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걸음과 넓은 포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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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5:6-10
스페인 중부 지중해 연안 도시인 ‘알리칸테’라는 곳에는 높이가 약 200m인 ‘인템포’라는 고급 아파트가 있다고 합니다. 원래 20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이후에 설계가 변경되면서 47층짜리 아파트로 증축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공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21층부터 47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증축 시 건축사가 엘리베이터 설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죠.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 아닙니까? 그 수많은 인력 중에 어떻게 그 고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은데요.
여러분, 아무리 최고급 아파트라 하더라도 21층부터 47층까지 걸어가야 한다면 정말 좋은 아파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초고층이라는 이 건물의 탁월성과 장점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이미 완공 단계에 이르렀던 건물은 내부에 다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예산을 들여서 건물 외벽에 엘리베이터를 따로 설치해야만 했습니다. 큰 손실이 따랐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초고층 건물은 아무리 화려해도 쓸모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죠.
결국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후에 이 아파트는 본래 디자인과 다르게 외관상 건물의 개성을 완전히 떨어뜨렸다는 혹평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인생에도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될 결정적인 요소들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 요소를 빠트려 뒤늦게 갖추려 한다면 그동안 쌓아온 성과마저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설계 단계에서부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 인생에는 아주 중요한 설계도가 있는데요. 바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설계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설계도 위에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완전한 설계도, 곧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모세오경 강의 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뜻은 열방 가운데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왕이 아닌 하나님을 왕으로 예배하는 민족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선포되게 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면서 가장 먼저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그곳을 예배하는 땅으로 회복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설계 목적을 잊어버린 채,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이방 족속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정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가장 중요한 설계의 기초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다윗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설계도가 완성되는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요. 다윗이 세운 통일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외면당했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의 행보를 자세히 추적해보면 그의 남다른 영성과 목적의식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요.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참 가슴이 많이 뛰었습니다. 이 다윗의 남다른 목적의식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많이 공유되고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여러분, 다윗이 통일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왕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부스 족속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례없던 가나안 땅의 완전한 정복에 성공을 하게 되는데요. 오늘은 그 놀라운 승리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자!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원인은 바로 ‘목적의 승리’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시점에, 나라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시온성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이방 세력인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거의 모든 지역을 다 차지했지만, 유일하게 한 곳을 점령하지 못했었는데요. 그곳이 바로 시온성이었습니다.
이 시온성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산 정상이었거든요. 그리고 훗날 다윗의 장막과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었고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골고다가 바로 이 시온성 자리였습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이곳이 영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온성은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난공불락의 성’이자 가나안 점령 이후에 단 한 번도 온전히 ‘정복되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온 지역은 경사가 아주 가파르고 접근이 불가능한 지리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신학자들이 천혜의 수비 시설이라고 표현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요새와 같은 지리적 특성에 여부스 족속의 호전적인 기질까지 더해져서 어느 민족도 이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 중심부 시온성에서 다른 민족의 침략 없이 안전하게 거주하며, 하나님의 통치 체제를 거스르고 있었던 것이죠.
아무도 저항하지 못하던 땅, 영적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될 그 중요한 땅이 이방 세력에게 점령당해있지만, 사울 왕마저 적당히 타협하며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을 주목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완전한 설계도를 의식했고, 시온성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탈환해야 할 약속의 땅의 중심임을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의 도성 한복판에 이방 세력이 자리 잡은 것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느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다윗이 도망자 신세에서 헤브론의 왕이 된 지 7년 6개월 만에 온 이스라엘로 통치권을 확장한 시점이었는데요.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여부스 족속을 치는 일이었으니, 그가 이 전쟁에 각별한 의미를 두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자신의 왕국에 반영되길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다윗은 왕정 정치가 아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정 정치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예배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 적에게 빼앗긴 거룩한 땅을 탈환하여 하나님의 통치 보좌가 회복되고 세워지길 바랐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예루살렘을 향한 다윗의 강한 집념은 그의 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부터는 다윗의 행적에 숨은 ‘비밀 코드’를 함께 찾아볼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약 20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상17:51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삼상17:54
54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자, 여기에 등장하는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누구의 머리이겠습니까? 바로 골리앗입니다. 소년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골리앗의 머리를 베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통상적으로 고대의 장수는 전장에서 승리하면 적장의 목을 베어서 도시 한복판이나 마을 입구에 걸어두곤 했었는데요.
