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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월한 대제사장(4:14–9:14)
모세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대제사장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대비했다. 그러나 아론의 제사장직은 다수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저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더 우월한 종류라는 것을 보여 준다. 도전적인 막간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는 결과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스도는 어떤 계열의 제사장직에 소속되어 있느냐는 질문이 저자로 하여금 멜기세덱의 더 우월한 계열에 대해 논의하게 한다. 옛 언약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제시된 새 언약의 주제가 이러한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4:14–16)
〈14〉 비록 대제사장 주제가 저자의 생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왔지만(참조, 1:3; 2:17; 3:1), 저자는 이제야 그것을 충분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절을 시작하는 “그러므로”(운, oun)라는 접속사는 2:17–18과 직결되는 것 같다. 그 중간에 있는 단락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주제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기조를 결정하는 막간(interlude)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에 대한 세 가지 진술이 나온다.
첫째, 그는 위대하다. 이것은 그가 다른 열등한 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한 제사장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주로 다음 단락에서 다루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직보다 더 뛰어난 그의 우월성에 대해 숙고한다. 이 위대함은 단지 그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에도 미친다.
둘째, 그는 “하늘들”을 통과했다. “하늘들”이라는 복수가 사용되기 때문에 혹자는 일련의 점층적인 하늘들이라는 유대 개념이 여기서 고려되고 있다는 제안을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2에서 “세 번째 하늘”로 이끌려 갔다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일곱 하늘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하늘을 가리키는 데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었기 때문에 “연속적인 하늘들”이라는 유대 개념이 고려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이 개념은 일반적인 것이고,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이 휘장 안으로 들어갈 때 가지고 있었던 제약과 대조하려는 의도를 저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바로 하나님의 현존에까지 뚫고 들어간다. 이 말은 어떤 장애물도 그의 통행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암시를 준다. 이 진술을 이제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의 사역 덕분에) “성소”에 들어갈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는 10:19의 진술과 비교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제사장의 접근을 공유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전자의 이름은 이미 2:9과 3:1에서 등장했다. 거기서 이 이름은 그가 대제사장 직무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를 그의 인간적인 본성과 결부시켰다. 이 이름은 다시 6:20, 7:22, 10:19, 12:24, 13:12에서 대제사장 주제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다른 칭호들 없이 단독으로 나오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라는 단독 칭호만큼이나 빈번하게 나타난다(각각 9번씩).
그러나 저자가 다양한 이름들을 아무 구별 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바로 역사적 예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 저자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미 분명하게 해 놓은 것, 즉 이 예수님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반복한다.
비록 예수님의 친자권이 히브리서의 앞부분에서 전제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칭호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이 칭호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우월해야 하는 대제사장의 완전한 자격 조건으로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결합하기 위하여 틀림없이 의도적으로 도입된다. 그리고 이 칭호는 다시 6:6, 7:3, 10:29에서 사용되고, 첫 번째와 세 번째 언급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배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멸적인 취급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위대한 대제사장을 소개한 이후, 즉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는 권면이 첨부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동사 크라토멘(kratōmen)은 “~에 매달리다”를 의미한다. 마치 이 동사는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 개념은 (다른 동사 카테코멘[katechōmen]과 함께) 10:23에서 믿는 도리라는 동일한 목적어와 관련하여 다시 나타난다. 후자의 단어는 이미 3:1에서 나왔고, 히브리서의 주요 개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단락과 10:19–23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4:14–16은 대제사장 주제의 프롤로그로 간주되고, 10:19–23은 에필로그로 간주될 수 있다. 두 단락 모두에서 믿는 도리를 붙드는 것, 위대한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자신감”(파레시아, parrēsia)을 갖는 것 등의 사고들이 나타난다.
