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품에 안긴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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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5-33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 살던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노인을 부러워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시대 노인의 이야기는 그다지 인기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이 노인은 우리가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그러한 삶을 가진 노인입니다. 이 노인에게는 부러워할 것이 세 가지 있었는데, 성경은 이 노인이 의로웠고 또 경건했으며 기다릴 줄 아는 삶을 살았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기록된 바로 이 순간에 이 노인에게 성령이 함께했다는 증거합니다. 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노인께서는 장수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서 신앙과 삶이 완성되어지고 성숙해지는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사모해야 할 세 가지의 부러움이 있는데요.
첫 번째 이 노인에게서 우리가 가져야 할 부러움은 ‘평생 이 노인이 평생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시면, 제가 소개하고 있는 노인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고요. 이름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25절 합독.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 시므온이라는 노인의 삶을 요약해 보니까요. ‘의로웠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의로운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따라가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법을 따라 살고 어떤 사람들은 도리를 따라 살고, 어떤 사람들은 의리를 따라 살고, 어떤 사람들은 돈과 명예를 따라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가장 추구해야 할 삶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 받아주신다고 연결해서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삶은 한 번의 결단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았을 때, 그때 사람 속에 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시므온이 대단히 부럽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두 번째 이 시므온은 ‘경건하게 살았다’라고 얘기합니다. 경건함이란, 우리의 신앙 전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요. 오늘 말하는 경건함은 그것보다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제가 이 25절을 번역한다면 “시므온은 의롭고 헌신되어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번역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헌신된 사람은 열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세상일을 하는데도 헌신된 사람은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만 있다고 헌신된 것은 아닙니다. 헌신된 사람은 집중력이 있더라고요. 초점이 분명히 맞춰 있는 거죠. 그저 부산하게 열심은 있는데, 초점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산만함은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살았던 삶의 모습이 이 시므온에게 있기때문에 부럽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 기다림입니다. 그의 삶은 기다릴 줄 알았는데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성화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화되면 될수록 기다릴 줄 아는 삶을 살게 되죠.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뜻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계속 기다립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머물러 있는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그 모습 속에서 기다림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데이비 애커먼이라는 미국의 한 간호사가 쓴 <가장 힘든 일 기다림>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은 그녀가 병원에서 경험했던 일을 자서전처럼 쓴 책인데, 그 주제가 기다림입니다.
이분이 중환자 병동에서 일했습니다. 매일 밤 중환자 병동에서 일하면서 하룻밤에도 한두 명씩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통 가운데 밤을 지새우다가 인생을 마감하는데, 다수의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다음날을 맞이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책을 쓴 동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기다려봐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막연히 이렇게 얘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게 참 싫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얘기를 듣는 사람이 얼마나 그런 얘기를 듣는 가운데 위로가 안 되었는지를 경험했다는 것이죠. 마치 ‘희망 고문’같은 것이죠.
그저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신앙적으로 찾아갔는데, 이 간호사의 결론은 뭐냐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 머무르라’라는 뜻이라는 거예요. 비록 그 자리가 고통스러워도 중환자실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워서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고 피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그만하고 싶은 그때에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결국 새 아침이 온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25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근데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곳이기 때문에 때로는 따분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피하고 싶고 떠나고 싶어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을 25절에서 다시 확인해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무엇을 기다리는 자라고 그래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고, 성경을 본문을 더 읽어 나가면 그 위로가 바로 아기 예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선포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는데,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나서 시므온을 만남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는 그런 기다림의 열매를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다리는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번 대림절 묵상집 제목도 <위로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더라고요. “위로의 주님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은 엄청난 부자 아니었습니까? 그의 재산은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 소가 5백 마리, 암나귀 5백 마리에 많은 종이 있었고요. 그를 빛나게 해주는 소중한 아들 7명과 딸이 3명 있었습니다.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빛나는 영광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종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마저 한날에 모두 잃어버리는 끔찍한 일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온몸에는 악성 종기가 나서 극심한 고통이 그를 괴롭혔고 그의 아내는 욥에게 저주를 퍼붓고 떠나버렸으며, 욥을 위로하러 왔다는 세 친구는 거침없이 자신들의 신앙의 잣대로 욥을 난도질하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숨이라도 제대로 쉬었을까요?
