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6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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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속자는 살아 계신다
나의 대속자는 살아 계신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나아온 친구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깊이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 지난 한주간 잘 지내셨나요? 제가 듣기로는 아마 여러분들 요즘이 가장 바쁜 주간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시험기간도 계속 여러분들을 압박하고 있는데, 수행평가도 준비해야 해서 고난의 시기에 있는 줄로 압니다.
그렇게 고난을 겪는 여러분들 가운데, 오늘도 욥기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 욥기 말씀을 나누게 된지도 4주째가 되어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욥기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계신가요?
사실 욥기 말씀이 꽤나 어려운 말씀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토론하는 내용들이 시적으로 표현되다보니 비유도 많고 해서 바로바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평소보다도 더 시간을 들여서 준비하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만큼 어려운 말씀이지만, 또 우리가 함께 나눌 때 더욱 큰 은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욥기의 내용 중, 욥과 친구들의 토론의 내용을 살펴볼거에요.
오늘은 그럼 어떠한 내용들이 오고가게 될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실지 한번 함께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우리가 말씀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난주 나눴던 말씀 한번 복습하고 들어가볼까요?
우리 지난주에는 욥과 친구들의 토론 첫 부분을 보았죠. 그러면서 이들이 보응신학이라는 잘못된 세계관에 있었기 때문에, 이 현실을 서로 잘못 바라볼 수밖에 없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보응신학이 뭐라고 했죠? 고난은 반드시 죄로 인한 것이다. 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나누었죠. 욥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죄로인해 고난에 빠질 수 없다. 하나님의 손을 통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에 이어지는 토론의 내용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지속적으로 보응신학의 세계관 속에서 서로에게 이야기합니다.
11장에서 이제 소발이라는 친구가 말을 하죠. 너는 계속 죄가 없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고 하는데, 너가 하나님께서 너를 깨끗하게 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냐. 하나님은 크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니 너가 알 수 없다. 그러니 너는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켜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건져주실 거야.
소발 역시도 욥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의 이러한 말에 욥은 12장과 13장에서 또다시 반박하며 대답합니다.
너는 그렇게 지혜가 많으니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없겠구나. 너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전혀 알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세상에 그를 알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창조하셨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시냐, 그가 그렇게 강하시기 때문에 죄가 없어도 이렇게 고난을 당할수가 있는 것이다.
너희가 알고 있는거 나도 다 안다. 그렇게 지혜가 없지 않다. 나는 하나님하고 이야기할테니, 너희는 쓸데없이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고 나를 내버려두라. 너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내가 정의로운 것을 아시고 나를 정의롭다 하실 것이다.
그러면서 20절부터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에게 손을 대지 마시고, 그 위엄으로 두렵게 하지 마시고, 나를 불러주세요. 그러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제게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도망하지 않겠습니다. 제 죄가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하십니까 제게 알려주세요.
이제 욥의 마음은 하나님께 도전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무죄함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시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14장에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주님, 인간은 유한합니다. 나무는 잘려도 물이 있으면 다시 살지만, 물이 줄어들면 아예 말라버리는 것처럼 인간은 한번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 저를 숨겨주세요. 저는 이 고난을 참아내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주목하지 않으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없어져버리는 것처럼 사람의 희망을 끊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존귀하게 되도 알지 못하시고 비천하게 되어도 알지 못하십니다. 그저 그들이 아프고 슬퍼할 뿐입니다.
욥의 이러한 대답은 하나님이 부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발언이 끝나고, 또다시 엘리바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5장에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말합니다. 너가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너의 입으로 간사함을 내뱉는구나. 너만 지혜로운 사람이냐, 너가 산이 있기전에 처음부터 있던 사람이냐,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너만이 듣고 알고 있느냐. 너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랑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하늘마저도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용납을 받을 수 있겠냐. 내가 알기로는 악인은 분명히 고난을 당한다. 그리고 너처럼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악인들은 반드시 고난을 당한다.
