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3 저녁] 예배,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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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53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 533 우리 주 십자가
본문 사 55:1-13
예배가 무엇인가? 그리고 성도에게 있어서, 더 나아가 지금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배’란 무엇인가?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여러분은 왜 매번 예배에 참석하시는 가? 어떤 이는 매우 습관적으로, 어떤 분들은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어떤 분들은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나아오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다. 그 기대하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나의 신앙 생활의 원동력이 되고 기초가 된다.
오늘 예배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건물을 세울 때도 기초가 튼튼해야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것처럼,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원동력이자 기초가 되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이해, 예배에 대한 고백, 예배를 통해 누리는 유익들이 확실히 정리 되어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세워갈 수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배는 무엇이고, 왜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해보시기를 바란다.
최근 들어서 교회의 위기라는 소리를 참 여러군대에서 듣는다. 교회가 점점 역동성을 잃어가고, 교인들도 기독교 신앙과 동떨어진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현상이 늘어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일은 아니다. 얼마 전 어느 논문을 읽게 되었다. "복음의 정체성과 예배"라는 논문이었다. 다양한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교인들이 교회의 예배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그중에 두 가지만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설문조사에 응한 교인 37%가 일상 생활 속에서 기대하던 것들과 예배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응했고, 또한 설문조사에 응한 교인36%가 예배는 삶에 힘을 주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하다”고 응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답변을 한 것에 대해 설문에 참여한 사람들은 여러 이유들을 제출했다. 그 중 가장 큰 원인이 목사의 설교가 엉망이라고 대답했고, 그 다음에는 내 휴식을 포기할 만큼 예배를 사모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는 교회에 가면 이 시대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용어들을 사용하는데서 오는 괴리감, 예배시간이 너무나도 길고 지루해서 등 여러 이유들을 나열했다. 그런데 이 논문을 발표했던 교수는 이 모든 부정적 요인들의 원인, 즉 교인이 감소해가고 예배가 역동성을 잃어가는 가장 큰 원인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지적한다. 그것은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교회는 무엇이고, 성도는 어떠한 자들이며, 예배가 무엇인지, 그 본질과 정체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교회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찾는 자들의 수가 급감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는 것은, 교회가 다시 새 힘을 얻고 일상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예배에 대한 성도들의 교육을 놓치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교육이 그저 주일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부 청년부 뿐만 아니라 장년들도, 예배에 대해서와 교회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깊이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 역시도 아주 깊게 공감을 했다. 우리가 흔히 교회교육이라 하는데 이 교회교육은 주일학교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장년학교까지 포함된다. 실제로 개혁파 교회들 가운데 장년학교가 아직 남아있는 교회들이 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결혼을 해서 장년이 되면 더이상 교회교육을 안받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지속적인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예배는 무엇인가? 로마 카톨릭에서는 자신들의 예배를 ‘미사(messe/메서)’ 라고 표현했는데, 로마카톨릭의 미사가 개신교회의 예배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로마 카톨릭의 ‘미사’ 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이루신 희생제사를 기념하는 예식 혹은 의식으로서 “제사”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이다. 따라서 그들의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제사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오늘날 드리는 미사가 그 희생제사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천주교의 십자가와 개신교의 십자가의 차이가 무엇인가? 천주교회의 십자가에는 여전히 못박힌 예수님이 달려계시다. 따라서 천주교회의 미사는 희생제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모든 택하신 자들을 위한 희생제물로 올려드리신 것처럼, 미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께 예배를 “~한다" 라고 표현하는가? 흔히 “예배 드린다”라고 표현한다. 내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개념, 로마카톨릭의 미사와 같은 그런 개념들이 토착화된 경우이다. 