아시다시피 머리는 그 사람의 인격과 영광을 상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적장의 머리를 당시의 사울 왕조의 수도였던 마하나임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 걸어두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굳이 적장의 머리를 질질 끌고 그 먼 곳까지 걸어가 승리의 상징물로 걸어둔 이유가 뭘까요?
다윗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사사기 시대 480년, 사울 시대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던 여부스의 요새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도성 중심에 이 승리를 선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려고 했던 것이죠. 참 멋진 일 아닙니까?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거인의 목을 배어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작은 소년의 당당한 발걸음. 이 걸음을 생각하니까 제가 막 가슴이 뛴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뜻을 대적하는 여부스 족속을 향한 거룩한 선전 포고였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내 건 그 장소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매달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완전한 승리가 선언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기필코 다시 오겠다. 돌아와 이 승리를 확정 짓겠다.” 소년 다윗이 이렇게 결심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정말 20년이 흘러,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어릴 적 결의를 다졌던 예루살렘 시온성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삼하 5:7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바로 이 한 구절에서 다윗이 겨냥한 뚜렷한 목표를 읽을 수 있는데요. 바로 ‘하나님의 통치 회복’입니다.
저는 이런 다윗의 선택과 승리를 생각할 때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루려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했고, 그분의 설계도를 분명히 의식했기 때문에 전쟁에 뛰어들어 승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죠. 여러분, 다윗의 전쟁은요. 땅을 정복하려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려 했던 이유가 단순히 자기 백성에게 국토가 필요해서 그랬을까요? 단순히 먹고살 땅을 주시기 위함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그분의 백성이 제사장 나라로서 거룩히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아브라함도 우상의 땅이었던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불러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설계도는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나안 정복 이후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자기를 희생하며 싸우려 한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꿈꾸지 않았고, 시도하지 않았기에 정복하지 못한 땅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 난공불락의 성을 침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던 세력을 모조리 격파하고 그들을 뽑아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목적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다윗의 분명한 목적의식을 삶의 본질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는 무엇입니까? 한평생 잘 먹고 잘사는 것일까요? 돈과 성공과 명예와 쾌락을 좇으며 남 부럽지 않게 살다가 구원받았기에 천국 가면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영원’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이해하고 이 목적 위에 인생을 세우길 원한다면, 이제 더 이상 물러나 있거나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는 남은 세력을 완전히 진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견고한 적진은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정치 세력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사악한 문화와 어떤 사상 가운데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진멸해야 할 세력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는 적군의 요새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나의 의가 있고요. 은혜에 저항하는 나의 교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통치를 거부하는 나의 정욕이 진정으로 정복해야 할 나의 요새일 수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우리는 이 요새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며 살아온 것 아닙니까? 정복이 아닌 사울 시대처럼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내 마음에 두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이 두 지배 체계에 따라 삶의 방향이 갈팡질팡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 영혼의 가장 중심부에 그분의 통치가 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 풍성한 임재를 부어 주시기 위해 늘 준비하고 계신 분이세요. 우리 인생의 성벽 위에 그분의 승리를 선언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물러나지도 마시고 주저앉아 계시지도 마시고 일어나 싸우시길 바랍니다. 영적인 요새를 탈환해야 합니다. 싸우기로 결단하면 반드시 전쟁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 혼탁한 시대정신을 장악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담대히 나아가는 은혜가 있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다윗이 승리한 두 번째 비결은 ‘방법의 승리’였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합독.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여부스 족속은 다윗의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그들을 업신여기게 되는데요. 여러분, 왜 여부스 족속은 다윗의 막강한 군사력을 오히려 이렇게 비웃고 있는 걸까요? 그들의 견고한 성을 누구도 점령할 수 없다고 자신했기 때문 아닙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당시 여부스 족속이 살던 시온성은 천혜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그 높은 곳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로까지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읍이었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과 식수를 성안에서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완벽한 요새였던 셈이죠.
