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제 : 거룩한 산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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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2
로마서 12:1-2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2장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말씀을 전하게된 이승훈 전도사입니다. ㅋㅋㅋㅋㅋ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또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온누리 청년부에게 감사드리고, 원준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 참,,, 인생에서 이렇게 바쁘고, 신경과 고민이 많은 순간에 설교를 하게되었는데요. 참으로 은혜롭다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ㅋㅋㅋㅋㅋ (장난입니다) ㅎㅎ
여튼 이 귀한 말씀의 자리에 기회를 얻은것은 설교자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이자 부담감이 있는 자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 귀한 자리를 내어주셨으니, 오늘도 함께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로마서 12:1-2 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많이 들어본 말씀이라 생각이 듭니다. 유명한 말씀이죠 ㅎㅎ
로마서는 우리가 잘 알듯 복음에 대해서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직접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하여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기록된게 로마서 입니다. 이 로마서는 두 가지의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장은 복음에 대한 이론에 대한 것이고, 12-16장은 이 복음의 실천에 대한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첫번째 단락이자, 개요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권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권면을 할때 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아”라고 지칭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이 “형제들아"라는 단어에 집중을 해보려 합니다.
제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읽어보았는데, 거기서 이 바울이 말한 “형제들아"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어서 참고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도로서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리더였고 그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기까지하는 엄청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교회를 세우고 사도로서 엄청난 업적을 달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여기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부를때 다름이 아니라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로마교회의 성도와 자신을 동등시 여기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어떠한 은사를 통해서 자신이 가진 사도의 귄위를 통해서 상대방을 찍어 누르지 않고 명령하지 않고, 오히려 성도들과 자신을 똑같이 여겼다는 것이 바로 “형제들아"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의미 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무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권한, 권위를 가진자 였고, 누구보다 많은 헌신을 하던 자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았을겁니다. 그런데 왜? 자신을 그들과 동일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유는 하나 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ㅎㅎ 이 말인 즉 바울은 자신 이 중요한 사람이거나, 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교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주님만 높이는 사람이 된것이죠 ㅎㅎ 그렇기에 자신을 우월하다 생각하지도 않았고, 남들을 깔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뛰어나거나 신학을 하거나, 독특한 은사를 가진 사람을 보면, 뭔가 저사람은 특별해 보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다 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세상은 능력이 있는 만큼 자신의 더 우월한 존재로 여김받고, 그 만큼 힘도 얻고 돈도 얻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게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동등하게 합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능력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같은 성도로서, 같은 신자로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같은 정체성 같은위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은 우리게 위로가 되며, 희망을 줍니다. 실재적으로 일단 저같은 사람도 전도사로 교회에서 쓰임받게 된걸 보면 , 이번에 뽑힌 임원 여러분들도 특출나서 임원으로 뽑힌게 아니기에, 내가 보여준 것이 크게 없는 사람이라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자유함을 줍니다. ㅎㅎ
복음은 우리를 형제요 자매로 만들며, 결국 한 가족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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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회>
우리 먼저는 우리가 동일하게 고백할 우리 주님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앞전에 설교 했듯이 우리는 주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누군
온누리 교회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안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나누기 앞서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기도문>
사랑과 공의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을 떠나 말씀앞에 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게 주시고, 우리의 중보자로 보내시어 비참한 우리가 말씀앞에서 설 수 있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전히 연약한 우리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을 더욱 알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부족한 설교자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셔서,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활짝열려, 당신의 말씀의 씨를 온전히 심기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시간이 오직 주님을 알아가고, 당신께 영광돌리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이 모든 기도 합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로마서 1:8–17 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로마서 전체의 기록목적이라 볼 수 있는 1장 11절에서 바울이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길 간절히 원하는데, 그 목적이 너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라 말하기에,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잡아보았습니다.