요즘 새벽설교 본문이 욥기의 말씀인데요. 지난 수요일 새벽설교를 준비하면서 문득 욥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제 마음에 충만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생명체는 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살아있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 욥에게 그런 엄청난 고통 속에서 탄식밖에 없었다면 그는 아마 얼마 못 가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 23장 10절의 말씀처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에게는 탄식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더라고요. 탄식이라는 것은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거잖아요? 고난 가운데 탄식이 터져 나올 때는 한숨만 내쉬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들숨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필요한 들숨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라는 들숨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소망 가운데 기다림의 열매를 맞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므온에게는 이렇게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믿는 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품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더라고요. 여러분,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진정한 위로를 우리가 찾고 경험하고 나눌 수 있는 성도의 풍성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되고 있는 이 위로라는 원어를 이렇게 따져가 보면은요,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위로’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다른 내용 같아요. 그런데 그거를 연결하다 보면, 위로가 진짜 어떻게 임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뜻이 뭐냐면 첫째는 ‘소환’이라는 뜻이 있어요. 부르는 거예요. 법적으로 출두 명령 같은 소환이에요. 두 번째는 ‘권면’입니다. 혹은 ‘훈계’예요. 권면 혹은 훈계 세 번째는 ‘위로’입니다. 이 단어들이 여러분 연결이 되십니까? ‘소환, 훈계, 위로’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정말 위로를 받는 건요. 감정이 살짝 다른 사람에게 동조를 얻는 이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로는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소환해 주시는 거예요. ‘너 이리 와 봐’ 하나님이 이러시면 어때요? 정신 번쩍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는 게 이게 위로인 거예요. 그래서 부르심이 위로라 연결이 되죠.
여러분, 훈계도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훈계와 권면은 그것을 통해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위로는 뭐냐면, 하나님이 불러내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주님이 권면을 해주는데 이 권면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하나님께는 혼나도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요. 우리는 불평불만, 시기, 질투 이런 게 참 많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혼내주시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게 위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시므온은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다 또다시 25절을 다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27절]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자, 성령이 세 번 여기서 언급이 되는데요. 성령이 위에 머물고 있었고, 그 성령이 위에 머물고 계시던 성령께서 그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서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그때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 노인은 평생 기다리던 일을 한 자리에서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성령이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 부럽지 않으세요? 성령이 그에게 지시하고 성령이 그를 이끌어서 꼭 필요한 자리로 인도하는 그 사람. 이것이 시므온의 인생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성령이 위에 머물렀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여러분 성령의 지시를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표현 중에 정말 이 특이한 표현이에요. 성령의 충만, 성령의 도우심 이런 것들은 성령의 비교적 익숙한 단어인데 성령의 지시 성령이라는 것은 “이렇게 해!”라고 명령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거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곰곰이 고민해 봤는데 제 삶에서 있을까? 말까 한 것 같아요.
이 성령의 지시함이라는 말을 이렇게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이 하라고 강하게 명령하는데 명령을 받는 순간 안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거 안 하면 큰일 날 거라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아”라는 대목이 쓰이는 또 다른 본문을 하나 찾아보겠는데 사도행전 10장 22절입니다. 바로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가 초청받는 장면인데요. 이때 이 표현이 나옵니다. 화면에 있는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여러분, 비슷하지 않습니까? 고넬료 역시 시므온처럼 의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룩한 천사의 무엇을 받았다고 그래요? “지시를 받아” “당신을” 여기서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청하였다고 합니다. 이 베드로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땠겠어요? 마음의 확신이 왔겠습니까? 안 왔겠습니까? 당연히 왔지요.
여러분, 내가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때도 성령의 충만한 사람을 내 앞에 하나님이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나를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고넬료에게 천사가 지시했는데 베드로가 딱 보니까, “와~ 하나님의 엄명이야 안 갈 수 없어”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사실 가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고넬료가 이방인이었거든요. 이방인 집에 가면 뭘 해야 할까요? 식사 교제를 해야 됩니다.
