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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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일서 4:7-19
제목: 하나님의 변호인
주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거함’의 사랑이다.
목적: 괴로운 세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하소서.
평형깨기
지금 요한일서의 배경은 많은 이단자들이 교회를 훼방해서 진리를 퇴색시키는 위험 가운데에 놓여진 상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진리를 지키고 참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겁니다. 사람들이 묻는 것이죠.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설명해 봐”. 이것을 apologetics, 변증이라고 합니다. 변호하고 증거하다라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도 많이 듣는 질문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 그럼 증명해 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 거야?” 이런 질문들이 많죠. 지금 어떤 상황이냐면, 여러분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분은 변호사가 된 겁니다.
변호사가 피고인을 변호하려면 피고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피고인의 상황을 흩트림 없이 파악해야 하고요. 그 피고인의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야 하고, 심리 상태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피고인을 잘 모르면 변호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친구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데, 기독교인이 아닌 거예요.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로마서 11:33에 보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초월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변호할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갈등심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6절을 보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망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는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질문이 우리한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예상하는 답변이겠지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변호하고 증거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극복
오늘 말씀은 길지만, 이렇게 길게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앎”, “지식”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이거든요. 오늘 말씀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가 먼저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보다, 응시하다) 되었다”입니다.
여기서 “거하다”라는 동사를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하다”라는 동사가 제일 많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거함”이 곧 “사랑”이자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와 함께 머무셨냐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거함”이 사랑의 상징입니다. 구약에서는 다른 말로 “임마누엘”이라고 하죠.
임마누엘 뜻이 뭐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겁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와 같인 지붕 아래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말해요. 가족, 공동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사랑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거함’이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냐면, 거함은 곧 우리의 삶의 방식에 묶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해요. 즉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의 삶의 양식에 묶이시는 겁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러한 모습이 희미하게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이것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믿지 못하니까, 우리가 믿지 못하니까, 기어코, 우리와 똑같은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셔서, 몸소 그것을 증거하신 겁니다. 이게 바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죠. 그래서 14절에 이렇게 말하죠.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우리는 부모님께 가끔 이렇게 대들 때도 있습니다. 엄마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그런데 이것이 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죠. 여러분의 부모님은 여러분과 함께 거했습니다. 여러분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배설물을 가리지 못할 때에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에도, 여러분의 부모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감당하시고 책임지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모님보다 여러분을 잘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앎 = 사랑, 안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여러분, 사랑이 참된 지식입니다. 거함이 참된 지식입니다. 여러분이 이성친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졸졸 따라다닙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안다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녀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라고 짜증을 낸다면, 부모님에게 여러 의미로 충격이 됩니다. 자녀를 잘 아는데 알아주지 못하는 자녀를 보면서 슬프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부모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자녀를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슬픈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집에서 사는 식구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가족을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결국 위기상황에서 여러분들을 가장 먼저 도와줄 사람은 여러분의 가족입니다. 왜죠? 가족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과 묶여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런 겁니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로맨틱한 분위기만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고통을 같이 감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거함’의 의미예요.(피는 물보다.. 보혈이 더)
하나님께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창조하신 이유가 이겁니다. 이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함’이 헬라어로 meno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abide입니다. stay가 아닙니다. stay는 머물다, 유지하다라는 뜻인데, abide는 참고 견디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과 거하고 계세요. 예수님이 여러분에 의해 묶여 계세요. 이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아닙니다. 억압 당하고 계시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자녀 삼아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투정부리거나,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그러더라도, 예수님이 여러분과 묶여 계시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공동체,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 여러분들을 가장 먼저 도와줄 존재도 하나님이시고, 여러분이 가장 먼저 찾을 존재도 하나님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나요? 그것이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죄와 고난과 고통과 인생의 모든 역경들, 학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은 내가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모습으로 성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이 곧 참된 지식이라고 했으니까, 여러분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물론 어떤 시도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죠. 시도를 해야 고생이라는 걸 합니다. 한 집에 같이 살려고 해야 사랑이 커져갑니다.
복음선포
앞서 우리가 변호인이라고 했죠. 변호인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앎은 사랑을 통해서 온전해진다고 살펴봤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남은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변호인으로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변호하고 증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물어봅니다. 너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것을 증명해라! 오늘 본문은 똑같이 명확하게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12절 읽어봅시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물론 논리적인 대답이 필요합니다. 성경공부 열심히 하셔야 해요.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가리가 될 뿐이죠.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희생,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상대방을 위해 억울하게 손해본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내 마음에 억울한 마음이 있다고 염려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사랑을 시도한 겁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우리가 고통을 참으라고? 아니,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면 세상의 전쟁과 기근을 막아야 하지 않으시는가?” 물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요구할 때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셔서 모든 일들을 해결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종으로 생각하겠죠. 이 문제를 잘 풀어주는 게 17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저는 이 말씀이 오늘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러하심과 같이”가 어색한 번역입니다. 원래 의미는 “이 세상에 존재하심같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존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 땅에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 핍박으로 사랑을 나타내셨죠.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공격을 막으셨다면 그들이 공격적이지 않아야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편협한 사랑이죠. 조건적 사랑입니다. 마치 이상형이 있다는 겁니다. 이상형 아니면 사랑을 안하겠다는 것과 같아요. 이것이 사랑일까요?
그래서 죄악이 만연함을 그대로 두시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넘어지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존재하신 겁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신 것은, 바로 모든 죄악과 연약함과 전쟁과 기근에 놓여있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몇몇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사랑이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친, 여친 그런 사랑이 아니에요. 세상을 품으셔야 합니다(선교). 우주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모든 이웃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아요. 세상을 물리친다는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제거 대상이 아니에요. 세상은 우리가 품을 대상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훼손하는 가르침들을 방어하고 경계하되, 무력이나 정치와 같은 인간적인 힘을 사용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희생해야 합니다. 져줘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증거되는 겁니다.
비전제시
조선의 최초의 선교사라고 알려져 있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님은 1866년 병인양요가 터지던 해에, 조선 땅을 방문할 기회가 생깁니다. 조선이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가 가장 심해서 가장 위험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그는 재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 조선인들과 제너럴 셔먼호가 갈등을 빚으면서 토마스 선교사가 탄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관군의 공격을 받아 대동강변에서 침몰하고야 맙니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는 침몰하는 배에서 건져낸 성경책을 조선 관군에게 전해주며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히고 참수당하여 순교하고야 맙니다. 이로써 토마스 선교사는 한반도 복음화를 위한 개신교의 첫 번째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병사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고, 33년 후인 1899년 세례를 받아 평양에서 교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한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사랑하는 중등부 여러분, 토마스 선교사님의 희생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를 향한 작은 희생이 그 친구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 복음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싶습니까?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하나님을 보았고 증언하게 되었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 사랑하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