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에서 생령이 되게 하시는 임재
Notes
Transcript
<광고>
예배 순서에 대한 약간의 변화가 있음,
*말씀-결단찬양-기도제목1-기도제목2-축도-송영
<기도>
참으로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삼위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축복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예배의 자리가 우리에게 더 없는 하늘의 복임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깊이 만나게 하옵소서. 죄된 세상 속에서 아직 주님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다면,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옵시고, 온전히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옵소서.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주님, 우리의 삶이 거룩한 주일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안식하기 원합니다. 오늘을 살며, 모든 세상적인 탐욕을 그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쉼과 만족을 얻는 하루 되게 하소서. 또한 무엇보다도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원리들을 일상의 삶과 연결시켜 주옵시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구별하여 드리는 헌금을 귀히 받아주시며,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데 힘 있게 사용되게 하소서. 이 시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를 주 안에서 온전케 하심을 믿으며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와 이 시간의 주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에스겔 37장 4-12절
제목: 사망에서 생령이 되게 하시는 임재
샬롬. 오늘 여러분들과 3가지 대지로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 제목과 같이 왜 생령의 삶이 필요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비전과 같이, 우리 또한 비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함을, 세 번째로는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이러한 비전을 선포 해야함을 나눕니다.
1. 생령의 삶
2. 비전에 대한 믿음
3. 믿음의 선포
생령의 삶
먼저 생령의 삶이 무엇입니까. 본문 9-10절을 봅시다.
에스겔 37:9–10 (NKRV)
9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오늘 제목에서 생령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생기있게 되살아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나고, 큰 군대로 지칭되는 이들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실제 모습으로 표현하면 무엇과 닮았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같죠. 에덴 동산 때 모습과 같죠. 생령이라는 단어가 이때 정확히 등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우리가 죄로 타락하기 전의 모습이 사실 이와 같은 생령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에스겔의 되살아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재창조와 같은 거죠.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적인 삶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셨죠. 또 오늘날은 성령 하나님께서 삶을 지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삶에서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어떠한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을 주십니다. 설령 우리 삶에 죽음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숨이 넘어간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관념이 아닌, 내 삶이 되는 거죠. 바로 이것이 생령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이러한 생령의 삶, 성령의 충만한 삶에서 많은 부분이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한편으로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많이들 애씁니다. 그러나 동시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이원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에 몰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깐요. 영적인 일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원론적인 모습을 갖고 사는 겁니다. 반대로 사역자를 제외한 성도는 일상의 삶 속에서 영적인 것을 붙잡고 사는 삶이 어렵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께 질문하고 답을 듣는 삶,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고백하는 삶을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랑이 너무 거셉니다. 그래서 현재의 구조에서 목회자와 성도는 서로 가까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의 교통 속에서 이러한 이원화가 극복되어 가는 겁니다. 목회자도 세상과 육을 더욱 이해하고서, 영적인 삶을 도전하게 되구요. 성도들 또한 세상을 살아가되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듯 생령의 삶은 이원론적인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누리며 살아가는 겁니다. 영과 육이 온전히 통합되어서, 진정 내가 살아있다는 감정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꿈꾸는 바들이 이뤄지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보여주시는 것들이 이뤄지는 삶입니다. 또 왜 내 가슴이 박동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삶입니다. 내 삶의 이상적인 삶을 꿈꾸고 그리되, 오늘 그러한 이상적인 삶을 동시에 맛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한편 생령의 삶은 또한 동시에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성은 단순히 성전주의, 건물 안에서의 교회만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늘 지역성과 내가 몸담은 교회 안에서 시작됩니다. 영과 육이 통합되듯 공간의 거리감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1차적으로는 우리 교회 안에서 누려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 양육, 전도, 기도, 목장 모임 등 다양한 가치들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고, 또한 동시에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들이 꽃피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배의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 자리를 채웁니다.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위해서, 또 다른 이들도 그러한 만남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러한 예배는 공기부터 다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정돈되어 있고 따스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마음의 감동이 있다면 일어서 찬양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며 전인격으로 반응하며 찬양합니다. 다윗처럼 춤을 추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나아갑니다.
또 이어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우리의 전인격이 더욱 하나님과 서로를 향해 가까워짐을 누립니다.
그리고 일상을 살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이 넘쳐 흘려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사랑과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 전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예배의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생령의 삶을 소망하면서 예배의 회복, 예배의 승리로부터 시작합시다.