이 평행들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두드러진다. 이것들은 히브리서의 구조상 저자의 목적을 반영한다. 대제사장 주제를 상술하는 그의 관심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즉 독자들에게 가까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15〉 비록 유혹받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대제사장의 능력이 이미 언급되었긴 하지만(2:18), 동일한 사고가 이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저자는 왜 긍정적인 형태에서 부정적인 형태로 바꾸는가? 그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의 필요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대 의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둘러 이 두려움을 제거하려고 한다. 접속사 “왜냐하면”(가르, gar)이 보여 주듯이, 지금 이 진술은 왜 굳게 붙잡아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이유로 제공된다. 우리의 자신감은 우리의 대제사장의 능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사 “쉰파테오”(synpatheō, 문자적으로는 “~와 함께 고난을 받다”)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히브리서에서만(여기와 10:34) 사용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백성을 동정하는 것을 가리키고, 10:34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의 동정(sympathy) 역량은 그리스도의 동정 능력에 의지한다. 지금 경우에 동정의 대상은 우리의 연약함이다.
이 “연약함”(아스테네이아, astheneia)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서의 다른 곳에서 아론 계열 제사장직의 약함과 관련하여 나타나고(5:2; 7:28), 이런 약함이 없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은 그러한 필요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강한 존재로서) 동정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연약함이라는 단어는 어떤 형태의 필요도 다 포함할 정도로 충분히 포괄적이다. 동정은 자족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곤궁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유혹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이제 그가 받은 유혹이 특별히 언급된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존재이다. 이것은 2:18의 진술을 더 상세하게 전개한 것이다. 거기서는 예수님이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유혹을 받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증으로 제공되었다.
여기에서는 예리한 문제를 야기하는 두 가지 주장이 더 있다. 바로 그의 유혹은 우리의 것과 같다는 것(우리와 똑같이)과 유혹은 모든 곳에 미친다는 것(모든 일에)이다. 첫 번째 진술은 그의 유혹이라기보다는 그의 본성이 우리의 것과 같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두 번째 진술의 함의를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일”(카타 판타, kata panta)은 유혹에 관한 한, 예수님을 우리와 똑같은 범주에 놓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측면을 전달해 준다. 우리는 그의 경험이 우리의 것과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에서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죄는 없으시니라는 구에서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유혹을 받고 죄를 짓고, 그는 유혹은 받지만 죄는 짓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유혹이 우리의 것과 똑같은 것일 수 있는가? 만약 그가 (우리는 가지고 있는) 죄를 짓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이 사실로 인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유리한 위치는 그의 유혹과 우리의 것을 즉시로 구분하지 않는가?
이 난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유혹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개념은 오히려 시험이나 유혹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분명히 이 노출은 죄를 짓지 않고서도 가능하다. 예수님은 죄의 성향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유혹 노출은 사람의 유혹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다는 주장에도 확실히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시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것과 비슷했다. 예수님의 경험은 기록되어 있는 세 가지 광야 유혹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사역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다른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스트레스와 긴장을 겪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경우에는 더 큰 것이 더 작은 것을 포함한다. 완전하고 신적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성향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견디어 낸 것과 비교하면, 내 유혹은 무엇인가? 그의 무죄는 그의 백성에게 모범으로보다는 오히려 자극으로 제시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인간 생활의 시련에서 아주 많은 경험을 하셨다.
〈16〉 또 하나의 권면이 뒤따르는데, 이 권면은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10:22f에서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서 저자의 생각을 특별히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은 “담대함”(파레시아, parrēsia), 즉 표현의 자유와 두려움에서의 구출이라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심지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사람의 경외심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의 사용으로 놀라운 담대함을 드러내 주는 주기도문에서 완전하게 반영된다.
둘째, 은혜의 보좌이다. 보좌는 왕권을 상징한다. 만약 그것의 주요한 특징이 은혜가 아니라면, 즉 그곳이 하나님의 풍부한 호의가 분배되는 장소가 아니라면, 그것은 확실히 위압적일 수 있을 것이다. 8:1과 12:2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보좌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이 보좌가 은혜의 장소임을 보증하는 보증인이다.