<최대한 천천히 >
[오늘 본문은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이라는 큰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의 감사로 8절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8절에서 로마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로마교회가 믿음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중 바라보기>
그리고 바울은 로마의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을 자세히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신다 하며, 바울 자신이 계속 로마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로마 교회를 만나길 원하여서 로마로 갈 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는 앞 전에서 언급했던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청중 바라보기>
바울은 이어서 계속 가고 싶지만,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직접가지 못하기에 이 글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며, 이 능력은 그 누구도 차별대우 받지 않는다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로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며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어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를 나누어 보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나눌 주제는 3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 , 견고하게 하는 것 이렇게 우리는 오늘 3가지와 적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청중 바라보기>
먼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다들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예정보다 큰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마태복음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의 말씀은 말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보존아래, 다스림 아래 있다고 합니다. 이 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사소한 것이나,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갑자기 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이러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의 방문계획에 대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일을 하려 하는데, 막힙니다. 기도하고 간구하였더니, 로마에 간 것이 아니라, 로마에 갈 수 없었고, 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려고한 이유는 로마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며, 결국 하나님나라를 위한 일인데, 인간의 생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이 바울에게 도움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이 바울을 막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을 이해할때 단순하게 표면적인 상황을 가지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상황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께 구합니다. 성경의 내용대로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간구를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이 없는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기도, 간구이기에 모두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야 할 듯 한데, 결과는 항상 다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전능자로서 언제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만물을 보존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도 빠지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역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싶었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를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을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라고 말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바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말 가기를 원하고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 갈 좋은 길을 얻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원하는 것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보다 크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그 것을 바라고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자신의 뜻 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높이 생각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 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단 한 치라도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라고 말하였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 함과 동시에 주관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어서 복음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주제를 굳이 제가 설교하는 이유는 우리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11절의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절의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절의 “열매를 맺 하려 함이로되"는 서로를 수식하는 문장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고하게 하려하는 모든 것의 시작은 복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바울은 14절에서 부터 설명합니다.
14절에 바울 자신이 빚진자라고 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자에게 다 내가 빚지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빚은 그들 자체에게 빚을 졌다기 보단, “나는 그들에게 (무엇, 무엇을)할 의무가 있다”라고 보는 것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즉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울 자신은 일단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1장 1절에서 받았기에 의무를 갖고 있었으며, 더하여 자신 또한 이 복음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이 값없이 얻은 이 혜택을 나누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의무를 느끼고 자신을 빚진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전하길 간절히 원하는데, 이 복음은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 전도사님 !! 우리가 아는 복음은 성경학교에서 배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에서 의인이 된 사건’이라고 배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수준에서 조금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삶에서 죄 가운데에 살고 있는 우리를 진정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복음이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도, 우리의 모든 상황속 에서도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그 능력은 우리를 견고하게 합니다. 우리가 딱딱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이 가려는 로마 공동체는 믿음이 없어서 전도를 하기위하여 가는 공동체는 아니였습니다. 8절에 “너희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러라"라는 문장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 가운데 바울이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의 앞 전제는 “어떤 신령한 은사"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신비한 기적이나, 귀신을 내쫒는 능력, 혹은 방언,
병고치는 은사,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영적인 은사'인데, 바로 복음 곧 영생을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은사를 너무 외적으로만 생각하지만, 신약에서는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선물을 은사라고 합니다. 넓게 사용되는 경우 ‘은사'(카리스마)는 ‘은혜'(카리스)와 동인한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진정 그 “은사”를 로마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을 뜻하고 있는데요.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견고하여 지는 것은, 피차 안위를 구하는 것과, 열매를 맺는 것으로 반복되어 사용 됩니다. 믿음으로 안위를 누리고,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가 복음으로 견고하여 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견고하여지기 위해서 열심히 무엇을 하기보다, 우리를 견고하게 이끄시기 위해 복음을 계속 듣게하시고, 바울을 통하여,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 믿음으로 굳건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저 씨를 뿌리면 됩니다.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따로 계시니 말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와 복음, 견고하게 하는 것에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를 우리 삶에서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현시대에 우리게 오고 싶다면 어떻게 우리를 견고하게 하려 할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를 견고하게 하셨을 까요? 바로 복음을 통하여 우리르 굳건히 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 성산교회에 수요예배에 나오신 모든 성도 여러분은 로마교회의 성도들 처럼 믿음이 있으신 줄 압니다. 복음을 꾸준히 듣고 또 들어서 너무 잘아는 여러분께 바울은 다시 복음을 전함으로 여러분들의 믿음을 굳건히, 피차 안위함을 얻게,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로마교회와는 다른 핍박과 박해안에서 믿음을 지켜가며 살아갑니다. 1세기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밥줄과 연결되어 있었고, 자신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어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혹은 목숨 때문에 파선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 21세기는 1세기와는 다르게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밥벌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상태에서 믿음을 지켜나아가야 합니다. 둘이 비교해 보자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욱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쉬어 보이는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현재의 믿음이 과거의 믿음보다 더욱 굳세고 더욱 견고합니까?
