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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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독하리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한 해를 시작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매년 그러합니다. 그런데 성경통독에는 항상 저의 결연한 다짐을 방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족보와 규빗 이야기입니다. 왜 이 부분만 되면 그렇게 딴 짓을 하고 싶은지요. 그렇게 딴 짓들 속에 은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찾은 은혜가 바로 그렇게 발견한 은혜입니다.
서론
서론
오늘 살펴볼 본문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함께 성소의 설계도면을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성소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며 하늘에 있는 본체의 그림자이자 모형이라고도 표현됩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시는 장소였습니다. 성소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신다는 임재의 상징과 함께 백성들의 눈에 보이는 증거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지어 10여평 남짓한 천막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소에 거하신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함과 동시에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성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기에 영광과 거룩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궤를 그곳에 두라고 하십니다. 이 궤는 성경에서 법궤, 언약궤, 증거궤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의 돌판이 있었습니다. 이 궤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지극히 영광스럽고도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궤를 만드는 데에 쓰인 나무를 성경은 ‘조각목’ 이라고 말합니다.
조각목
조각목
조각목은 조각조각 합치기 쉬운 나무, 조각할 때에 쓰는 나무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쉬타 혹은 싯딤 나무인데 이 나무를 중국 성경으로 처음 번역할 때에 비슷한 나무를 찾다보니 조각자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서 조각자나무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중국어 성경을 다시 한 번 번역했기 때문에 조각자나무를 조각나무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 나무의 정체는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쭉 뻗고 흰 꽃이 아름답게 핀, 꿀로 유명한 아카시아 나무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아카시아 나무의 바른 표현은 아까시 나무라고 하는데 가짜 아카시아나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 속 아카시아 나무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종류입니다.
성경에서 언급된 아카시아 나무는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아주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촘촘하며 두꺼운 나무껍질을 가지고 있고 수분을 보존하기 위해 높게 자라지 않으며 마른 가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각 가지에는 4-10센티미터에 이르는 가시가 촘촘히 박혀있습니다. 크지 않은 키와는 반대로 사막에서 지하수를 찾기 위해 그 뿌리는 수십 미터에서 최대 수 키로미터까지 아주 깊게 뻗습니다.
이런 아카시아 나무는 사막의 불규칙적인 날씨 때문에 휘기도 하고 말라서 볼품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나무가 단단해서 세월이 지나도 휨이나 변형도 적고 좀이 슬지 않아 애굽에서는 관을 만드는 데에 이 나무를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또한 성소와 성물을 만드는 데에 쓸 만한 재료로는 이 조각목이 가장 합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드는 것은 단순한 천막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이 때 당시 애굽에서는 이미 레바논에서 훨씬 곧고 좋은 재료인 백향목을 수입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백향목의 존재에 대해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 백향목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백향목을 구하고 나르는 과정이 힘들어서 하나님께서 배려해주셨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궁금증은 성전시대로 흐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성전 건축은 과연 백향목으로 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성소도 백향목으로 만듭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훨씬 더 우수한 목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백향목으로 다시 만들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보 1호였던 언약궤는 언제나 변함없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출애굽시대의 것 그대로였습니다.
조각목을 재료로 쓰기 위해서는 이 단단한 나무를 벌목해야 했으며 가시를 다 쳐내고 껍질을 벗겨내고 또 필요한 만큼 잘라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작게는 두 규빗(약 90cm-1m)에서 길게는 열 규빗(9-10m)으로 고르게 펴고 다듬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같은 장인들에게 목재를 가공하고 건축하는 ‘지식’을 주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다시 봐도 쓰기 편하고 보기도 좋은 백향목이 좋아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조각목을 고집하십니다.
성전의 재료인 우리
성전의 재료인 우리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였습니다. 에덴동산을 지나 노아, 아브라함, 야곱과 같은 족장들과 함께하신 하나님,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을 정복하고 성막에서 함께하신 하나님,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러 성전에서 함께하신 하나님, 성전이 무너지고 다시금 세워지며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구약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등장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역사와 임재의 상징이었던 이 성전을 헐면 내가 3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말씀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심을 밝히시기도 하십니다.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 우리 가운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성경은 이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하심을 나타내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상징하는 성전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백향목입니까? 조각목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궤의 재료가 백향목이 아닌 조각목이라는 사실이 어찌나 큰 은혜인지요!