셋째, 보좌에서 분배되는 특별한 호의인 긍휼하심과 은혜의 결합이다. 이미 우리의 대제사장은 자비롭다고 묘사되었다(참조, 2:17). 이것은 신약성경의 두드러진 주제이며, 바울서신에서 특히 전형적이다.
넷째,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이다. 은혜의 제공에는 제한이 없다. 유일한 조건은 그것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마음, 즉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2) 아론과의 비교(5:1–10)
〈1〉 5장의 첫 네 절은 역사적이고, 아론 계열에 대해 언급한다. 만약 히브리서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야기한다면, 이 진술은 (이 계열을 상기시킴으로써) 더 우월한 계열을 도입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아론 계열과 비교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사실상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비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직의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더 나아가 그가 아론 계열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 줄 것이다. 만약 후자의 목표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멜기세덱 계열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놓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논의는 대제사장 직무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진술로 시작된다. 게다가, “왜냐하면”(가르, gar)이라는 도입 접속사가 보여 주듯이, 이것은 4장 끝부분의 서두 단락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제사장이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은 그가 이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몇 가지 특별한 특성이 언급된다.
첫째, 대제사장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대표자이다. 그는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다(문자적으로는 “사람들에게서 취해졌다”). 그가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고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가 본질적으로 사람들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직에게 근본적인 것이었다. 초인간적인 존재에게 맡겨진 임무라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둘째, 그는 “임명되었다”(카티스타타이, kathistatai). 동사가 수동태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임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암시된다. 아론 계열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임명된 것이 아니라, 오직 권위적이고 신적인 지정으로 임명되었다.
셋째, 그의 임명은 “하나님과 관련된”(타 프로스 톤 테온, ta pros ton theon)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중보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제사장직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넷째, 그의 목적은 예물과 속죄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이 절(히나[hina]절)은 그가 하나님 및 사람들 양쪽과 긴밀하게 동일시되는 결과를 보여 준다. 봉헌하는 두 물건은 아주 비슷하다. 사실 이 두 단어는 때로는 서로 교환되어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서로 구별된다. 이 경우 “예물”(도라, dōra)은 곡물제물을 가리키고, “희생제물”(튀시아스, thysias)은 피제물을 가리킨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사실상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 나아갔다. 이때 “죄 때문에”라는 진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희생제물에만 한정되지 않고, 예물 즉 곡물제물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대제사장 사역의 전체 범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가 백성의 대표자로서 행하는 모든 것은 속죄로서 가치가 있다. 즉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그가 대표하는 백성의 죄와 관련이 있다.
〈2〉 이 일반적인 직무 기능들을 언급한 후, 저자는 보다 개인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즉 무지한 사람들과 제멋대로인 사람들을 “용납할 수 있는”(메트리오파테인, metriopathein) 대제사장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구약성경에는 도덕적인 자질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지만, 저자는 대제사장이 본질적으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사실로부터 이 부드러운 이해의 자질을 추론해 냈다.
무지한 사람들과 제멋대로인 사람들은 없애는 것이 또는 최소한 무시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들은 잘 안정된 사회에서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신정적인 사회에서는 그들도 무시될 수 없다. 그들을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대제사장은 단지 사회의 더 좋은 분야들만의 대표자가 아니라 또한 더 나쁜 분야들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무식하고”(아그노우시, agnoousi), “미혹된 자”(플라노메노이스, planōmenois)라는 두 묘사는 대제사장이 처리할 수 있는 종류의 죄의 근원과 특성을 가리킬 것이다. 무지의 죄는 율법이 아무런 대책도 제공하지 않는 고의적인 죄와 신중하게 구별되었다. 방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완고해진 반역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자신의 필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특별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 측면에서 아론 계열은 약함보다는 그의 강함 때문에 백성을 훨씬 더 부드럽게 대할 수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과 다르다. 예수님은 결코 무지하지도 제멋대로이지도 않지만, 그런 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한다.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로 번역된 말은 “약함으로 둘러싸인”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약함으로 옷 입고 있다고 간주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저자가 의도한 의미라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과 더 밀접한 평행이 있다. 그렇지만 아론의 약함과 그리스도의 강함을 대조하는 의미가 더 그럴 듯하다.