2. 비전에 대한 믿음
오늘 본문은 두 장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환상입니다. 비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에 대한 해석과 현실에 대한 명령입니다. 본문의 환상은 무엇입니까. 마른 뼈들이 가득합니다. 그냥 뼈가 아니라, 생명과 생기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바싹 마른 뼈 무덤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이것이 살아날 수 있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단단한 믿음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다음 말씀을 주십니다. 4-6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에스겔 37:4-6 (NKRV)
4...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과 아주 다른 것인 이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선지자죠. 선지자는 원어로 ‘나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나바’라고 말합니다. ‘나비’, ‘나바’ 비슷하지 않습니까.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나비’가 하는 일이 ‘나바’인 겁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나바’가 본문에서는 ‘대언하다’입니다. 그러니 대언하는 이 일은 선지자 에스겔의 정체성과 같은 일입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선지자일 수 있고, 여러분들도 선지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한편 이 ‘대언하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대부분, “예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언한다는 것은 주로 미래의 일 아닙니까. 미래라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만 미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기에, 미래는 하나님의 일상과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알도록 미래를 계속해서 들려주시는 겁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구나.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다시 우리가 본문을 한번 더 띄워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봅시다. 에스겔은 대언하고 예언하는 사역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외칩니까. 뼈들을 향해서, 들어라고 말해야하고,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리라 말해야 합니다.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히며 생기를 넣어 살아나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에스겔이 이 말씀을 정말 믿을 수 있느냐입니다. 말을 하긴 하는데, 그 자신도 믿지 못하면서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뼈에게는 귀가 없습니다. 그러나 들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뼈에 생기가 들어가는 것이 핵심인데, 그냥 들어가지 못합니다. 힘줄이 생기고 살이 채워지고 피부가 덮혀야 비로소 생기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 과정 모두가 우리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 전부입니다.
저 또한 우리 공동체에 대해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VISION 2026이 있습니다. 약 3년간의 비전입니다. 조금 풀어내자면, 24년에는 우리 안에 부흥을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25년은 또 다른 부흥을 갈급하는 한국의 한 교회를 섬기는 겁니다. 26년에는 해외의 한 곳을 섬기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들 각 사람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이 비전의 핵심 키워드는 ‘충만’입니다. 여러분 각 사람을 채우시고, 이웃을 채우시고, 열방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선 우리의 양적 성장의 목표는 300명입니다. 내년도는 약 80명, 25년에는 150명, 26년에는 300명이라고 잡았습니다. 그냥 잡은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내면에 계속 울리는 숫자가 300명입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군사와 같이 우리는 지극히 미약하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용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숫자이지만, 세상과 열방과 비교하는 너무나 작은 숫자입니다. 열방 가운데 사용하실 300명이 우리의 목표이자 비전입니다.
이것을 저부터 믿지 않는다면 말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얼떨떨합니다. 정말 26년에 300명이 될 수 있을까. 마음 한 켠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젠가는 300명이라는 숫자를 허락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것조차 믿기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에게 제가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편 놀라운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일하심의 조짐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VISION 2026과 같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기대하길 소망합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오늘 에스겔 37장의 말씀과 같이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러한 역사가 있을 겁니다. 이미 임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여운)
이러한 일은 분명히 단회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에스겔의 비전에서도 먼저는 몸의 회복이 있습니다. 여전히 놀라운 것은 그냥 흙에서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흙에서 사람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3:8).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결단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결단코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러한 선언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생기를 넣으셔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인데, 먼저는 몸을 만드시는 겁니다. 뼈에 힘줄, 혈관, 림프선, 신경 망 등 모든 줄기들을 입히실 것이고, 세포와 각 장기들을 채우실 겁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피부까지 입히십니다. 물리적인 풍성함이 반드시 있는 거죠.
우리 각 사람들에게, 또 우리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을 분명히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축복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실패함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와 같이 살아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더욱 궁극적인 것은 생기가 들어가는 겁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그리고 거듭해서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생기는 루아흐로 사실 ‘성령’과도 동의어입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안에 성령의 임재가 함께 해야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 성령의 임재를 강력하게 간구하십시오.
이것이 본문의 비전이자, 또한 우리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비전입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나도 똑같이 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기에 늘 안전함과 평안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깊이 사모합시다.
3. 믿음의 선포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를 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비전은 아직 우리의 꿈과 같은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늘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또 이어서 에스겔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과 선지자의 말이 늘 교차했습니다. 하나님-선지자-하나님-선지자-하나님-선지자 이렇게요. 그런데, 이제 다시금 하나님께서 11절에서 말씀하시는데 14절까지 말씀하십니다. 왜 에스겔은 어떠한 말이 없을까요? 왜 에스겔의 대언은 없을까요?
이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비전 안에서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현실이 아닙니다. 11-14절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이제 대언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에게 비전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지자도 이 비전을 믿어야 하니깐,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신 겁니다.
