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3 양청] 99-100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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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여러분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간구라고 생각을 한다. 무엇인가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구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도를 간구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기도에 대한 강조점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것은 두 가지 굉장히 중요한 본질을 말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이다.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자식과 부모.
두번째로는 기도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한다고 생각하지만 기도는 교회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오해들이 이번 기회에 좀 교정될 수 있으면 좋겠다. 특별히 지난 독서모임 때 했었던 책이기도 한데, 이정규 목사님이 쓰신 책인 “예수님의 기도학교" 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번쯤은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99문. 하나님은 기도에서 우리를 지도하시기 위하여 어떤 법칙을 주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는데 유용하지만, 기도를 위한 특별한 지도법칙은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기도형태로서 보통 주기도문이라고 불립니다.
100문. 주기도문의 서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답.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주기도문의 서문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가듯이 모든 거룩한 경외와 자신감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고 기꺼이 도우시려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성경 전체가 다 기도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특별히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그것을 우리가 이제 중점적으로 볼 것인데, 먼저 구조부터 살펴보자. 교재의 1번의 B를 보면, 주기도문은 서문과 6개의 간구와 맺는 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 서문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1번의 A를 함께 읽어보자. “은혜의 수단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고 기도는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방금 읽은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외적 수단에 대해 배우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외적 수단 3가지가 무엇인가? 말씀, 성례, 기도. 그런데 이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었는가? 바로 말씀이다. 말씀은 구체적으로 내용을 가르쳐주는 것이지만,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시청각적이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말씀보다 성례를 중요하게 여겨서 미사는 늘 하지만, 실제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도 같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성례가 말씀을 통해 깨달았을 때 더 의미가 있고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눈물 콧물 쏟아가며 펑펑 울며 기도한다거나, 방언기도로 몇 시간 내내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말씀에 이끌림을 받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잘 한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믿는 도리를 잘 깨달아야 기도가 깊어지는 것이다. 말씀에는 무지하면서 기도가 깊어질 수 있나?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말씀에 이끌리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지난 주에 우리가 배운 대로 이교도들의 기도, 불신자들의 기도와 하나도 다르지 않는다. 우리가 울며 불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뭔가 속에 감정적인 만족과 체험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말씀의 이끌림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자들이 하는 기도나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이 하는 기도나 무당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나 다 똑같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자들의 기도는 다 동일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은 아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내가 바라는 것을 해결해주며,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 그것만 내내 부르짖는 것이다. 그 기도가 때로 응답되지 않자 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뭔가 공을 들이고, 더 기도빨 쎄 보이는 사람에게 찾아가 기도도 받아보고, 때로는 금식도 해보면서 내 쪽에서 뭔가를 함으로서 신을 감동시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 이런 기도의 형태들이 모두 우상숭배의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릴 때, 우리의 기도는 정제되고 정결해지며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를 이끌어야만 하는 것이다.
99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런 면에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는데 유용하다. 그럼에도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라는 점에서 기도에 관한 정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알다시피 주기도문이라는 명칭 자체가 조금 어패가 있는데, 주님의 기도문이라는 의미이다. 영어로도 LORD’s PLAYER, 주님의 기도인데, 사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신다. 왜 그러한가?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죄를 전혀 지으신 적이 없고 알지를 못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위해 성부께 드리신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하나의 샘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정확하게 이 주기도문의 1부터 7 형식까지 똑같이 따라서 기도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 원칙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처음 6개는 간구, 그리고 맺은 말, 이러한 형식으로 여러분 교재 2번을 보시면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했다. 함께 읽은 100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주기도문의 서문은 “마치 자녀들이 아버지께로 가듯” 이라고 설명한다. 아들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가는 것처럼, 육신의 아버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으시는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께로 우리가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표현을 하셨다. 마태복음 6: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 본문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6 장을 찾아보자. 마태복음 5-7 장까지를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하셨다고 해서 산상설교, 혹은 산상보훈 이라고 한다. 그런데 6:1을 보면 너희가 구제할 때에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하라고 하셨다. 위선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5절부터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다 보니까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 더 거룩하게 기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말고, 오히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 가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죄악된 심성은 골방에서조차 사람들이 나를 봐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내가 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동네방네 사람들이 다 알도록 드러내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게 죄인의 본성이다. 나는 주님의 말씀 따라 골방으로 기도하러 혼자 들어간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탄과 같이 들어간 셈이다. 기도라는 것이 바르게 사용하면 은혜의 방편인데, 오히려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며, 내 의를 높이는 사탄의 통로 역할도 할 수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네 경건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만큼 사람을 의식하기가 참 쉬운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신다.
