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에스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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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스 1:1-11
제목: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주제: 말씀과 교회가 성령의 증거이다.
목적: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안주했던 나를 회개하기.
평형깨기
오늘부터 살펴보는 성경책의 이름이 바로 ‘에스라’이죠. 북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멸망하고 남유다가 주전 586년에 멸망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주전 539년에 고레스 2세가 바벨론을 무너뜨립니다. 이때 바벨론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 포로로 자연스럽게 이동했죠.
당시 고레스는 페르시아에 예속된 소수 민족들에게 자유로운 자치권을 부여하는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제국을 평화롭게 운영하는 데에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듬해 주전 538년, 포로기 약 50년 정도가 지나고 세대가 전환되었을 때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50여년 동안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대했던 앗수르나 바벨론에서 생활하고, 2세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세대입니다. 그러면 이미 그들이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거의 다 잊을 수밖에 없었던 세월이었습니다. 오히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태어난 세대이다 보니 황폐한 이스라엘 땅보다는 강대하고 화려한 페르시아에서 사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자연스러웠던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의 관심은 50년 동안 끊어진 신앙의 유산을 어떻게 하면 다시 연속적으로 계승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에요. “연속성”이 키워드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분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의 유산을 계승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우리가 왜곡되고 퇴색된 진리를 계승한 건 아닐까요? 오늘 이걸 살펴보겠습니다.
갈등심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바벨론 정복 후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를 공포했습니다. 1절만 읽어볼까요?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나와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면 너무나 명백하고 어쩔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결단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해방 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인정하고, 그 이스라엘 소수민족에게 다른 페르시아 시민들이 짐승이나 물건들을 지원해 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레미야와 이사야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회복의 말씀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이죠! 5절 읽어봅시다.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이스라엘 지파가 12개인데, 그중 유다와 베냐민과 레위 지파만, 그것도 족장들과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과 같이 대부분 포로 1세대, 나이가 많은 장로들 중심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반응한 상황입니다. 그니까 한 마디로 대충 전체의 적어도 95% 이상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이유가 뭘까요? 지금 이스라엘 고향은 지금 황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그 땅은 이방 족속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땅으로 가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또 마찰을 빚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무엇보다도 페르시아가 살기 좋았습니다. 웅장하고 거대하고 위대하고 방대했습니다. 그 화려함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도 어느정도 먹고 살 수 있었어요. 다니엘서 보면 알겠지만 조금 잘생기고 똑똑하면 바로 왕궁에서 일할 수 있었어요. 왕을 숭배하는 것 빼고는 출신성분과 상관없이 능력있으면 바로 취업할 수 있는 나름 자유로운 국가였어요. 그런데 이러한 바벨론보다 페르시아는 더 자유로웠어요. 아예 지방자치권까지 부여했습니다. 고레스 왕을 신처럼 숭배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어요. 그 누구도 이런 환경을 등지고 아무것도 없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굉장히 비슷하죠? 그러면 제가 질문할게요. 여러분은 지금 당장 하나님 나라에 정말 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지금 나름 괜찮게 살고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딱히 생각 안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금까지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았고, 안주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상태 아닙니까?
50년 전에 사라진 이스라엘의 신앙,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왜곡되고 퇴색되기 시작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계승하는 일에 의지가 없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죠. 모두 황폐해졌기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가 재건될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현실적인 눈으로 교회를 보면, 나 자신을 보면, 그리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가질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계승할래야 계승하려는 의지조차 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에요. 우리 눈에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죠. 오히려 교회는 더 위축되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처럼 공중권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딱히 큰 불만 없이 살아가며 안주하고 있을 위험이 높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자, 이제 이러한 우리의 의지박약 상태를 소생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등장합니다.
복음선포
도대체 이렇게 의지박약인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기가막힌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7절 읽어봅시다.