〈3〉 이 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론 계열 사이에 훨씬 더 명백한 차이가 나온다. 그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봉헌해야 한다. 대제사장이 먼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것은 속죄일의 전체 과정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참조, 레 16:11ff).
저자의 생각에 약함과 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우, 즉 완전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 약함은 결국 죄로 이어진다.
물리적인 약함의 죄 없는 형태를 보여 주는 완벽한 예가 십자가이다. 그러나 아론 계열은 그 제사장들의 이런 종류의 약함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론적으로 희생제도에서 준비한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히브리서가 계속해서 보여 주듯이, 아론은 동물을 봉헌해야 했던 반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봉헌했다. 대제사장의 죄와 백성의 죄 사이에는 분명히 공통의 요소가 있다. 그도 그들처럼 똑같이 곤궁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그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봉헌할 필요가 없었고, 이것은 즉시 그를 다른 범주로 분류한다.
〈4〉 대제사장의 직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는 기원이다. 그것은 자신이 임명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임명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임명하시는 것이었다(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이제 아론의 경우가 특별히 언급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약성경에서 그랬듯이 신약성경에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도권에 주목하게 한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과 비교해 보면, 그도 그의 직무에 임명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땅에 와서 해야 하는 일을 주셨다고 인정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참조, 요 17:4).
〈5〉 다음의 여섯 절은 그리스도와 아론 계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멜기세덱 계열을 소개한다. 후자는 나중에 5:11–6:20의 막간 이후에 더 전개된다. 먼저 저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임명하셨다는 것을 살펴본다. 이것은 아론의 위치와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특성이다.
여기서 (4:14에서 선호되는) 예수님보다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사용되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저자가 그의 직무에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는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약성경의 메시아 모습은 절대로 존귀의 위치를 낚아채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섬기는 것이 그의 임무인 사람의 모습이다. 요한복음 8:54에서 예수님은 주장하기를, 그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아버지에 의해 영화롭게 된다고 한다.
그가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시편 2편(이미 히 1:5에서 인용된 구절)의 지지를 받는다. (여기서 시 110편의 또 다른 인용과 결합되는) 이 반복되는 주제는 이 시편들이 숙고되었고, 히브리서 구조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암시를 준다. 그것들은 음악 작품에서 반복되는 선율과 같다. 각각의 새로운 도입은 약간씩 변화되어 나온다. 저자는 대제사장 개념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그의 고양된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임명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을 전적으로 수용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그가 사람에 의해 임명되었다면, 언제나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6〉 두 번째 인용인 시편 110:4은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라는 아주 일반적인 문구로 도입된다. 아마도 이 인용과 첫 번째 인용을 구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권위적인 것으로 인용된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셨다”는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사장 직무에 임명하신다는 것은 이 인용에 의해서 지지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아론의 제사장직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완전히 새로운 두 가지 특성도 소개된다.
첫째, 그것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개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절대로 더 좋은 것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지점에 다다르지 않는다.
둘째, 그것은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론 계열과는 달리, 승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적용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무시간적이다.
아론과는 달리, 멜기세덱은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창세기 14:18–20의 짧은 언급은 그를 역사상의 인물로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그의 제사장직을 인정했다. 창세기는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고 말하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그는 이것들에 상징적인 중요성을 부여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빵과 포도주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대신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서 십일조를 바쳤다는 역사적 사실에 집중한다(7장을 보라). 또 그는 시편 110:4에 나오는 맹세를 인용하고 확장할 수도 있었다. 특히 그가 이미 3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맹세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는 맹세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하는 6:13까지는 그런 언급을 자제한다. 저자가 멜기세덱이라는 신비한 인물을 소개하는 방법은 그 제사장 자신만큼이나 신비스럽다. 거기에는 그가 예시하는 고귀한 대제사장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다.