아니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현재 핍박과 고난이 직접적으로 우리게 없지만, 그 대신 수많은 유혹과, 믿음을 지켜내기위한 분별력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 고 있습니다.
굳이 고난의 길로 가지 않아도, 굳이 핍박의 자리에 가지 않아도 믿음을 지키는 듯 해보이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삶속에 숨어있는 수 많은 유혹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보다는, “내가 속한 무리 공동체에서 이 정도면 괜찮게 살고 있는거지” 라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여 영적 우월감에 심취하여 자신을 위로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종교행위는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더불어 다른 어떠한 것을 겸하여 섬김으로 “돈이 주는 유혹의 달콤함”에, “권력이 주는 안락함”에 심취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겸하여 함께 섬김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이 설교를 맡은 저라고 매번 주님앞에서 모든 유혹 앞에서 당당하게 의인으로 서지 못합니다. 성도님들이 저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모두 알게 되신다면 아마 매우 실족하실 것을 장담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를 혹은 말씀을 든는 여러분을 정죄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싶은 것 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지만 우리의 믿음이 있지만, 그 믿음은 견고해 져야 합니다. 피차 안위를 얻어야 하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더욱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얻은 이 복음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지, 우리가 씨름하는 것들, 혹은 유혹 받는 것들이 주는 것보다 얼마나 위대한 것을 우리게 주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죄를 지었을 때만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 내가 매번 쓰러지는 유혹, 내가 겸하여 섬기는 우상에서 부터 진실로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죄를 지었을 때만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 내가 매번 쓰러지는 유혹, 내가 겸하여 섬기는 우상에서 부터 진실로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 하나 우리가 타협하는 것에, 우리가 쉬쉬하던 것에 복음을 들고가길 원합니다. 그 자리는 떄로는 버거운 자리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외로운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게 그 어떤 자리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자리보다 무거운 자리는 없고, 성자께서 짊어진 외로움 보다 더욱 외로운 자리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게는 성자가 겪으신 큰 외로움보다 더 큰 외로움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과 함께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그분 앞에 복음을 들고 나아가 진정한 참 자유를 누리길 원합니다. 원한울 것 같이 우리의 믿음이 복음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듣는 자리를 사수하시시고, 사모함으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함으로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알지못하는 그 곳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으로 그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길 원합니다. 눌바외로움 보다 더욱 외로운 자리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게는 성자가 겪으신 큰 외로움보다 더 큰 외로움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과 함께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그분 앞에 복음을 들고 나아가 진정한 참 자유를 누리길 원합니다. 원한 것 같이 우리의 믿음이 복음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듣는 자리를 사수하시시고, 사모함으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함으로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알지못하는 그 곳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으로 그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길 원합니다. 눌바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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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모이게 하시고, 말씀앞에 서게 하심이 참으로 복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오늘 들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를 배웠고, 우리를 견고하게 하는 복음을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 함께 하여주셔서,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시는 당신의 복음을 신뢰하게 하시고, 언제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서기를 원합니다. 보여지는 자리, 높아지는 곳일 수록 우리를 겸손케 하사 오직 주님께만 영광돌리는 성산의 복된 성도들 되게 하심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복음으로 승리하는 이번 한주 되게 하옵소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도합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