또 우리 어르신들 같은 경우, 아주 오래전에는 예배를 무엇한다고 표현하셨었는가? “예배 본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보다" 라는 동사와 “드리다" 라는 동사를 사용했었다. 주목할 부분은 둘 다 나 개인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이고 내가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미사’라고 부르던 것을 “Gottesdienst”라는 단어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Gott)이라는 단어와 ‘섬긴다, 일한다’(dienen)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걸 우리말로 직역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봉사(섬김)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 표현과는 어감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본다, 혹은 예배를 드린다 라고 표현해왔다. 내가 예배를 보는 사람이고,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다. 주체가 “나”이다. 그런데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주체가 “나"가 아닌 “하나님"으로 돌려드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예배시간에 무슨 일을 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보통 예배라는 말을 생각할 때, 영어로는 worship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이 단어는 그저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가장 가치있는 것, 가장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는 worth- ship의 축약형으로 이루어진 단어인데, 아래에서 위로 올려드리는 제사적인 의미이다. 이 단어 말고도 예배를 service라는 단어도 사용한다. ‘서비스’ 라는 말은 누구나 아실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엘지 티비를 샀다. 그런데 그 티비가 어느날 고장이 나서 엘지 a/s 센터로 간다. 그곳에 가면 누가 서비스하고, 누가 서비스를 받는가? 당연히 서비스 하는 자는 엘지이고, 서비스를 받는 자는 고객이다.
예배는 영어로 서비스라고 한다. 누가 서비스하는 것이고, 누가 서비스 받는 대상인가? 여러분, 절대로 이 순서를 잊으시면 안된다. 예배란 땅에 있는 내가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서비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서비스하시는 시간이다. 그래서 요즘은 worship이라는 단어가 이 땅에서 뭔가 가치있는 것을 하늘로 올린다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의미이다 보니 다시 수정하여서 worship service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 표현도 참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worship이라는 단어와 service라는 단어, 둘 다 맞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하늘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있고 땅에서부터 올려지는 것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에 대한 초점은 그 행위의 초점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런 표현을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을 올려드린다"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상처입은 수많은 죄인들이 그 말씀을 들음으로서 보이는 합당한 반응이 바로 감사와 찬양과 경배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과 죄인의 거룩한 상호 소통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죄인의 합당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둘이 예배 시간에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소통한다.
우리는 보통 ‘예배를 드린다’라고 표현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 식으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여러분,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시어 우리의 서비스를 받으시겠는가?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찬양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이것들 때문에 더욱 강력해 지시고 더욱 전능한 신이 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이다. 당시 온 땅에 존재하던 신화속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의 경배를 받아야만 강력해 지고, 인간의 제사를 받아야만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반쪽자리 신이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무능한 신이 아니시다. 어느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으시는, 홀로 영화로우시고 홀로 존귀하시며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내 손이 정말 깨끗해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는 세균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우리 잠시 옆 사람과 악수하자. 이렇게 인사하자. “제 세균들 받아가십시요"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리 거룩한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린다 할지라도,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과 거룩하심에는 결코 미칠 수 없는 부정한 것들이다. 오히려 죄인들이 올려드리는 경배와 찬양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뿐 아닌가?
생각해보라. 내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만 가난한 하나님이 더 부유해 지시는가? 내가 나의 시간과 정성과 몸을 바쳐야만 하나님은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착각하면 안된다. 지금껏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예배의 횟수와 참석 여부로 하나님 앞에 교만을 떨었다. 나는 이만큼이나 예배에 참석하는데 너는 왜 예배를 안드리니? 하면서 다른 성도들을 비난하는 척도로 예배의 가치를 격하시켜왔다.