그러고 나서 6:9부터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니까 그 앞에서 설명하시는 기도들은 다 무엇인가? 그건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방식이다. 그들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말씀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는데, 주기도문이 등장하기 직전의 말씀인 마태복음 6:8 을 함께 읽어보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방의 우상숭배자들은 자신들이 말을 많이 한다든지, 큰 소리로 반복해서 공을 들여야 그들의 신이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미처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신다고 했다. 주기도문은 이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제가 예전에도 한번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성부께 기도하실 때는 늘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 한번, 성부께 기도하실 때 아바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던 적이 있다. 언제였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주님은 친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죄인의 자리에 서셨던 것이다. 하늘 영광을 포기한 채로 철저한 죄인으로서 죽으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예전에 책을 보다가 어떤 저자가 자기 책에 이런 표현을 썼던 것이 인상에 남았다. “하나님은 마케팅을 잘못하신 것 같다" 라는 표현이었는데, 이유인즉 저자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자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버렸으며, 자신이 어릴 때 그 술주정뱅이 아빠마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단다. 따라서 아빠라는 존재는 자기에게 웬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자신은 영 별로였단다. 이왕이면 하나님 엄마라고 부르면 더 좋겠단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의 육신의 아버지가 선하고 인자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본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서 8:15 를 찾아보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에게 성령께서 임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맞아주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모든 특권을 누리게 하신다. 또한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누리는 평안, 안식, 사랑등을 누리게 하신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함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기도를 통하여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만큼이나 우리에게 벅차고 감격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감격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3의 A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성경은 언제나 공동체적으로 말씀한다. 따라서 기도 역시 개인의 기도 보다는 공동체의 기도이다. 개인이 기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기도, 교회의 기도이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 아버지" 라고 하셨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과 나의 관계”라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독대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이어갈 수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고 영생을 누리며, 내가 기도함을 통하여 나와 한 몸된 아버지와의 연합을 누린다. 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함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며 그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과 한 형제됨을 누린다.
오늘날 뉴스에는 비윤리적이고 폐륜적인 가정들 소개가 많이 나가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처럼, 나도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형제들에게 베풀고, 나와 같은 “하늘 아버지"를 고백하는 주의 몸된 교회를 품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는 사실상 없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묶어주신 교회 안에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다.
CCM 중에서도 이런 찬양이 있지 않나?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생각보다 이 노래 좋아하는 사람 많다. 들으면 기분 좋지 않나?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말에 때로는 힘이 되질 않던가?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서 누가 되길 원하시는가? 누군가로부터 기도의 힘을 받길 원하는 누군가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기도의 힘을 전해주고 싶어하는 누군가인가? 여러분이 한 아버지를 모시며,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 이것이 사실 너무나도 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바로 이러한 기도이다. 영생은 더불어 사는 것이고, 기도는 더불어 사는 자녀들의 기도이다. 함께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의 아들딸들의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도의 요소들이 있다면 계속해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왜 내려놓을 수 있는가? 아까 우리가 마태복음 6장에서 살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구하기도 전에 아신다.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아이고 내가 오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느라 정작 나를 위해서는 기도를 못했네. 내일부터는 남보다는 나를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되겠다”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아시니까. 이미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지, 무엇이 나에게 가장 선한 길인지를 이미 하시니까. 그러니 내 개인적인 기도, 그렇게 많이 안해도 된다.
그런데 내가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건 어떨까? 내 기도의 시간 중에 형제를 위해 울며 기도하는 그 귀한 시간, 내 사랑하는 지체를 위해 눈물쏟아가며 기도하는 그 시간을 하나님이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당연히 아신다. 내가 내 친구를 잘 안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비할 수 있으랴.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지금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주의 종들과 그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길 기뻐하신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기도로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화목하면 부모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게 기도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디모데전서 2:1–2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도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다. 그런데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왜 사도는 나라의 왕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는가?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라가 좀 평안해야 신앙생활하기도 좋다. 요즘 정치나 경제 뉴스를 보면 암걸린다는 표현들을 자주 쓰더라. 위정자들이 하나님 주시는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얼마나 좋은가? 따라서 우리가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참 중요한 일이다.
적용을 보자. 말씀을 깨닫는만큼 기도가 성숙한다 했다. 이를 결코 놓치지 말라.이를 위해서 체계적으로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또한 기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서 드리는 것이다. 내가 뭔가 정성을 쏟아야만 하나님 들으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뭔가 소리소리 질러야만, 내가 뭔가 작정기도나 철야기도를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내가 신실히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됨이라는 신분이 기도응답의 근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잘 살았는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여러분의 기도가 공동체의 기도, 공동체를 위한 기도, 공동체에 의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도를 통해서 살아나고 살아난 교회는 기도를 또 낳습니다. 기도가 교회를 교회답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간다고 할 수 있다. 명성교회 다들 아시지 않나? 그 교회가 그렇게 부흥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새벽기도였다. 새벽기도회가 3부, 4부 이렇게 되어 있단다. 그렇게 온성도들이 함께 기도에 힘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청년 여러분, 우리도 기도에 힘써야 한다. 기도에 분발해야 한다. 함께 모여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우리 교회를 위해, 우리 청년부와 우리 지체들을 위해 함께 힘껏 부르짖는 기도가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새벽에 못일어나면 어떠한가? 여러분에게 기도할 수 있는 교회당이 있다는 것, 기도할 수 있는 처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퇴직하신 분들이 낮에 오셔서 몇시간동안 뜨겁게 기도하고 가신다. 화요일이나 목요일 저녁에는 직장 퇴근하신 집사님들끼리 모여서 기도회를 가지신다. 직장다니시는 분들 중에서도 점심 빨리 먹고 잠시 교회 들러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들도 계신다. 물론 그런 태도가 응답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기도를 사모하는 분들을 하나님께서 더 예뻐하시지 않겠나? 기도에 대해 배우면서 더욱 기도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저희들에게도 기도의 갈망을 주시고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과 만족을 늘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기도의 자리가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많아지게 하여 주셔서 기도가 교회를 세워가는 중요한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고 또 그렇게 교회가 지어져 가며 또 깊은 기도의 사람들 또 함께하는 기도가 풍성해지도록 그래서 이 세상을 살리는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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