〈7〉 히브리서에는 처음 볼 때는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주제들을 갑자기 도입하는 놀라운 부분들이 많이 나온다. 다음의 단락(7–10절)도 그런 경우이다. 저자는 예수님의 생애로부터 역사적인 회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도입한다. 우리는 이것이 10절에서 그의 제사장직 계열이 다시 언급되는 멜기세덱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시편 2편 인용의 반복이 저자에게 앞에서 전개한 사고의 흐름을 상기시켰을 수 있다. 그는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집중하고(1장) 예수님의 인성에 집중한다(2장). 그는 갑자기 독자들에게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기시킴으로써, 예수님이 신비적이고 비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개념을 일소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 표현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그의 인간 생애의 실제에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을 이미 2장에서 분명하게 했지만(14절과 17절을 보라), 현재의 언급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역사적인 기록에 대한 분명한 암시를 훨씬 더 생생하게 소개한다. 실제로 이것은 복음서들 이외의 신약성경에서 가장 생생한 예들 중의 하나이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소유격 그의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것은 이 단락 전체의 주제인 예수님을 가리켜야 한다(참조, 5절).
예수님의 인간 생애에 대한 주요 진술은 그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에 사용된 두 단어-간구와 소원-는 아주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별된다. “간구”(데에시스, deēsis)는 기도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신약성경 단어이지만, “소원”(히케테리아, hiketēria)은 더 강한 간청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호소의 표시로서 “올리브 가지”를 내미는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가 백성과 얼마나 완전하게 동일시되는지를 보여 준다.
심한 통곡과 눈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겪은 고난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암시로 보인다. 그의 기도는 그가 겪은 내적 투쟁의 강도를 보여 주는 피의 땀을 수반했다. 복음서들의 이야기는 눈물을 언급하지 않지만, 눈물이 이 이야기들과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울 수 있었던 예수님이 격한 감정에 휩싸인 다른 경우들에 자신을 비슷하게 표현할 수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눈물은 보통 약함의 표시로 간주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치유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의 마음이 몹시 고민스러웠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정도로 우리를 초월해 있지 않았다.
저자는 이 격렬한 기도의 수신자를 묘사할 때,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주목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라는 서술적인 구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보는 이 개념은 신약성경의 특징적인 것으로서, 이것의 충분한 의미를 다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히브리서는 이미 사람이 끊임없이 죽음의 공포에 속박되어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2:15). 승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 주었다. 저자가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할 때, 이것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그(그리스도)는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가 금방 명백하지 않다.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 말은 그의 경건한 두려움-그의 감정-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수단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말은 겟세마네 동산의 고난에 대한 더 직접적인 암시로 보인다. 그 절정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한 것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경우라면 아포(apo)라는 단어는 (그의 경건하심) “때문에”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접속사에 대한 또 다른 이해는 보다 일반적인 “~로부터”(out of)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경건한 두려움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 문맥에 낯설어 보인다.
저자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보다 일반적인 단어(포보스, phobos)를 사용하지 않고, 주의 깊은 단어(율라베이아, eulabeia)를 선택하여 사용한다. 사실 그가 사용하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히브리서에서만 나타난다(“경건”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12:28도 참조하라).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일반적으로 그것은 경건하고 사려 깊게 무모함에서 물러서는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참된 용기와 양립할 수 있다.”
이 개념은 겟세마네 경험에 적용될 수 있다. 사람들은 공관복음서가 잔을 제거해 달라는 겟세마네 기도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들으심을 얻었는가? 분명히 그 대답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수용했다는 데 있다.