식사 교제를 할 때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과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베드로는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이 지시하신 겁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지시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이 지시는 아주 엄중한 명령이었기 때문에 시므온은 명령을 따라 성전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의 인생은 오랜 시간을 두고 완성품에 도달하는 명품 인생이 된 겁니다. 이 마지막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미완성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성전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부모의 손에 안겨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앞에 27절을 눈여겨보시면,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장면을 상상하게 그린 그림이 있는데요. 바로 그 유명한 렘브란트가 1669년에 그린 <시므온의 노래>입니다. ppt.
이 그림은 공식적으로는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시므온을 얼굴을 한 번 자세히 보세요. 마치 휘어진 한 그루의 늙은 소나무와 같지 않습니까? 꾸부정한 모습에 눈은 거의 감겨 있습니다. 그리고 앙상한 두 팔로 안은 아기 예수께서 맑은 눈으로 시므온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기까지 한데요. 이런 아기 예수를 보는 시므온은 마치 기도하듯이 아기 예수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 늙어 무력한 모습이기에 서툴기도 하지만 뭔가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그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함께 보시길 바랍니다. 29-32절 합독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구원이 어디에 있다고 그럽니까? 아기 예수 가운데 있었던 거예요. 이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면서 그냥 조그만 아기 하나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그 아기 예수 가운데 있는 걸 본 겁니다. 그는 육신의 눈이 노쇠한 노인이었지만, 영안은 그 누구보다도 맑고 예민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영안을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을 보면서 큰 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설계도가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전진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요. 오늘 이 시므온이 자기의 마지막을 요약하는 중요한 한 문장이 있는데요. 29절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어떻게 해요?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자신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뭐라고 얘기하냐면 주님이 자기를 놓아주시는 인생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기다리던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에 나오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 말이 한 주 내내 얼마나 제 마음에 벅찬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을 의롭고 경건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서 살아왔던 삶을 잘 완수하고 그것을 내려놓는, 마치 수능시험을 다 마친 수험생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나서 내뱉는 말 같지 않습니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저는 문득 사도바울의 고백이 떠오르더라고요. 빌립보서 3:12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4절]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런가하면 디모데후서 4:7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고백으로만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오늘 본문 26절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29절]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여러분,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를 놓아서는 안 되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사명이 내 인생을 붙드는 거예요. 누가 붙들고 계시는 거예요? 주님이 그의 인생을 붙들고 계셨다는 거예요. 주님이 인생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붙들고 있는 것을 놓아주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 하시길 바랍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우리 모두가 사명을 다하는 그 날, 평안히 놓아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31절 32절을 보면 단순히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그분이시고 이방을 위하여 열방을 위하여 비추는 빛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1-32절 다시 한번 합독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시므온은 준비되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본 것이 그에게 큰 기쁨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붙들고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해 봤으면 좋겠는데요. 우리는요. 내가 나를 붙들고 사는 게 많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내가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이게 참 안 되는 게 많아요. 주님이 붙드실 때는 때가 되면 놓아주시면 끝나는데,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니까 언제가 끝인지도 모르는 게 우리 인생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생이 꼬이는 겁니다.
여러분,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아시잖아요? 제가 이 책을 20대 때 읽었을 때는 읽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요즘 읽으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 천로역정의 수많은 내용이 있는데, 제가 이해 안 된 것 중의 하나는 뭐였냐면, 나이 들어서는 욕심을 조심하래요. 제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욕심은 젊어서 조심하는 거지 무슨 나이 드는데 무슨 욕심이 있을까요?
돌아가신 저희 친할머니를 보면 음식도 잘 안 드셨어요. 그래서 딴 사람한테 양보도 많이 하시고 욕심 없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요. 나이 들수록 욕심이 더 생긴다는 거 아니에요? 이걸 뭐라 그래요. 노추(老醜)라고 하더라고요. 늙고 추하다는 것이죠.
노인이 될수록 더 추해진다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욕심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평생을 욕심 때문에 자기를 붙들고 살아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내가 나를 붙들고 사니까 자꾸 욕심만 있는 거죠.
