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과 새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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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마태복음 9장)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왜 금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가?

14절 말씀에 나오는 인물과 상황을 자세히 설명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이 나타나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으로 본문말씀이 시작됩니다.
사이 좋지 않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데 평상시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금식" 관련한 종교적인 전통과 관행은 서로가 동의하고 일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선을 그어서 질문은 한 것인데요.
금식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 그런데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 금식이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길래 예수님께 ‘왜 금식을 안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했던걸까. 이해가 잘 안 가실 수 있을 것 같아 간단하게 금식에 대한 정의와 신앙생활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금식이란 신앙적 목적으로 음식을 삼가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육체적 욕망인 식욕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기도에 몰두하는 행위가 금식인 것입니다. 결국 금식이란 철저하게 회개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슬품과 아픔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금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을 구제와 더불어 중요한 종교적 행위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였습니다.
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질문을 하지? 마치 요한의 제자인 우리도 그렇고 바리새인 조차 나름에 하나님께 정직하고 절제된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듯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계셔서 적절한 비유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상황 그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이었고 옆에 있는 예수님은 그들이 따르던 세례요한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굉장히 금욕적이고 절제적인 신앙을 보였는데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마시고 즐기고 금식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보여서 이렇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 대한 대답으로 혼인집 신랑과 신부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다.
왜 그들에게 혼인잔치 비유를 전달하셨을까? 그럼 이 질문에 답변으로 15절 말씀을 보시면 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로 답변을 하셨던 것일까요? 바로 요한의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금식하는 것은 스승을 잃은 슬픔과 애도가 목적인 것인데요. 신랑인 나도 곧있으면 고난의 길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제자들도 금식을 할 날이 곧 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제자들에게 금식이라는 종교적 행위를 우리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정확히 설명하는 동시에 현재는 금식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적절한 비유를 들어준 것입니다.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의 의도된 기록 함께 마태복음 9:15 하반절을 봉독했으면 좋겠는데요.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공관복음인 마가와 누가에서는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용어가 아예 다른데요. 마태복음에 사용된 “그때에는”이라는 용어는 헬라어 “τότε” 토테인데요. 이 헬라어가 ‘그 때에는'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으나 ‘그 때 이후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마가와 누가복음 , 두 복음서와 뭐가 다른 것이냐면 마가와 누가복음에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의 날,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긴 그 날에는 금식할거다 라는 내용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 뿐만 아니라, ‘그 때 이후에도 금식을 할 것이다’, 라고 마태복음은 기록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저자인 “마태”가 아무런 이유없이 이렇게 기록을 했었을까요?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금식"이라는 종교적인 행위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마태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금식이라는 선한 관행을 가르치기 위해 강조해서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전통과 관습의 위험성
“금식"에 전통과 관습의 어두운면 그런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행들이 밝은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이라는 관행이 처음에는 기도생활에 힘쓰게 하고 믿음 생활에 깊이를 더해주는 훌륭한 신앙적 덕목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로 오면서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금식을 하고 이러한 종교적 관행을 자랑거리나 신앙의 공로를 쌓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어두운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 마태복음 저자인 마태는 “금식"에 어두운면이 아닌 밝은면, 긍정적인 효과인 기도생활에 힘쓰고, 믿음 생활에 깊이를 더해주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목적이 있는 금식을 가르치려 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대표되는 전통과 관습 “새벽기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모습에서도 오늘 본문에서 다루었던 “금식"과 같은 전통과 관습,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을 이끌어 왔고 지켜주었으며 성장시킨 동력이 있습니다. 바로 “새벽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새벽기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자신의 몸을 치고, 더 자고 싶은 유혹을 이겨가며 요즘과 같은 날엔 새벽에 추운 날씨를 헤쳐가며 기도드리러 오는 신앙행위이지 않습니까? 내심 마음 한켠으로는 새벽기도 드리러 나온 나 자신! 너무너무 뿌듯하고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고!! 인스타 스토리로 인증하고 싶은 그 마음!! 너무나도 이해합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질되어버린 전통과 관습 그런데 이렇게 목적과 동기가 변질되어버린 “새벽기도"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바라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영역, 예배, 목장모임, 각종교육, 교제나눔, 봉사와 헌신 등에서 목적과 동기가 변질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에만 목적을 두는 종교적 관행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탱했던 종교적 관행들, 여러 전통과 관습들이 우리의 자랑거리나 신앙의 공로를 쌓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깊이가 더해지는데 중요한 콘텐츠로 활용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로운 것은 옛 것과 함께할 수 없다.

이어서 새로운 시대와 옛 시대가 함께하기 힘들다는 것을 두가지 비유로 설명
예수님께서 두가지의 비유를 전하시다. 이어서 16-17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두가지의 비유를 말씀해주시는데요. 생베조각과 낡은 옷, 새포도주와 낡은 가죽을 대조하면서 비유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두가지의 비유를 통해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시대와 옛 시대에 대한 비유의 의미 아까 14절 말씀을 보면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 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조를 이루며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율법주의와 금욕주의를 상징하는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 대 은혜와 사랑, 자유를 상징하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로 대조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율법에 따라 규정된 기존의 종교 관행이나 행동양식, 옛 시대에 질서와 가치는 메시아인 내가 온 이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가치와는 어울리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두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거라 볼 수 있겠습니다.