〈8〉 예수님의 지상 경험은 그의 대제사장 자격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그의 지상 경험에 대한 이 회상 덕분에, 저자는 그의 고난의 역설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보통 아들들이 자신들이 겪는 고난을 통해 지상의 아버지들의 손에서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전혀 이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다르다. 그의 아들 관계는 완전했고, 따라서 도대체 왜 그가 순종을 배울 필요가 있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의 신비와 직면하게 된다. 신적 아들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배우는 과정(순종함을 배워서)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가 어렵지만, 완전한 사람인 아들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즉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누가가 예수님은 배우는 일에 진전을 보였다고 말할 때(눅 2:52), 그의 의미는 예수님이 점진적인 과정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만드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그가 죽음에 다가가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겟세마네 동산에 울려 퍼진 수용의 외침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순종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아무도 여기에 심오한 신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을 분명히 더 실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는 빌립보서 2:6ff과 비슷한 부분이 나온다. 빌립보서도 종의 형태를 취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강조한다. 두 단락 다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9〉 (2:10에서처럼)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온전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개념이 반복되는 것도 역시 인상적이다. 전자의 경우에서처럼, 온전과 고난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이 있다. 온전이 성취되는 것은 고난의 길을 통해서이다. 현재의 경우에는 다름 아닌 순종이 온전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빌립보서 2:8–9에 나오는 사고의 흐름을 상기시킨다.
사람인 대제사장에 대해서는 그가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을 그가 온전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암시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이 소유하고 있던 온전은 그의 사람으로서의 생애의 과정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 온전은 그가 겪은 모든 고난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휴즈(Hugh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험을 받고 성공적으로 견디어 낸 그의 고난이 실패와 패배에서 자유로운 그의 온전을 증명했다.” 여기서 강조점은 영원히 현재적인 실제인 온전에 있다. 또 이 동사가 70인역에서는 빈번하게 대제사장을 그의 직무에 성별하는 것에 사용된다는 것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개념은 히브리서의 주제와 다소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의 온전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로 간주된다. 정말로 그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다”(에게네토, egeneto)는 것은 구원의 효력을 가리키고, 이 이유 때문에 과거 시제로 표현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한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근원”(아이티오스, aitios)으로 번역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여기서만 나타나고, “원인”을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원인이나 나쁜 원인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전적으로 좋은 것이며 “근원”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흠정역[AV]은 “저자”[author]로 번역한다).
구원의 수단을 회피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통해 오지 않는 것은 참된 구원이 아니다. 저자에게는 “영원한” 것이라는 개념이 특별히 중요하다. 그는 “영원한” 심판(6:2), “영원한” 구원(9:12), “영원한” 성령(9:14), “영원한” 유업(9:15), “영원한” 언약(13:20)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상의 대제사장직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법은 항상 변화된다.
그는 분명히 이런 것과 대조되는 영구적인 토대를 놓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구원에는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의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원을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제시된 조건들이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 조건들은 아들이 이미 배운 것에(8절) 비견되는 순종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한, 이것은 하나님이 제공하신 구원의 수단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요약한다.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자유인과 노예 등 모든 부류의 순종자를 의미한다(예를 들어, 갈 3:28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을 참조하라). 복음의 보편성은 대제사장 직무의 보편적인 효력에서 드러난다.
〈10〉 공적으로 이름이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에서 독특한 또 하나의 단어가 여기서 사용된다. 개정표준역(RSV)은 이 단어를 “지명했다”(프로사고류오, prosagoreuō)로 번역한다. 새로운 계열의 제사장직에 대한 선언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이미 4–5절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임명에 주목하게 한다.
아무튼 멜기세덱 계열은 저자가 7:3에서 보여 주듯이 세습적인 계열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성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계열에서 성별될 수 없었다. 또 이것은 그리스도 때까지 다른 그 누구도 이 계열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특한 계열이다. 위에서 언급된 특이한 단어는 우리의 대제사장의 지위에 특히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론과는 완전히 다른 계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의 이 지점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멜기세덱 주제를 떠난다. 그것은 계획된 탈선(digression)으로 보인다. 이 탈선은 6장 끝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맹세를 논의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멜기세덱 주제로 되돌아간다.
거쓰리도날드. (2015). 히브리서 (백승현, Ed. & Tran.; 초판, Vol 15, pp 176–195). 기독교문서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