여러분,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는 시간이 아니다. 예배는 이 땅의 죄인들이 하나님께 뭔가를 적선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 즉 서비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병들고, 마음 상하고, 지친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부르시고, 은혜 주시고, 힘을 더하여 주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고장난 물건들을 들고 서비스센터에 가면 거기서 새 것처럼 고쳐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고치셔서 변화시켜 주시고 새 힘과 새 능력을 주신다. 죄에 물들어서 양심이 박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온통 상처 투성이인 연약한 죄인들을 불러 모으신다. 그리고 깨어진 자리, 상한 자리를 어루만지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회복의 일하심을 예배를 통해 행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 곧 예배이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은 예배를 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했을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숨겨져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로마카톨릭은 자신들이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의 횟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제물의 값어치가 비쌀수록 천국에 보화를 많이 쌓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부족하여 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였고, 또한 성경이 아주 드물게 있다 하였더라도 외국어로 씌여져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는 이상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이 부패할만큼 부패하여 성경에 없는 내용을 가르쳐도,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놓고 악행을 저질러서 성경에 없는 내용들을 만들어내고, 엉터리 교리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결국 면벌부와 연옥설과 같은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만들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바쳐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데에는 어떠한 인간의 공로도 포함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이다.
너희가 제 아무리 진귀한 제물을 준비해 봤자, 너희가 제 아무리 거룩하게 구별해봤자, 너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봤자, 그것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진귀하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값비싸고, 너희 나름대로의 기준으로는 거룩해보일런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에는 부정할 뿐이라고 말씀한다. 아무리 화려한 예배당, 아무리 뛰어난 음향시설, 아무리 뛰어난 조명, 뛰어난 건축가가 지은 예배당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결국 죄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거룩에 미칠 수 없는 부정한 것들 뿐이다. 그것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 누가 하나님께 먼저 나아갈 자격을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가? 그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존전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먼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새롭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특정사람이 준비하고 진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특정인만 주도하고 참여하는 의식도 아니다. 더 나아가 예배는 사람이 준비해서 드리는 희생제사가 결코 아니다. 예배는 "자격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예배의 주인공은 우리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을 신뢰하며 예배에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을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바다로, 다시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바다로 하나님께서 초청하신다.
내가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초청하시어 새롭게 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세상을 이기고도 남을만한 능력을 주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시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고, 이제는 세상으로 나아가 받은 위로와 힘을 다시 나누어주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은 성도가 교회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파송받아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일어나는 시간이 바로 우리의 예배라는 것이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다.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 내가 주님을 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치고 상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쉼을 주시기 위하여 초청하시고 일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죄인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우리는 감사의 기도, 찬송을 올려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리며, 우리가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이 말씀에는 목마른 자들과 돈 없는 자들이 등장한다. 이 모두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배를 불릴 수 없고 목을 축일 수 없는 자들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지금의 상황을 조금도 모면할만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들이다. 죄의 저주 아래에 놓인 자들이다. 나병처럼 내 힘으로는 도저히 조금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2-3절에서 "내게 와서 듣고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았다. 목 마른 자들, 돈 없는 자들, 고아와 같이 굶주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무 값없이 풍성하게 먹이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 그것이 예배이다.
말씀을 계속해서 보라. 하나님께 와서 듣는 자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다.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영혼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확실한 은혜의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교회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곧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그분의 택한 백성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되 차고 넘치도록 채우신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은 자들은 그 후에 어떻게 하는가? 12-13절과 같이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세상으로 파송되는데,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고, 평안히 인도함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초청하시고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며,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일하심, 곧 예배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예배한다, 혹은 예배 드린다" 라는 표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올려드리는 것을 예배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더 먼저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교회의 성도들을 그분의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시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 이것이 예배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배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의 일하심’, 곧 예배 가운데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간의 공로도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배로 들어간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여러 깊게 패인 상처의 흔적들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며, 하늘의 신령한 은사들을 부어주시어 세상으로 파송하셔서 주의 은혜들을 나누고 선포하게 하신다. 성도 여러분,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자격없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배로 초청하신다. 아무 가치 없는 철저한 죄인들을 초청하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실 것이다.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실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깊은 상처들을 메만지시고 위로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사업 가운데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 예배를 간절히 사모함으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충만하게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축복한다.
-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아버지, 예배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나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나의 삶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나의 가정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 교회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 지역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들 가운데 일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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