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그 방법이 무엇이냐면 옛적에 성전의 집기들, 그릇들을 보존하셨다는 거예요. 포로기 동안 말이죠.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했을 때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집기들을 부수거나 자기 성전으로 옮겼습니다. 이후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그릇들을 바벨론의 신당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에게 굴복당했다는 것을 의미했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보고 모두 하나님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동화되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세속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50여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 후 자유를 허락받고, 폐허 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고레스가 갑자기 느부갓네살 신당에서 이스라엘 성전의 집기들을 가져온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그릇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예배입니다. 신앙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황폐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성전에서의 임재의 흔적을 보존하시고 계셨던 거예요. 연속성의 상징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바벨론의 신에 대한 굴복의 상징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지금 완전히 하나님의 소망의 상징으로 단번에 전환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물려줄 신앙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이 은혜를 경험한 유다, 베냐민, 레위 제사장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아마 자신의 믿음없음을 한탄하고 눈물로 눈물로 처절히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요한복음 20장에서 제자 도마가 믿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에 내 손을 넣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며칠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 잔인하고도 징그러운 십자가의 흉터를 거룩한 부활체의 몸에 일부러 남겨두셨습니다. 왜죠? 바로 도마의 의심을 미리 아시고 그의 의심을 제거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 순간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부활의 상징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죽으실 때의 예수님과 부활의 예수님의 연속성을 보여주신 거예요!
이제야 도마가 믿게 됩니다. 도마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믿었을까요? 아마 예수님을 의심했던 자기 자신이 너무 죄송해서 펑펑 울었을 거예요. 아마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 제사장들도 성전 그릇들 앞에서 분명히 펑펑 울었을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전은 바로 우리입니다. 고전 3:16절에 이렇게 말씀하죠.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세상에 안주하며 살고 있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성령”입니다. 성령을 어떻게 확인할까요? 교회예요. 사도행전 20:28절 읽어봅시다.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성령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아는지가 질문이었죠? 바로 교회를 끝까지 붙잡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면서 이루신 게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명확한 증거가 바로 교회입니다. 주의 백성이 모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 실천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이죠.
비록 교회도 불완전하여 여러 아픈 모습을 보여주지만, 하나님은 세상 풍파와 전쟁과 기근과 핍박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절대 막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예수님 이후 2천 년이 지나도록 복음이 왜곡되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가 계승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생명을 포기하며 증거를 마련하셨는데 내 신앙이 무너지고 있다고, 내가 슬럼프에 빠졌다고, 한국교회가 타락해 간다고 하나님 나라가 위태롭게 보이고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아서 점차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보면 하염없이 회개가 나오고 눈물만 나는 거죠.
비전제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약 10년 전, 2014년에 개봉한 영화인데요, 북한의 지하교회 핍박의 실상을 고발하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순교당한 아내를 구하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아등바등 탈북하려고 하다가 결국 붙잡혀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애쓴다고 되는 게 없더라” 그러면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죽습니다. “사랑하는 철호야 나를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자기가 혼자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아등바등했던 지난 일들을 내려놓고 아내가 믿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순교합니다.
이게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 번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베드로는 계속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내포된 뜻이 뭐냐면, “주님께서 우릴 위해 친히 부활하셨는데, 내가 너무 연약해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래서 감히 주님을 직접 사랑한다고 말을 못하겠습니다.”라는 회개가 담긴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회개를 받으시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죠.
여러분에게 지금 주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사랑하는 00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자신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을 너무 사랑하며 살았어요.
이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을 포기하시면서까지 남겨주신 신앙의 유산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릇을 남겨주신 것처럼, 예수님이 도마에게 못자국을 남겨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성령의 증거인 교회로 연속적인 신앙의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풍파와 핍박에도 성령께서 계속 신앙이 계승되도록 남겨두신 이 역사를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세속적으로 살았던 나를 눈물로 눈물로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여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말씀과 교회를 보면서 다시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세요. 넘어져도 쓰러져도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주님 사랑하기를 결단하세요.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의 포로에서 하나님 나라로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귀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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