엘리바스의 이야기는 한결같습니다. 너는 지금 너가 죄인인 것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히 대항하려 한다.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바로는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이죠.
욥은 16장에서 다시 엘리바스에게 대답합니다. 너희는 나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고 나를 모욕하고 나를 대적하러 왔구나. 하나님은 나를 부당하게 나의 대적자들에게 던지셨다. 하지만 하늘의 중재자께서는 나의 정의로움을 아시고 계시고 중재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17장에서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제 살날이 얼마 안남았는데 나는 친구들에게 조롱당하고 고통 속에 있구나. 내 희망은 죽음에 있다.
그러자 이제 빌닷이 또 두번째로 자신의 말을 이어갑니다. 너 언제까지 이야기할거냐. 좀 깨달아라.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안좋게 보느냐. 악한자는 분명히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은 상당히 깊을 것이다.
빌닷 역시도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변호하면서 악인은 고난을 당한다는 주장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오늘 본문인 19장이 등장합니다. 빌닷의 말에 욥이 답을 한 것이죠.
너희가 이렇게 계속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너희는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너희가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으나 이건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고난을 주심을 알아야 할거야. 내가 아무리 도움을 구하고 부르짖어도 내게는 아무도 없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시니 내 형제들과 친척들, 아내들, 친구들까지 내 모든 이들이 나를 싫어하는구나.
친구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 어찌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이 말들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이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분명 나에게는 대속자가 계신다. 그가 계시기에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너희는 나에게 원인이 있다고 하며 나를 치려고 하는데, 분명히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
이렇게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오늘의 내용은 어떻게 전개가 되었나요? 욥의 친구들은 지속적으로 욥이 죄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보응신학의 관점을 이어갑니다.
욥은 어떤가요? 욥은 지난주와 같이 보응신학의 인지부조화 속에서 하나님의 부당하심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지난주와 다른부분이 있다면, 욥이 친구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면서 자신의 고난, 특히 그 중에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강조한다는 것을 우리는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한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쩌면 욥에게 지금 가장 큰 고난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외로움이라는 것이죠.
욥에게 지금까지 실질적 고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육신마저도 고통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친구들마저도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자신에게 있지 않은 죄악을 고발한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죠.
그리고 욥은 느낀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도 있지 않음을. 자신이 그렇게 따르고 경배하던 하나님은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의 평생 함께하던 아내도 자신을 싫어하고, 심지어는 위로하러 왔다는 친구들도 자신을 꾸짖고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친구들의 잘못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친구들이 이렇게 공격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죠. 그에게 진실을 마주하게 해서 스스로 변화하여 고난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위로’라는 것이죠.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있죠. ‘너 T야?’ 이 말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뼈있는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이들에게 MBTI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가 사람을 대하여 말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달라도 그 마음 안에 그를 위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위로의 진정한 목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가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위로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욥도 16장에서 그렇게 말했죠.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너희라면 입술의 위로로 근심을 풀어줬을 거다. 욥이 바란 것은 자신의 마음에 힘을 낼 수 있는 진정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위로가 아닌 꾸짖음이었죠. 그러다보니 욥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토론을 빙자한 싸움을 이어나가게 된 것이죠.
분명 처음 이들이 와서 7일간 아무런 말도 못하던 순간과는 180도 다른 분위기로 변해버린 것이죠.
결국 이러한 순간 가운데서 욥은 극심한 외로움이라는 또다른 고난을 겪게 되어버렸습니다.
친구들은 위로의 목적을 가지고 와서 결국 더 큰 고난을 안겨준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주 학년모임때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가져왔었습니다. ‘내가 욥의 친구라면 어떤 대답을 해줄 것이냐’라고요.
제가 그런 질문을 드린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순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욥과 같은 큰 고난이 와서는 안되겠지만, 분명히 크든 작든 고난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겠지만,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도 그러한 순간이 찾아올 수 있겠죠.