성소나 성물의 재료에 합당하지 않은 나무. 그러나 외모를 취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용하시겠다 하신 나무. 그것이 조각목이었습니다. 이는 동시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전인 교회로 부름 받은 은혜를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교회를 세우는 데에 합당하지 않은 조각목 같은 자들,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조각목의 특징
조각목의 특징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삭막한 세상 가운데에서, 광야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려서 세상의 바람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말씀에 잠겨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조각목에는 가시와 딱딱한 껍질이 있습니다. 선택을 받은 조각목들은 다듬어집니다.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서 조각목의 가시와 껍질은 벗겨내져야 합니다. 또 길이가 길다면 잘리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고 딱딱한 껍질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모난 부분들이 있고 범죄와 불순종이 있으며 수십 년 동안 가지고 있는 고집들과 나쁜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과 선물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좋도록 다듬어져야 합니다. 죄와 껍질은 벗겨져야 합니다. 교만한 부분이 있다면 잘라내져야 하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다듬는 일들은 정말 힘들고 귀찮은 일임과 동시에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조각목이 다듬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게 될 것임을 모세와 장인들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장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시와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어서 다듬어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경우 다듬어질 때 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아닌 저 사람을 쓰시지 그러셨어요 하는 생각을 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듬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으로 완성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셨듯, 우리에게도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의 향기가 되어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습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조각목은 스스로 다듬어질 수 없습니다. 또 기술이 없이는 쉽게 다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다듬어질 수 있도록 장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어떻게 다듬을지를 알려주십니다.
우리도 스스로 다듬으려 노력하다가는 가시에 찔리고 껍질을 벗기다 화가 나서 포기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우리를 다듬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이 방법들을 따를 때에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이끄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조각목과 같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그리고 아무리 설교와 권면을 들어도 장인의 도움 없이는 다듬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장인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성령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다듬어져가는 조각목들, 마침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이 조각목들이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믿으십니까? 함께 고백해보실까요? 저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금이 발라지는 조각목
마침내 금이 발라지는 조각목
마침내 다듬어진 조각목에는 금이 입혀집니다. 금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그리고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금이 입혀진 조각목들은 이제 가시 돋히고 두꺼운 껍질을 가진 광야의 마른 나무가 아니라 변치 않으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처소를 위한 재료가 됩니다.
조각목에 금이 입혀졌다면 우리에게는 상징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가 입혀집니다.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는 이 금이 우리가 다듬어지기도 전에 먼저 입혀졌다는 점과 또 우리 삶 가운데 계속해서 입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우리의 삶은 이미 예수님이 입혀진 삶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순간마다 부족하든지 족하든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입혀지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를 넘어 영원히 우리에게 입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입혀진 예수님은 우리의 모양과 관계없이 이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만들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또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부담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듬어지는 과정에 기쁜 마음과 설레이는 마음으로 따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고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처소를 만드심에 있어서 백향목 대신 가시가 돋히고 딱딱한 껍질을 가진,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합당하지 않아 보이는 조각목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목을 다듬으시고 금을 입혀 하나님의 처소의 재료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 구원을 모든 곳에 나타내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처소삼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의 몸 된 성전인 교회를 만들어가길 원하십니다. 가시가 많고 껍질이 두꺼운 죄인인 우리는 이 일에 합당하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합당하지 않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죄인인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시고 예수님을 입히셔서 먼저 교회로 부르십니다. 성령님의 주도하심으로 말씀과 기도, 성도의 교제라는 방법으로 다듬으십니다. 때론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실망하고 포기하고자 할 때는 ‘교회'라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보여주시며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 그리고 구원을 모든 곳에 나타내는 데에 사용될 것을 보여주십니다.
교회로 부름받은 여러분, 우리가 또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이 다듬어져서 날로 더욱 아름다운 하나님의 처소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목적에 대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