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1. 새벽예배. 고난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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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57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욥기

25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의 대답

26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1)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서론

혹시 수메르의 신화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략 기원전 2천년 경, 혹은 기원전 3천년 경까지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수메르인들의 점토판이 발굴되고 연구되면서 성경이 사실 수메르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돈 적이 있었지요. 놀랍게도 점토판에 기록된 수메르의 신화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 성경에 등장하는 에녹의 승천 이야기,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수메르의 신화를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 타당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먼 고대의 신화들 속에는 어느정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사람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단편들이 담겨 있지만, 오직 성경만이 온전히 그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해야 옳습니다.
오늘 이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놓는 이유는 욥기도 비슷한 이야기가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일명 “바벨론 욥기”라고 불리는데요, 이야기가 아주 욥기와 흡사합니다. 바벨론 욥기의 주인공인 ‘타비우툴 벨’은 한 나라의 왕이었는데, 욥처럼 경건하고 바르게 살았던 사람으로 등장하며, 욥처럼 까닭모를 고난을 당해 병으로 고생했고, 욥처럼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해 당황해했으며, 욥처럼 신에게 그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참 비슷하죠?
이처럼 욥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근동에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습니다. 비단 이스라엘 사람 뿐만이 아니라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거죠. 그러다가 욥기가 어느 시점에 문서로 기록이 되고 유대인들에게 널리 읽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입니다. 욥기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이 되고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다는 말은 아주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이후 당시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에 깊숙히 간직하게 된 한 가지 공통적인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가?”하는 의문이었지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 범죄하여 징계를 받은 것이 맞지만, 이들에게 여전히 고난이 가득한 것은 잘 납득이 가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며 자신들이 징계를 받은 이유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유일한 회복의 길이라고 여긴 그들은 성전을 잃은 그 상황에서 회당을 짓고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지요. 하지만 아무리 힘써보아도 그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포로 신세였고, 고국의 성전은 폐허가 되어 버려진 채였습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부였던 것인가?” “우리는 범죄했고 충분히 벌을 받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 지금 받고 있는 이 고난도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란 말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이렇게 고난을 받는데, 왜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바벨론 사람들은 이토록 잘 살아간단 말인가?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바벨론사람처럼 되어버린 유대인들 또한 어떻게 이토록 잘 살아간단 말인가? 하나님은 정말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 맞는가?”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아가던 유대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욥기를 기록하게 하시고 읽고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기를 통해 고난 중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이 당하는 고난에 아무런 까닭이 없지 않음을 알리시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더욱 깊은 신앙을 길러내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하나님께 위로를 받기 원하며, 이 고난에 아무런 까닭이 없지 않음을 알기 원하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욥기가 어렵지만 사랑받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본론

앞서 한달 동안 계속해서 욥기에 대한 설교를 들으며 이제는 욥기의 구조가 익숙해지셨을 것입니다. 42장이나 되는 욥기 속에서 대부분의 분량은 욥과 친구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 즉,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사이의 대화라기보다는 논쟁에 가까운 내용이 차례대로 등장하는데요, 오늘 본문이 이제 욥과 세 친구 사이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참 한결같게도 고난 당하는 욥을 향해 이런 말을 늘어놓으며 욥의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일이 없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거다. 그러니 회개해라.” 욥도 참 한결같이 친구들을 향해 항변합니다. “내가 너희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지 않는다. 나는 분명 잘못한 것이 없다. 너희의 말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는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이 느꼈던 의문과 고충이 녹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지혜와 그 지혜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상황이라는 긴장과 갈등이 이 대화 속에 가득 담겨 있다는 말이지요. 전통적인 지혜라 함은 짧게 행위화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단순한 지혜입니다. 물론 이 말은 맞습니다. 신명기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명기 11:26–28 NKRV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하시고 다루심이 다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화시킨 이런 방식으로는 누구도 복을 받을 자가 없고,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에 대해서 설명할 길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죄인을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빌닷은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주장을 꺾으려고 하나님을 들먹인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고 높으심으로 우리를 정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고 높으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의로운 자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 = 공의냐 사랑이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 세상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맞으시고 길러가시는 하나님.
무조건적 사랑 = 변함없는 사랑 -> 십자가. 이것만이 고난에 대한 설명이 가능. 고난은 하나님의 기대다. 하나님은 지금 이 정도의 내 수준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더욱 깊은 하나님에 대한 앎과 신뢰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길 원하신다.
(간증)
욥기 42:5 NKRV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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