그러한 순간 속에 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물론 사랑의 표현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쩌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옆자리에 함께 해주는 것 만으로도 그에게 필요한 것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순간에 나의 생각대로, 내 위주로 행동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행했던 잘못은 무엇이었냐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자신의 생각 하에서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욥에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욥에게는 전혀 옳지 않았죠. 그렇기에 친구들의 말은 위로보다 공격으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나아갈 때, 내가 생각했을 때 옳은대로만 생각하여 나아간다면, 그것은 실제로 옳더라도 그에게 잘못으로 다가가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나아갈 때 그의 마음을 생각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의 상황에서 가장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가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가 스스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겠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친구가 너무 아파하고 힘들어합니다. 제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며 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함께하시며 그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세상에서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릴 죄에서 구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이들로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물론 우리도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는 주님을 알기에 그래도 희망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잖아요? 주님은 그 사랑을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주시기를, 그래서 주변의 주님을 모르는 이들이 주님을 알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욥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대속자의 개념이죠.
욥은 오늘 말씀에서 특별하게 대속자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무죄함, 정의로움을 알고 있는, 그것을 증명해줄 중보자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실 이부분은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 참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을 공격한다고 말하고 있죠.
그리고 고통받는 자신과 부당한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을 변호해줄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존재를 예수님에 빗대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대속자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죠.
이런 해석은 우리에게 정말 큰 은혜를 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죠. 예수님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연결하게 하시는 존재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이 중재자의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욥이 말한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벌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랑을 주시는 분과 같이 우리에게 인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재자는 대체 누구냐.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존재도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렇게 해석하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어떻게 중보하냐 라고 여길 수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이 욥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죠.
욥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죠? 인지부조화에 걸려 있습니다. 고난은 죄인만 당하는 것인데, 나는 죄가 없음에도 고난을 당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신다. 라는 결론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욥은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맺고 더욱 극심한 고통에 놓여있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하나님, 자신과 함께했던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분명 나의 무죄함을, 정의로움을 아실 것이라 여긴 것이죠. 그렇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욥의 말을 통해서 또 다른 한가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대속자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라는 것이죠.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측면도 있으시고, 사랑의 측면도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 두 측면 모두 완전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시면서 정의를 이루시고, 의에 대해서는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그 의를 이루시고, 우리에게는 의를 주시며, 예수님께는 죄의 벌을 행하셨죠. 공의와 사랑을 둘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심판만 하시는 분이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 모든 구속의 계획,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진 모든 계획들은 예수님 혼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모두 계획하셨고, 그것을 성자 하나님께서 행하셨고,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욥의 이 말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심판자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대속자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욥과 같이 인지부조화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욥과 같이 고난을 당함으로 인해 세상에서 진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억까의 상황이 우리 가운데 지속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 가운데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대속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죠.
사실 욥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이런 고통 가운데서 그냥 끝나버리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의는 세워지지 못하고 그냥 끝나버리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죽고 난 이후, 모든 것이 끝나고 난 이후까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통해서 그의 정의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구원한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난 그 때, 주님과 함께 그의 사랑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정의와 사랑이 있기에,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 그곳에 있기에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여러분들의 모습 속에는 세상에서의 것도 누리고 싶은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 좋은 학교도 가고 싶고,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그런 꿈들 꾸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꿈과 소망을 알고 계시기에, 그리고 또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에 가장 최고의 것을 선물해주실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죠. 왜?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고 채워주실 것이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뭘 하라고 하시는거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죠. 세상에서의 잘됨과 그런 것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반드시 채워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오늘은 욥의 고백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들로 보내셨음을, 주님을 모르는 자들이 겪는 외로움을 해결할 이들로 보내셨음을 보았구요,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은 심판자 뿐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가 되심을 보았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 앞으로 시험과 수행평가의 고난이 있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고난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 주님이 여러분들과 함께하심을 잊지 말고, 그 사랑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또한 고통과 외로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 모든 하늘고 친구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