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6주일예배_요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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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하늘의 삶을 살아가라
하늘의 삶을 살아가라
제목: 하늘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
본문: 요한복음 6:1-15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 본문의 상황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봅시다.
본문 말씀은 이 일이 일어난 때가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가까운 때라고 했으니까, 계절로 보면 4월 정도 됩니다. 갈릴리 호숫가의 풀밭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상상해보십시오. 갈릴리 호수 주변은 어디 가나 물이 풍부하고 푸른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있는 우리의 풍경과 유사하게 연상해도 좋습니다. 아마도 군데군데 들꽃들도 피어 있었을 것입니다. 맑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는 가운데 푸른 풀밭에 앉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 한 가운데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겠지만, 진짜 주인공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이 더욱 눈에 띕니다. 바로 예수님과,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닌 어린 아이입니다. 두 주인공은 그 맑고 아름다운 풍경의 화룡정점에 해당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대할 때 언제나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의 성격에 주목합니다. 그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해결해주신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으로서 예수를 기억하고, 그러기에 그분은 진정한 메시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기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사에서 불가능한 어떤 일을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은 한마디로 나눔의 기적을 뜻합니다.
약간의 상황 설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전하는 네 복음서는 공통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의 해법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두드러지게 대비됩니다. 이 대비되는 태도는 빵의 문제, 경제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일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을 보면 당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생각해 낸 것은 딴 데 어디 가서 돈으로 먹을 구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시장의 법칙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무슨 뱃심으로 그런 느긋한 태도를 취했을까요? 예수님의 해법은 바로 나눔의 지혜였습니다. 그 해법의 열쇠를 쥔 주인공이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가 지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거기에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그 어린 아이가 지닌 것을 두고 감사드리고 난 후 나눴을 뿐인데, 오천 명이 충분히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닌 사람이 어린아이였을까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린아이는 순수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생명 본연의 법칙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요한복음의 표현을 따르면, 하늘의 빵 아닙니까? 하늘의 삶을 땅 위에서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 삶을 따르도록 하신 분입니다. 그 삶을 따르면 누구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빵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이치를 몸소 구현하고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인간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전하는 기적의 사건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어린 아이가 등장합니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는 인간들 가운데 함께 하는 예수님의 또 다른 분신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은, 지금 예수님도 그 어린 아이도 모두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빵을 누릴 수 있는 해법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는 그 진실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그 진실을 일깨워주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 어린 아이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가 있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 하늘나라를, 하늘의 생명의 빵을 다시 일깨워 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는 어린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를 가로막는 어른의 세계는 그 순수의 세계를 잃어버린 세계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진실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건을 전하는 요한복음의 전후문맥은 참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굉장히 집요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어린 아이가 안 진실을 사람들은 끝까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말씀의 맨 마지막 구절을 볼까요?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아마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흥미롭게도 그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전합니다.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의 기본에 해당합니다. 백성을 먹여 살리기만 한다면, 경제를 살리기만 한다면, 다른 불의나 폭력은 다 무마됩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경제 살리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을 때 언제나 그것을 자신의 성과로 내세우기를 즐겨합니다. 백성들은 그 성공을 그 통치자의 덕분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무리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이 당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낌새를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 하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나 어떤 지위나 권력을 얻기 위해서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를 사람들이 깨닫고 그 하늘나라를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 진실을 모르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합니다.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늘의 양식, 하늘의 삶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기어코 그 진실을 말씀으로 설파하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이 살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것과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고통스러운 길을 억지로 참고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함께 생명을 구가할 수 있는 순수의 삶, 하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생명의 질서를 인간의 삶 안에 구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진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떠난 사람이 있다고 전합니다(요한 6:66). 다 떠나고 열두 명만 남습니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을 때 열광했던 오천 명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단지 열두 명만 남았습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빵을 설파하신 말씀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해 준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빵, 곧 이미 인간들 가운데 있는 하늘의 삶을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그 점에서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누군가가 베풀어준 것을 받아먹는 데는 익숙하지만 이미 자기 안에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는 혹하고 그 주변에 운집하지만 정작 예수를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빵을 얻어먹는 것만 가르치는 교회의 잘못 때문이며, 자기 몫을 챙기는 것에 능한 사람을 능력있는 사람으로 대접하는 세상의 잘못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더 긴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있는 생명의 빵을 함께 나누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를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생명의 기운, 서로 기운을 나누는 삶을 몸소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베푸신 그 하늘의 삶을 맘껏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