두가지 비유에 나온 내용을 좀더 자세히 설명 좀더 이 두가지 비유를 통해 이 두 부류가 절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우선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이 함께할 수 없는 이유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덧대게 될 경우, 그 이후에 옷을 세탁했을 때 그 부위가 수축하게 되어 낡은 옷을 잡아당기게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낡은 옷을 고치기 위해서 생베 조각을 덧댄건데 오히려 이전보다 헤어짐이 더하게 되어 더욱 더 크게 찢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포도주와 낡은 부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새포도주를 부대에 담아 발효시키는 동안 그 안에서 엄청난 가스와 압력을 내뿜는 화학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따라서 새 포도주를 신축성이 떨어진 낡은 가죽부대에 넣을 경우 가죽부대가 버티지 못하여 찢어지고 말아 포도주와 부대, 둘 다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시대는 낡은 형태 속에 담아둘 수 없다.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어떤 메시지와 가치를 전달하고 싶으셨냐면 첫번째로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시대는 낡은 형태 속에 담아둘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으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운 새 가르침 곧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율법의 낡은 형식주의 안에 갇힐 수 없다는 것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역동적인 복음의 새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낡고 형식적인 율법과 전통에 얽매여 있는 유대 종교와 그 지도자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지적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새롭게하다(갱신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와 가치는 무엇이었냐면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시대는 계속적으로 새로워지는 시대이다.’ 라는 복음의 시대 가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역동적인 복음의 새시대가 도래한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새롭게 되고 완전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끄시는 복음의 새시대의 속성은 ‘새롭게 하고 다시 확립하며 더욱 개선된 방식으로 재갱신하는 것, 재정립하려는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후서 4:16 골로새서 3:10 을 연속해서 봉독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16 NKRV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골로새서 3:10 NKRV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의 모습 속에서 새롭게 갱신해야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도 복음의 새시대의 속성을 본 받아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의 모습들을 날마다 새롭게 다시 확립하고 더욱 개선된 방식으로 재갱신하며 재정립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부대를 상징하는 낡은 형식주의와 율법과 전통에 얽매여 안주하려고 하는 마음들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인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두려고 하고있지 않았는지 돌아보며 주님께 은혜와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 속에서 새롭게 갱신해야 될 것
전도방법 : 옛날 방식인 전단지 돌리는 방식을 갱신해야 한다. 최근에 제가 수요예배를 마친 다음에 잠깐 병원을 방문하려고 뉴코아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저희 대화교회와 뉴코아까지 거리가 4-5블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거리더라고요. 그 거리를 지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인지 기억은 안나는데요. 예수님 믿으시라고, 우리교회를 한번 와보시라면서 물티슈를 받았었고요. 그리고 몸이 튼튼해 보이는 청년이 우리 헬스장 한번 와보시라고 전단지를 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지나서는 체형교정 한 번 해보시라고 필라테스 전단지를 건내받았습니다. 그외에도 몇개 더 전단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요. 정말 대화교회에서 뉴코아까지 그렇게 먼거리는 아니었는데 그쪽을 지나가는 동안 무려 전단지만 4-5개를 받았던 것입니다. 전단지 뭉치 속에서 어느교회에서 준 물티슈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전단지를 받고 있는데 이 교회 물티슈가 눈에 들어올까?’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요. 궁극적으로 이 교회 홍보물에 가치를 안담았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인데요. 다른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홍보물만해도 ‘와~ 어떻게 이런 몸매를 만들수 있지? 나도 이 헬스장과 필라테스만 다니면 이렇게 이쁜 몸매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운동하고 싶게끔 가치와 메시지를 넣고 홍보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받은 교회 물티슈는요. 교회 건물 사진이 전부였습니다. 과연 누가 교회를 가는데 건물의 외형을 보고 갈지말지를 선택할까요? 이러한 전도 방법은 복음의 새시대의 속성을 본 받아 새롭게 갱신해야 될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전단지 홍보방식이 아닌 최근에는 SNS를 활용해서 다른이들에게 알리고자하는 가치와 메시지를 사진이나, 동영상, 글의 내용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와 메시지에 동의가 되고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만드는 홍보방식이 요즘 시대의 트렌드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들은 이러한 과도한 정보 전달, 전단지와 같은 홍보물로 전달해주는 정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정보를 받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지 숙고해보고 주님 앞에 지혜를 간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청년부의 내년도를 기획을 하면서 이건 무조건 새롭게 갱신해야겠다, 개선해야겠다는게 있습니다. 바로 “SNS 전도팀"을 만드는 것입니다. 다니엘 청년부의 가치와 메시지에 동의가 되고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우리 청년부의 가치와 메시지를 “SNS”에 담아 전달할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일 수 있겠지만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기도로 함께해 주신다면 저희 청년부가 힘을 얻어 쉽지 않은 미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저희 청년부를 위해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새 시대는 계속해서 새롭게 되고 완전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 시대의 속성을 본받고 속도에 발 맞추어 우리의 신앙의 모습들, 우리들의 사역의 모습들이 날마다 새롭게 다시 확립하고 더욱 개선된 방식으로 재갱신하며 재정립해 나아가는 대화교회 성도님들이 되길,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다니엘 청년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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