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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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은 어떤 놀이기구를 탔을 때 가장 무서웠나요? 어릴적 자연농원(현재 에버랜드)에 가서 독수리 요새라는 것을 타봤습니다. 독수리 요새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했던 서스펜디드 롤러코스터로 당시 트랙 길이가 1km 되는 국내 최고의 스릴라이더였습니다.
처음 탈 때 거의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재미있는 놀이기구라 생각하고 탔지만 독수리 요새가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오금이 저리고 마치 밑으로 떨어져 추락할 것 같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공포의 비명이 나왔습니다. 이러다 떨어져 죽겠가도 생각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손잡이를 있는 힘을 다하여 잡고 눈을 질끈 감기까지 했습니다. 제 옆의 친구는 아예 고개를 밑으로 푹 처박고 울면서 엄마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몇 분 흐른 후 독수리 요새는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내릴 때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무섭지만 탈만 하네’ 그리고 내리자마자 다시 독수리 요새를 타는 줄로 돌아와서 또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트랙을 익셔서 그런지 손잡이를 꽉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내 안에 견고한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무슨 확신인가요? 아무리 독수리 요새가 무시무시하게 요동을 쳐도 나는 결코 거기서 추락하지 않고 안전하리라는 확신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현 세대도 이와 같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현 세대에서 성도에게는 환난과 고난과 박해와 위험이 찾아옵니다. 이때 성도는 갑자기 들이닥친 환난 앞에 무서워 떨 수 있습니다. 박해와 위험 앞에 두려워 꼼짝 못 하고 온몸을 처박고 어딘가로 숨어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런 어려움이 성도에게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고난들이 절대로 여러분을 넘어뜨릴 수 없음을 확고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독수리요새가 우리로 아찔함을 느끼게 만들고 긴장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현 세대에서 성도에게 들이닥치는 어려움 또한 성도들을 어렵게는 해도 그 이상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본문은 ‘누가~ 하겠는가?’라는 네 개의 연속적이고도 도발적인 질문(롬8:31, 33, 34, 35)으로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하겠는가?’, ‘누가 정죄하겠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이 질문들이 갖는 공통적인 확신이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도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들은 결국 ‘아무도 없다’라는 대답을 확신 가운데 기대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는 확신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질문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성도를 위하시면 ‘이 일에 관해 누가 성도를 대적하겠는가?’(롬8:31)하는 질문입니다. 로마서 8:31 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서 ‘이 일’이란 무엇인가요? 이는 28-30절에 나타난 성도의 구원여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계셨고, 성도들을 위한 계획을 세워놓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심으로 소명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부른 성도를 향하여서는 의롭다고 칭의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구원의 여정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현 세대의 고난 가운데(롬8:18) 살아가는 성도의 연약함에도(롬8:26), 소망 중에(롬8:23-24), 인내하는 가운데(롬8:25) 일어납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부르신 이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언약적인 신실함을 드러내실 것입니다.(롬8:28)
바로 이러한 구원역사를 하나님은 전적으로 여러분 편에 서서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구원역사에 감히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누가’는 암묵적으로 현 세대를 좌지우지 하며 여러분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의미합니다.(롬8:38) 이 모든 방해세력은 결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막아설 수 없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신실하심(미쁘심)이 결국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3:6)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미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시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습니다. 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 내주신 분’이라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롬8:32)
이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사랑했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기꺼이 내드립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말리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다함께 창22:16-17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이로써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니은 이런 아브라함을 크게 기뻐하며 축복하셨습니다. 그랬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친히 자기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내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이후로는 그 어떤 것도 이 사랑을 멈출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주신’ 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내주다’ 혹은 ‘넘겨주다’라는 의미가 있는 헬라어 동사 ‘파라디도미’는 이미 로마서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과 로마서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로마서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세 차례에 걸쳐 인류의 타락을 설명하는데 연속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인류를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습니다.’(롬8:24) 또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롬8:26) 그러나 여기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인간을 죄악 된 마음과 더러움에 넘겨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인류를 위해 ‘내주신’ 것입니다. 이는 로마서1장에서 시작되었던 인류의 타락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하나님의 ‘내주심’의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내주심은 이 땅에서 그 아들의 수동적인 고난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내줌과 하나님의 내줌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죽지 않고 복을 받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죽고 그 복은 누가 받아요? 우리가 받습니다. 자기 아들을 내줌은 사흘 만에 다시 부활의 생명이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내주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아무리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세력들이 여러분들을 대적한다고 해도 결국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두번째로,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말씀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종말적인 심판 상황을 전제합니다. 여기 고발한다(헬. 엥칼레오)라는 단어는 법정에서 상대편을 기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역사의 최후 순간에 사탄이 성도들의 죄를 고발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이러한 기소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왜요?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가 택하신 성도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하다’에 사용된 동사(헬. 디카이온)는 현재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반복적인 동작을 의미합니다. 이는 칭의의 사건이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해서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사건임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의롭다 하시는 것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순종하게 살게 하시고,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거룩하심을 닮아가도록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심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0:8 을 읽겠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나를 끝까지 책임지고 의롭다 하실 분을 가까이하는 일이 바로 성도인 우리의 능력이고 확신의 근거입니다.
