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요21:15-19)
Notes
Transcript
일시 : 2023년 12월 6일 수요일
제목 :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본문 : 요한복음 21장 15-19절
1.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최고의 가치
1) 돈에 움직였던 기성세대, 가치에 움직이는 MZ와 ZA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 요소는 무엇입니까? 기성세대 대부분은 ‘돈’에 그 힘이 있다 대답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MZ세대 그리고 잘파(ZA)세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 요소는 무엇일까요? 저 역시 MZ세대의 목사라 공감이 되는데, 이 세대가 움직이는데 기준을 두는 요소는 바로 ‘가치’ 입니다. “이것이 내게 가치가 있는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릅니다. 기성의 경우 한 두명의 친구와 수업도, 밥도, 여과시간도 다 함께 보내는 케이스였지만, 지금은 수업 친구 따로, 밥 친구 따로, 여과시간 친구 따로 둡니다. ‘가치’의 차이가 있기에 굳이 관계에 애쓰지 않습니다. “나랑 취향이 달라? 그럼 넌 나랑 남이야.” 이런 태도와 표현, 너무 상처 아닙니까? 근데 이들은 괜찮다 말합니다. 왜요? 애당초 적을 둘 마음이 없고, 서로 상처 받을 마음도 없습니다.
어쩜 달라도 이렇게 다를까 싶지만, 우리의 세대고, 청년들이고, 자녀들입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미래이자, 우리 전체 인구의 무려 35%를 차지하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세대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바로 ‘가치’ 입니다. 반대로 이들의 가장 취약점 역시 ‘가치’ 입니다.
누군가에게 돈이 최고 가치로, 명예가 최고 가치로, 관계가 최고 가치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전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자주 바뀌는 것을 이들의 특징이라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만족의 기간이 너무 짧기에 또 다른 트렌드를 찾아 ‘가치의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애잔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만족을 찾아 떠나는 그 여행을 멈출 수 있는 가치.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에게 필요한건 어렵지 않습니다. 또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예수로 사는 삶의 가치가 얼마나 큰 행복이고 변치 않는 기쁨”인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2. 가치 있는 삶이 되려면 : 나의 힘을 빼고 예수로 사는가?
1) 혼란의 베드로, 그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을 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꽤나 불편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대 예수를 떠나지 않겠다 대답했는데, 두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자기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도 혼란스럽지만, 외부적으로도 꽤나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배경과 지금 본인이 처한 배경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8절, 첫 번째 예수를 부인했던 그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리고 두 번째 부인했던 장면을 요한복음 18장 25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예수를 부인하던 모든 상황 가운데 그는 숯불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요? 요한복음 21장 9절을 보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다시 예수를 만난 지금 역시 베드로는 숯불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내적으로도 충분히 혼란이지만, 외부적으로도 데자뷰가 아닌가 혼란이 들법한 상황 가운데 베드로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 제가 베드로였다면, 압박감이 너무 커 도망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불편하고, 차라리 책망과 저주나 징계를 주시면 조금 속이 후련해질까 싶은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베드로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가혹합니까? 스스로 잘못한 걸 알고, 또 자신을 통해 예수님께서 상처 받았을 것도 너무나 잘 알기에, 차라리 책망을 하셨음 했는데 왠걸요? “네가 나를 사랑하냐”는 이 질문이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대답합니다.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답하시죠.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양을 먹이는 일’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치유도, 회복도 여러 사역을 감당하셨지만, ‘양을 먹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곧 바로 또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입장에서 얼마나 어려운 질문인지 이제 공감이 좀 되십니까? 책망해도 모자르고, 저주를 해도 겸허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데 ‘사랑하냐’ 물으시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시는 사역을 자신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또 물어요. 나를 사랑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사랑하지 않기에 ‘사랑한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리 답합니다. “네 양을 치라”
앞서 ‘먹이라’는 그저 돌봄에 그치는 수준이었는데, ‘양을 친다’는 것은 돌봄에 그치지 않습니다. 양을 치라는 건 ‘목자다운 목자’가 되라는 겁니다. 누군가 시켜 마지못해 일하는 무기력한 노동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라는 겁니다. 너에게 맡겨진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걸라는 겁니다.