참 하나님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냥 일하시면 되는데, 굳이 저와 여러분들을 함께 불러서 같이 하십니다. 꼭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열방 가운데 일하셔야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을 사용해서 열방을 치유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1-14절에서 그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사실 우리의 비전2026 보다도 더 거대하고, 더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일인지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쫄딱 망했습니다. 지난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말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쫄딱 망했습니다. 나라의 모든 인재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로 모조리 끌려갔습니다. 고국 이스라엘는 못 배운 사람들, 몸이 약한 사람들, 재능과 기술도 전혀 없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한 나라의 문명이 수백년은 후퇴한 느낌일 겁니다. 그렇다고 나라의 인프라가 괜찮냐 아니요. 모든 성읍들은 부서졌고, 이들의 정체성인 성전도 완전히 부서졌고, 성전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인 법궤며, 모든 물품들이 이때 이후로 행방이 묘연합니다. 완전한 상실이죠. 완전히 황폐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국의 지배 속에서 1000km 이상 끌려온 이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물자와 인프라가 없는데 재건되는 것 또한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 이들이 황량한 땅을 개척해서 먹고 사는 일, 생존조차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굉장히 짧은 기간 안에 다 이뤄내십니다. 페르시아 초대 왕인 고레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귀향해도 좋다는 칙령을 받습니다. 성전의 재건 또한 포함된 칙령입니다.
성전이 먼저 재건되고, 그리고 이 성전을 지키는 예루살렘 성벽까지 재건됩니다. 예배의 회복과 더불어 이들의 삶의 회복 또한 이뤄집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전과 예배의 회복은 힘줄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산소와 양분들이 전달되는 겁니다. 핏줄과 림프선과 신경망들을 포괄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예배의 회복이 또한 일상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살과 장기들이 생성되고, 피부가 덮히는 것이죠. 예배를 이어 일상의 회복이 하나님의 순서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어그러짐이 있다면, 예배 안에서 회복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비전을 성취하셨습니다. 당신의 비전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전의 삶을 도전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의 회복을 도전하십니다.
여전히 어렵고 두려우십니까. 본문의 12-13절을 봅시다.
에스겔 37:12–13 (NKRV)
12...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본문에서는 이러한 회복을 표현함에 있어서,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보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이러한 힘줄과 살이 채워지고 피부가 덮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미 영적으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감에 있어서 모든 준비를 마쳐놓은 것과 같습니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러한 주님의 사역을 증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무덤에 가실 때에,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셨다고 말합니다(요 11:38). 여기서 말하는 비통함은 “꾸짖고 나무라다”는 뜻을 가집니다. 문맥과 조금 어색하지요. 무덤으로 가시는데, 화를 내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망을 향해서 분노하시는 겁니다. 에스겔의 본문처럼 사망의 무덤을 열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 나오게 합니다. “거기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여운)
우리는 이러한 성취을 기반으로 궁극적인 성령의 임재를 다음 주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통해서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주는 충분한 근거와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고 우리더러 현실에서 선포하라는 겁니다. 이미 궁극적인 회복을 예수님께서 다 보여주셨고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겁니다. 이미 주님께서 고속도로와 같은 길을 다 예비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선포함이 중요합니다. 이미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제 12절의 말씀과 같이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와 같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가 살아나리라” 사망에서 생령이 되게 하시리라! 할렐루야. 아멘.
<정리, 및 반주자에게 사인>
여러분, 생령의 삶의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 위에서 경험하는 천국의 삶입니다. 정말 너무 좋습니다. 게임, 웹툰, 성, 성공 등 어떤 즐거움과 기쁨도 여기에 비할 수 없습니다. 생령의 삶을 소원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입술을 열어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는 삶, 이것으로도 다 표현되지 않는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삶,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삶입니다. 예배부터 이러한 임재를 소망합시다. 예배에서 승리합시다.
여러분, 또한 비전에 대해서 믿음으로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이 비전의 삶은 우리의 인생의 관점을 바꿉니다. 그 비전 위에 올라가는 삶 사시길 축복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할 때에, 그 어떠한 비전이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처럼, 믿음으로 선포할 때에 현실 속에서 역사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바로 여러분들의 입술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의 혀를 사용하시고, 여러분들의 언어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함께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함께 <부흥>이라는 곡 찬양하겠습니다.
기도제목1. 예배의 회복, 예배 안에서의 승리함을 경험케 하소서. 주일을 온전히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경험하는 안식을 허락하소서.
기도제목2. 일상의 회복, 주일의 말씀과 일상 속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한 주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모든 날들이 주님께 거룩하게 드려지게 하옵소서.
*말씀-결단찬양-기도제목1-기도제목2-축도-송영
사랑의 하나님, 이들의 온전히 축복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게 하시고, 믿음으로 삶의 자리에서 선포하게 하소서.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우리를 초청하시고, 주님의 기쁨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 주님께서 받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