세번째로, 로마서 8:34 을 읽겠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또한 두번째 질문에 이어 종말의 최후 심판을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정죄하겠는가 라는 동사(헬. 카타크리논)의 시제가 미래형이기 때문입니다.
이 간단한 질문을 풀어보면 ‘종말의 때에 누가 과연 성도를 정죄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담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편’은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 허락하는 특별한 존귀와 명예와 권능의 자리입니다. 한편 이 우편은 하나님의 심판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 대적자들의 정죄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심판이 열리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중보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대신 죄의 짐을 지고 죽기까지 사랑한 자들을 변호하시고 그 모든 정죄로부터 막아주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히브리서 4:14 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하늘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죄 없으신 대제사장이 우리를 보호하고 변호하는 한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하여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넷째로, 로마서 8:35 을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는 현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들이닥치는 고난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분리를 의미하는 끊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이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이후 등장하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발가벗은 몸), 위험, 칼 등 듣기만 해도 끔찍한 고난의 목록은 성도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오는 일이지만, 달느 한편으로 이는 이미 사도 바울이 복으을 전파하며 경험했던 고난의 목록이기도 합니다. 그는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였고, 돌팔매질을 당하였고, 잠도 못 자고, 주리고, 춥고, 헐벗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거의 바울의 생명을 앗아갈 뻔했고, 때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바울은 예수님께 실망하여 돌아서지 않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더 커짐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극심한 환난이 자신을 억누른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누가 끊겠는가’라는 35절 전반부의 선언은 말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 현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반드시 붙들어야 할 확신입니다.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 합니다.
성도의 고난은 힘듭니다. 때로 견디기 버거워 쓰러질 것 같습니다. 이런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바울은 시편(44:22)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36 을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향하는 말씀으로, 이는 성도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반향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겨우 힘에 부쳐 낑낑대는게 아니라 넉넉히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로마서 8:37 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넉넉히 이긴다(헬. 휘페르니카오)는 말은 ‘이긴다’(니카오)는 동사와 ‘~위에’(휘페르)를 의미하는 전치사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어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압도적인 승리, 이기고도 남는 승리라고 부릅니다. 성도가 고난 가운데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은 5장 5-8절에 등장했다가 저변으로 사라진 후 8장의 끝 부분에 와서 다시 수면 위에 드러나 메아리칩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제시하는 소망의 저변을 흐르는 근본적인 동기와 배경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나타냅니다.
‘누가 감히 하겠느냐?’는 야심찬 네 개의 질문은 결국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를 바탕으로 바울은 흔들릴 수 없는 굳건한 확신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감히 덤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씀은 성도를 위협하는 것들을 열거합니다.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은, 다른 피조물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능력과 권세자들은 공중권세를 잡고 세상의 문화와 힘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세력들을 의미합니다. 높음과 깊음은 점성술과 관련 깊은 용어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진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갖는 장엄하고 가슴 벅찬 소망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5장 3-5절에 진술한 소망의 반향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갖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이깁니다. 성도의 고난은 반드시 이길 고난이고, 이는 장차 우리가 맛볼 영광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확신을 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려분!
여러분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온 세상을 지으시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넉넉하게 압도적으로 이기게 합니다.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걱정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불안하고 고민하게 하는 가요? 이제는 이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안에서 여유와 기쁨을 회복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이기게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