자, 그렇다면 다윗은 이렇게 강력한 시온성을 어떻게 점령했던 것일까요? 우선 다른 방법으로는 성을 점령할 수 없음을 알고, 정탐꾼을 보내서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성을 탈환할 결정적인 전략을 세우게 되는데요. 8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8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이 발견한 방법은 바로 “물 긷는데”였습니다. 높은 절벽인 시온성에 기혼 샘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을 타고 올라가는 게 그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적중하게 되는데요. 수로로 잠입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성물을 열자 대기하던 나머지 군사들이 일제히 성안으로 들어가 시온성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지혜로 열어주셨던 싸움의 전략은 너무나도 명쾌했는데요. 많은 피를 흘리거나 큰 희생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닙니까? 강한 것을 약하게, 약한 것을 강하게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꼭 이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방법의 승리’입니다.
여부스는 역사적으로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난공불락의 요새를 의지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무용지물로 만드시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자랑을 어떻게 쓰시는지를 알 수가 있는데요. 또 인생의 번영에 기대어 안전을 추구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알게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요. 여러분, 우리는 말씀 위에서 ‘강함’과 ‘약함’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강함이고 약함일까요?
인생은 세상에 기대어 살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많이들 경험하시지 않습니까? 돈 벌고 싶어서 돈에 기대고, 이름을 좀 알리고 싶어서 이름에 기대고, 건강을 누구보다도 자신했는데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확신하다가 인생의 성읍을 빼앗기고 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의 약함은요. 내가 강하다고 자신하는 교만에서부터 오게 되는 것이고요. 진정한 강함은 내가 약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오게 됩니다. 이해가 되시죠? 겸손과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갑옷과 칼로 무장을 했고 전투 경험이 많은 전사들이었지만, 골리앗의 강함에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은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했고 갑옷도 칼도 맞지 않는 약함을 지녔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무찌른 것 아닙니까? 약함을 곧 강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 방법, 누구도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진정한 겸손이란,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진짜 겸손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도우시고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요. 하나님의 뜻 위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함께 살펴보길 원하는데요. 오늘 본문 10절 합독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10절 말씀에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라는 구절을 히브리어로 ‘할로크 브가돌’이라고 해서요. 이것을 그대로 직역하면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전진해갔다’라는 의미입니다.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전진해갔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더 큰 걸음과 넓은 포용으로’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다윗의 강성함은 단순히 연이은 성공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고요. 계속해서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더욱더 다윗다워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더 다윗다워지다’라는 말이 얼마나 멋집니까?
저에게 기억에 남은 원로 장로님 한 분이 계세요. 제가 부목사 시절에 새신자들을 대상으로 저녁에 성경 공부를 했거든요.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해서 양육을 받는 분들이니 내용이 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누구신가?” “교회란 무엇인가?” 다 이런 기초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원로 장로님쯤 되시면 그런 성경공부는 안하셔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실텐데요. 이분이 자발적으로 참석을 하셨어요. 몇 명되지도 않으니까 다들 의아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요. “목사님, 장로도 배워야죠. 장로라고 다 아는 것 아닙니다. 배워야 알지요.” 그러시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목사로서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십니까? 제가 성장하지 않는 거예요. ‘더욱더 목사다워지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고 ‘목사로서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성장해갔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제가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만 치우쳐서 사울처럼 적당히 타협하고 주저앉을까?, 이 교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을까? 그것이 제가 제일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인생의 변화를 겪으면서 본질도 변질되고 하나님께 견고하게 내렸던 뿌리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한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과 초심이 세상 풍파에 휩쓸리다 보니 허약해지고, 예기치 않은 몇 번의 고난에 빛을 읽어버리곤 합니다. 이게 우리 인간이에요.