제가 베드로였다면 심장이 터졌을까요? 베드로 역시 부담이 너무 컸을 겁니다. 이제 더 이상 묻지 않으셨으면 했을지도 모릅니다. 속으로는 ‘제발, 주님. 그만 물어보세요! 지금도 저는 미쳐버릴 것 같은걸요.’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2) 혼란을 넘어 근심까지 생긴 베드로 : 자기 자신을 내려놓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한 번 묻습니다. 베드로의 바램은 어쩌면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였겠지만, 애석하게도 예수님은 또 한 번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왜 근심합니까? 오늘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전과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어떤 전과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자 베드로가 어찌 대답합니까? 요한복음 13장 37절을 보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분명 최근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도 버리겠다’ 답 했거든요. 근데 목숨을 걸고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시고, 덧붙여 나를 사랑하냐 물으시는데 베드로 입장에서 근심이 안되면, 사실 그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여하튼,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마음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담대히 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확고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무엇을요? 자기 자신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100%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목숨을 버리겠다 대답했던 그 때도 그는 100%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100%의 확신이 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지 못할 수 밖에 없고, 더욱 혼란 가운데 놓이는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놓인 베드로가 답합니다. ‘내가 확신 가운데 있음도 알고, 동시에 그 확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도 안다.’ 그렇기에 그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답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던 지난 날을 던져 버리고, 모든 판단을 예수께 두기로 합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결정하시고 이끄시는 것들이 가장 큰 가치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드러나는 삶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삶의 우선순위를 과연 누구에게 두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곧 내 힘을 빼는 것입니다. 한 번 점검 해보셨으면 합니다. 2023년의 내 삶이, 또 오늘 하루의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었는지 또는 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었는가를 말입니다.
3) 간증 : 내가 아닌 예수를 택하는 삶
최근 제 삶에 큰 결정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마음 한켠에는 순종해야 한다는 기류가 맴돌고 있었고, 또 다른 한켠에는 이기적인 기류가 맴도는 겁니다. 근데 저도 한낱 연약한 죄인인지라 계속 이기적인 기류가 더 강하게 휘몰아 치더군요.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이런 말씀을 주시더라구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 이기적인 생각도 들킨 것 같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오늘 기도는 여기까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마쳐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다 또 순종의 기류와 이기적인 기류가 치고 박고 싸우고 난리가 제 안에 일어났고, ‘그래, 순종하자.’ 라 생각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광원아. 난 네가 필요해.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니?”
제가 없어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분이신데, 순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은 자를 향해 필요하다 하시고 손 내미시는데, 이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목사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내 의’를 드러내면서 어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우선으로 살아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3. 나의 힘을 빼고 예수로 살려면? :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느껴라
1) 나를 사랑하느냐? =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한단다
나의 힘을 빼고 예수로 살아내는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닐 겁니다. 베드로 역시 한순간에 예수님을 우선으로 수용한 것은 아닙니다. 100% 확신했지만 배신하는 연약함도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 심히 어려운 일이었고, 오늘 날 우리에게도 심히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나의 힘을 빼고 예수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기에, 우리는 1차적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넘어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곧 “너는 나를 부인했지만, 나는 널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택했단다.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이제야 알겠니 베드로야?” 라는 의미를. 수치심과 죄책감에 고개들 수 없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할꺼야.” 라는 예수님의 고백과 다짐을 베드로에게 확인시켜줍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향해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말씀하신 것도 “네가 저들 중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의 크고 넓음에 따라 사역을 맡기심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기만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역을 맡기실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를 향한 자신의 사랑도 물론 있었지만, 그 넘어에 ‘자기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의 힘을 빼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날 복음의 가치를 놓친 MZ세대나 잘파세대에게 예수의 가치를 전하고 싶으십니까? 그들를 향한 열정과 마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이들을 사랑하는 것, 너무나 중요하지만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고 있는가 점검 해보십시오.
나의 우선순위가, 나의 삶의 최고 가치를 우리가 예수께 두었는가. 만약 우리 성도님들 마음밭에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갈등을 허락하셨다면,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올려 보십시오. 헌신의 근거는 내 의와 환경이 아닌,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연말이 되면 그렇게 목회자들의 연락 피하기에 급급하다고 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내년에 무엇인가를 시킬까 두려워 피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찌어찌 붙잡히면, “그럼 기도해 볼께요 목사님.” 물론 진짜 기도해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서 기도해보겠다 대답했던 적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왜 회피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지금 내 상황에서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해보는 것 아닙니까? 그 생각들, 다 내 기준, 내 입장에서 보는 생각들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 진짜 변치않는 가치가 있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 아니겠습니까?
이 세대를 위해, 이 교회를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계시다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우선시 되어 있는 삶이라면 “나를 따르라”는 부름에 아멘으로 순종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하나님의 열심
-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의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 대답이 더 이상 자신감과 의욕이 앞선 대답이 아님을 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무엇을 하셨는지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가 세 번을 대놓고 공공연하게 주님을 부인했어도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너 나 사랑하니?” 라는 말로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일으키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먼저는 우리를 "사랑한다 내 딸아, 사랑한다 내 아들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순종하며 주님만 바라는 자가 되게 해 달라 기도합시다.
- 욥기를 보며 그의 고난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우리의 계획과 다른지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얼마나 많이 또 자주 다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에 헛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나아가겠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나를 향한 주님을 보며 살아내겠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잊지 않으시는 주님을 온전히 붙들고 나아가겠습니다. 나를 사용하사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게 하소서,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삶 내어 드리며 함께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2. 나의 하나님(후렴)
- 다음세대와 이 땅의 믿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청년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그들의 삶 속에 임하셔서 주님을 알아가도록,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자들 되게 하소서.
악함이 가득하고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아 두렴 없는 믿음과 거룩히 살아갈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