 한 목사님의 이야기라 책으로 확인된 바는 아닙니다. 그는 7년 동안 무려 16시간 동안 말씀과 기도에 자신을 내어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는 목회자이니 이러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결코 고된 활동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그 자신을 내어드린 겁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누리기 원한다면, 이 생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중생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들어 가시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금 이들의 육체가 온전해졌을 때, 또 다시 무슨 명령이 주어집니까. 다시 9절에서 추가적인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에스겔이 순종하지요. 부흥의 조짐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시는 역사를 경험해야합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땅 끝까지 복음의 전파되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각 개인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주장하시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복음과 믿음 안에서 미래의 완성을 오늘 맛보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에스겔이 다시금 대언합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이 가운데서 이들이 살아납니다. 큰 군대라고 말합니다.
11절 이하에서는 지금 벌어진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무너졌던 뼈들 우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어떻게 이야기 했다는 겁니까. 우리는 말랐고, 우리는 아주 말랐고, 우리는 소망이 없어졌고,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를 되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들을 군대로 소생시켰다는 겁니다.
12절에서는 더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덤을 열어 나오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생케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늘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 정확하게는 우리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늘 거부합니다. 우리의 지혜를 주장하고, 우리의 힘을 주장합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이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께 사망한 자와 같이 더 이상 내게 소망이 없고, 오직 주님께서 나의 운명을 아시고, 나를 회복시키실 모든 능력과 권한이 있음을 인정할 때에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오해함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이 사역의 결정적인 성취, 세계 2차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던 D-day와 같은 승리의 날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늘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을 애통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사망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철저하게 사망을 정복하는 것에 목표가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비통하게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목적에 목적이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예표하던 나사로의 부활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마주하면서, 비통히 여기셨다. 이렇게 말합니다. 11장 38절에서 비통하다는 표현은 오히려 꾸짖다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화가 나셔서 달려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역은 사망에 대한 분노와 사망 안에 있던 나사로를 살리시면서도 이와 같은 심정들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
이 시간 우리가 함께 찬양하기 원합니다. 다른 찬양이 아니라, 다시 한번 이 소망을 붙잡고, 하나님 역사해달라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있기에 우리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소원을 아룁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 앞에 순복함으로 살기 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