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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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론]
최근에 뉴스를 보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택시가 뉴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시험비행이지만 2년후면 본격적인 운행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 영화에서나 볼법한 일이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운전할 필요가 아에 없는 완전 자율주행차도 머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통사고를 현저하게 줄일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뿐입니까?
인공지능의 발달로 이제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지 쉽게 답을 얻을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의학기술도 엄청나게 발전해서 인간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기대수명이 남녀 평균 82.7세라고 하니 참 놀랍기만 합니다.
이처럼 문명을 발전시키는 인간의 능력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핑크빛이기만 할까요?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고, 우리의 기대와 예상대로만 흘러가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 세월호 참사로 인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왜 이태원 참사로 인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왜 팔레스타인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으로 고통을 겪어야만 할까요?
기술적인 면에서는 설명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알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최악의 전염병인 코로나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기후위기때문이라고 추측은 하지만 진짜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죽어야했는지 알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제가 아는 친구는 새벽예배 가다가 사람을 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다친 분은 평생 전신마비로 살아야했고, 그 친구는 결국 감옥에 갔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착하고 신앙 좋은 친구인데 왜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또 하필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답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방황하게 됩니다.
그것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바로 철학과 종교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의문투성이이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할까요?
[본론]
먼저 오늘 본문인 욥기 28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은 욥이 현재 큰 고난을 겪는 이유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무 이유없이 고난을 주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세상을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세계관으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 반박한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겪는지 알수 없다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을만큼 심각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친구들과 논쟁하는 이야기가 27장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29장부터 31장은 욥의 마지막 주장이 등장합니다.
그 앞에 바로 끼어있는 장이 바로 오늘 말씀인 28장입니다.
28장은 욥이 지혜를 향해 찬양하는 시라고 말합니다.
그럼 욥은 계속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다가 왜 갑자기 지혜를 찬양하는 것일까요?
욥이 주장하는 지혜와 친구들이 주장하는 지혜의 차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주장하는 지혜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말합니다.
이것을 잘 알려주는 성경책이 잠언이죠.
그러나 여기서 욥이 찬양하는 지혜는 다릅니다.
여기서 욥이 말하는 지혜란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지혜란 인간이 노력해도 찾을수 없습니다.
1-4절입니다.
은을 캐는 광산이 있고, 금을 정련하는 제련소도 있다. 철은 흙에서 캐어내며, 구리는 광석을 녹여서 얻는다. 광부들은 땅 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땅 속이 아무리 캄캄해도 그 캄캄한 구석 구석에서 광석을 캐어낸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 사람의 발이 가 닿지 않는 곳에, 사람들은 갱도를 판다. 줄을 타고 매달려서 외롭게 일을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은 좋은 것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깊이 숨겨진 금, 은, 철, 구리등 각종 광물들을 캐내고 찾아내는게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줄 하나를 몸에 달고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라도 광물을 깨냅니다.
광물뿐이겠습니까?
보석은 더욱 그러합니다.
5-11절입니다.
땅 위에서는 먹거리가 자라지만, 땅 속은 같은 땅인데도 용암으로 들끓고 있다. 바위에는 사파이어가 있고, 돌가루에는 금이 섞여 있다. 솔개도 거기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매의 날카로운 눈도 그 길을 찾지 못한다. 겁없는 맹수도 거기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고, 무서운 사자도 그 곳을 밟아 본 적이 없다. 사람은 굳은 바위를 깨고, 산을 그 밑 뿌리까지 파들어 간다. 바위에 굴을 뚫어서, 각종 진귀한 보물을 찾아낸다. 강의 근원을 찾아내고, 땅에 감추어진 온갖 보화를 들추어 낸다.
용암이 들끓고 있는 땅속 깊은 곳까지라도 가서 어떻게든 보석을 찾아내는게 인간입니다.
사파이어와 금이 있는데 왜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짐승들은 아무리 눈이 좋아도 아무리 힘이 세도 보석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것의 가치를 모를뿐만 아니라 감춰진 것을 찾아낼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바위 속에 감춰진 것, 산 밑에 감춰진 것, 강바닥에 감춰진 것까지 다 들춰서라도 보석을 찾아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제가 설교초반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화려한 문명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빠르고 놀라운 문명의 발전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영화속에서 보던 것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는 세상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느때보다도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모르는 길도 찾을수 있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습니다.
모르는 식물의 이름도 알수 있고, 통번역도 다 해줍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통제할수 있을까요?
인간의 능력과 지식, 지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진, 태풍, 홍수와 같은 수많은 자연재해를 통제할수 없습니다.
최근 수많은 사람들이 걸리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도 우리는 통제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고난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해석할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의 문제들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신앙이 있다고 믿음이 있다고 피해가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욥기와 같은 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잠언처럼 우리에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의 이해와 능력을 넘어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욥기처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를 알려주는 책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12절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에서 얻으며, 슬기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이 질문은 28장을 이해하는 핵심 문장입니다.