그래서 저 같은 목사도 또 우리 성도님들도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인생의 핵심 단어를 가슴에 품고 다니셔야 합니다. 사명, 부르심, 사랑, 순전함, 거룩, 부흥과 목마름 등 결코 퇴색되어서는 안 되는 단어들이 우리 인생의 영원한 주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은요. 도피 생활과 정치적 망명과 숱한 전쟁과 권력 다툼 속에서도 그의 유일한 인생 목적을 흔들림 없이 붙들었습니다. 사울의 끈질긴 위협과 적대감에도, 블레셋과의 반복적인 전쟁에도 독기만 남거나 영혼이 피폐해지지 않았습니다. 뭐 과거에 골리앗 물리친 것을 무용담으로 삼고 자신의 명성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다윗이 정말 부러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윗은 이렇게 끝까지 하나님의 설계도에 충실했기 때문에 자기 삶을 안전하게 세워갈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이집트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는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그 위엄과 장관이 너무도 놀랍고 경이로웠으나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다른 유물들과는 달리 쿠푸왕 피라미드가 4천 년이 넘도록 원형을 유지해온 비결이 있다고 하는데요. 미술가인 안규철이라는 분의 책 <사물의 뒷모습>을 보면 원형 보존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피라미드의 단호하고 명료한 기하학적 형태에는 더 이상 덧붙이거나 덜어낼 것이 없다. 피라미드 설계자들은 중력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중력을 설득하는 방법을 택했다. 원하는 높이에 마지막 돌 하나를 올려놓기 위해 수만 개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서 쓰러질 것은 처음부터 쓰러뜨렸고, 기울어질 것은 처음부터 기울여 놓았다.”
저는 이 글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는데요. 쓰러질 것은 처음부터 쓰러뜨리고, 기울어질 것은 처음부터 기울여 놓아 4천여 년이 지나도록 끄떡없이 건재한 건축물.
여러분, 이것을 삶의 원리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 삶에 쓰러질 것들은 처음부터 가져다 놓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기울어질 것들은 애초에 세울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인생을 쌓아 올려야 어떤 흔들림과 자극에도 쓰러지지 않고, 수만 개의 돌의 하중도 견딜 수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결국 쓰러지고 기울어질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설계와 목적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 아닙니까? 그것들로 인생의 집을 허둥지둥 짓다 보니 엘리베이터를 빠뜨리는 게 우리 인간이더라는 겁니다. 자기 의, 자기 확신,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과 기분 같은 것들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설계할 때 아예 고려해서는 안 될 것들이죠.
그래서 인생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할로크 브가돌’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품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발에 아무리 땀이 나게 뛰어도 큰 걸음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죠.
그렇게 ‘자이언트 스텝’으로 성장한 다윗이요. 한 사람의 자이언트 스텝으로 이스라엘 국토가 이전보다 열 배나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영토를 침입해 오는 적들을 완전히 소탕한 탁월한 전술가이자 정복자였습니다. 그의 통치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목적의식이 늘 함께했음을 알게 되는데요. 오늘 본문은 아니었지만, 12절의 말씀 합독.
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자신에게 허락된 성공과 번영을 은혜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것은 이스라엘과 그 나라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죠? 은혜의 선순환이 있다고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아는 사람들은 은혜의 선순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겸손함.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맞게 쓰임 받는 자이언트 스텝을 내딛는 인생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계 도면 위에서 그분의 목적을 따라 인생을 세우고 진정한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전진해가며 성장하는 이 시대의 다윗과 같은 인생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선한 능력으로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 귀한 시간을 내서 예배에 오셨는데, 그냥 무감각하게 앉아계시다가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 다닐수록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다윗다워졌다’하는 것처럼 ‘더욱 더 목사다워졌다’ ‘더욱 더 장로다워졌다’ ‘더욱 더 권사다워졌다’ ‘집사다워졌다’ 이렇게 더 성장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붙들고 함께 기도하실 때, “주님,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품으로 전진하길 원합니다.” “제 인생에 결코 변함이 없을 사명의 단어를 주시옵소서”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그 40층이 넘는 고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빠뜨린 것처럼, 혹시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설계 목적에 합당하지 않고 기울어져 버린 영역들이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 부디 우리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설계되고 세워져가길 원합니다. ‘할로크 부가돌’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품으로 전진해가길 원합니다. 그저 앞에 보이는 것들만 조급해서 근심과 염려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인생이 아니라,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다윗과 같이 ‘자이언트 스텝’으로 성장해가는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품으로 전진해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