공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청소년 때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으니 여색을 조심하고, 장년기에는 혈기가 강하므로 싸움을 조심하고, 그 다음을 잘 들어보세요. 노년기에는 혈기가 이미 쇠약한지라 ”탐욕을 조심하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시므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욕심을 버리는 삶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주님 앞에 가까워질수록 인생의 연수가 채워져 갈수록 내가 붙드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으신 인생이에요. 그래서 인생의 끝이 뭐냐면, “하나님이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악착같이 억지로 뺏는 게 아니라,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명한 작곡가였던 슈베르트가 작곡한 <백조의 노래>라는 노래 모음집이 있습니다. 여러분, 백조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본 것 같아요.
이 백조가 주는 상징이 있는데요. 하나는 우아함이고 또 하나는 슬픔입니다.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를 보면 너무 아름다운데 뭔가 슬프잖아요? 백조를 보면 그렇죠. 우아한데 뭔가 좀 슬픔이 있어요.
실제로 백조는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요. 백조의 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데,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오늘 본문으로 <백조의 노래>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시므온이 죽음을 앞둔 백조처럼 이 마지막에 아름답게 노래한 거예요. 그렇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다가 성령의 지시함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를 보고 얼마나 기뻐서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 앞에 찬양했는데 “대주재여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고 만민 앞에 예비된 이 아기를 통해서 이방까지 빛이 쫙 퍼져서 모두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시므온의 인생이 꽤 괜찮았어요. 의롭고 경건하고 기다리고 살았어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의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언제 내었어요?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맨 마지막에 부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마지막이 이랬으면 좋겠어요. 백조의 노래처럼, 시므온의 노래처럼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눈을 감는 게 제 소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노래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번 시므온을 부러워하는 인생이 넘어 우리가 시므온과 같은 인생이 되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모해 보자고요. 그가 살아왔던 모든 과정이 경건함과 의로움과 기다림으로 설명되어지고, 위로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요약되어지고, 그의 삶에 마지막에 더 강력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그의 마지막 자신의 삶을 주께서 평안히 놓아주시는 인생! 그런데 정말 멋있는 부분은 뭐냐면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걸 본 겁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림절 한 달을 어떻게 보내세요? 저는 어렸을 때 이 대림절 4주를 어떻게 보냈냐면, 성탄전야행사 준비밖에 한 기억이 없습니다. 전도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1월쯤 되면 “이번 성탄절 행사 때 뭐하지?” 이런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어떠셨습니까? 올해 대림절을 또 행사 준비하시느라, 연말 정산하시느라,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 새해 준비하시느라 내 열심으로만 분주하게만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 대림절은요. 예수님의 오심 자체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올해 대림절은 2천 년 전에, 시므온이 간절히 기다리던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시므온의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 묵상집을 통해 도움을 받으셔도 좋고, 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으셔도 좋습니다. 주보 안쪽에 대림절에 대한 기원도 차분하게 한 번 보시면서 시므온의 마음을 느껴보세요.
매년 이맘때면 교회 옆 공원에 광염교회에서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이 참 근사하잖아요? 그중에 제일 하이라이트가 뭔지 아세요? 공원 중앙에 있는 거대한 트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입구 그 한쪽 구석에 조용하게 자리 잡은 아기 예수와 그의 부모, 그리고 동방박사들의 모형이에요. 저는 조현삼 목사님의 마음을 알겠어요. 그 아기 예수님을 주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저렇게 화려한 장식으로 섬기는 거예요.
올해 대림절과 성탄절에는 우리에게도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예루살렘의 노인이었던 시므온처럼 그런 감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강력한 지시를 받아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이제 종을 놓아주시는도다” 하면서 내 사명을 다하는 인생 마지막에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하나님의 음성을(시편 40편)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여러분들은 어떤 인생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자라”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살다가” “내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그 간절히 기다렸던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고 감격했을 시므온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러분, 인생 마지막에 어떤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시므온과 같은 아름다운 노래가 있고 멋진 인생의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주님, 예루살렘에 한 무명의 노인에 불과했던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드디어 그의 인생 말년에 아기 예수님을 그의 품에 안고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 이곳에 모인 우리 모든 원로 장로님들, 원로 권사님들이 그런 시므온와 같은 고백을 갖고 멋진 인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라”라는 고백이 저들의 마지막 노래가 되게 하시고 또 젊은 우리 교우님들은 내 열심으로 내가 나를 붙드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들고 사명을 나를 붙드는 인생이 되어서 마지막까지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키는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시므온과 같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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