이 문장이 20절에서 또한번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니 빨간줄 그으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은 욥의 질문이며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알기 원하는 욥의 부르짖음이자 우리의 부르짖음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지?
왜 내가 이 사람을 만나 이 고통을 겪고 있을까?
우리 삶에도 해석되지 않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수 있을까요?
둘째, 하나님의 지혜란 인간이 아무리 부유해도 살수 없습니다.
13-14절입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지혜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한다. 깊은 바다도 “나는 지혜를 감추어 놓지 않았다”하고 말한다. 넓은 바다도 “나는 지혜를 감추어 놓지 않았다”하고 말한다.
먼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찾기 어려운 이유는 지혜를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찾으러 깊은 바다도 가보고, 넓은 바다도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가 말합니다.
‘나는 지혜를 갖고 있지 않아~’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속을 알수 없는 깊은 바다, 끝을 알수 없는 넓은 바다를 살펴봐도 지혜를 발견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깊고 넓은 바다와 같이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찾으려합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끝에서 발견할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그 곳에 하나님의 지혜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찾기 어려운 또다른 이유는 지혜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15-19절입니다.
지혜는 금을 주고 살 수 없고, 은으로도 그 값을 치를 수 없다. 지혜는 오빌의 금이나 값진 루비나 사파이어로도 그 값을 치를 수 없다. 지혜는 금보다 값진 것, 금잔이나 값진 유리잔보다 더 값진 것이다.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수정보다 비싸다. 지혜를 얻는 것은 진주를 가진 것보다 값지다. 에티오피아의 토파즈로도 지혜와 비교할 수 없고, 정금으로도 지혜의 값을 치를 수 없다.
그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지혜의 값과 비교할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를 돈으로 살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란 너무 귀해서 돈으로 따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삶에서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지혜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무지와 교만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그 어떤 것을 포기하더라도 지혜를 붙잡으려 합니다.
인간이 교만하다보니 그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난이 그것의 좋은 통로가 됩니다.
욥 역시 이런 고난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신비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부조리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이해할 수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굳게 살아갈수 있는 믿음을 얻는 과정입니다.
22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재밌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멸망의 구덩이와 죽음도 지혜를 두고 이르기를 “지혜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하고 말한다.
심지어 죽음을 앞둔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죽으면서도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니 돈가방을 놓지 않으면 자기가 타죽는데도 그 돈가방을 놓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깊고 넓은 바다와 달리 죽음은 지혜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수 있을까요?
셋째,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만이 어디있는지 아십니다.
23-27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가 있는 곳에 이르는 길을 아신다. 그 분만이 지혜가 있는 곳을 아신다. 오직 그분만이 땅 끝까지 살피실수 있으며,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다. 그분께서 저울로 바람의 강약을 달아 보시던 그 때에, 물의 분량을 달아 보시던 그 때에, 비가 내리는 규칙을 세우시던 그 때에, 천둥번개가 치는 길을 정하시던 그 때에, 바로 그 때에 그 분께서 지혜를 보시고, 지혜를 칭찬하시고, 지혜를 튼튼하게 세우시고, 지혜를 시험해 보셨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디서 온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분명 이런 커다란 고난과 고통을 겪을만큼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단 한가지만큼은 확신합니다.
하나님만은 그 이유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수 없는 땅과 하늘을 만드신 분입니다
종잡을수 없는 바람과 물, 비, 천둥번개도 그 분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욥도 우리도 이 모든 피조물들이 그 분의 손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을 창조하시던 그 때부터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보시고, 칭찬하시고, 세우시고, 시험하셨습니다.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욥의 친구들 역시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주장했습니다.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너한테만 이유없이 고난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유없이 고난을 주신다면 하나님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주장은 다릅니다.
욥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는 더 커서 우리가 전부 이해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의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유가 있어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이유가 없이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기에 그렇기에 오히려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이해할수 있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내가 이해할수 없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밀스럽고 신비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부조리의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세월호의 학생들을 구해주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는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는 자에게 주어진 태도는 무엇일까요?
28절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
욥의 이 말이 친구들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의도와 깊이는 전혀 다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자신들이 모두 아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욥이 고난을 겪는다면 분명 죄를 지은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달랐습니다.
욥은 겸손했습니다.
욥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말하는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수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처럼 우리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 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악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그 분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수 있을까요?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지혜는 찾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때로는 이해할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까닭모를 고난을 겪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부조리한 세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를 의지하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의 생각과 지혜로 끝없는 혼돈 속에서 살아갈래?
아니면 내 지혜로 믿음 속에서 살아갈래?
하나님의 지혜 안에 우리를 향한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주님 지혜를 믿고 이 거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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