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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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많으신 주님, 이 시간 성령의 은혜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말씀이 증거되는 가운데,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선포하는 가운데, 우리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함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서 함께 임재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1-13절이 한 단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4절은 주기도문 축약형이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이 중심된 내용이 아니라 간략하게만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어지는 5-10절은 우리에게 익숙한 <강청하는 기도>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11-13절에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비유가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도전, 성령의 임재로 연결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시금 우리가 기도함에 있어서 담대함으로, 또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먼저, 우리가 주기도문을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합니다. 이 두 측면이 없이 그 뒤에 내용이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사실 이러한 전제 조건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듯이 용서하는 삶으로 나아가며, 죄에 대한 용서를 적극적으로 간구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영적인 싸움 속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합니다. 가장 핵심은 하늘의 기도를 드리고, 그것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주기도문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의 주어가 ‘나’가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한글에서는 ‘나’와 ‘우리’를 동어어처럼 쓰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주기도문은 하늘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는 마태복음판 주기도문의 결론과도 너무나도 잘 이어집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빼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주기도문과 더불어 오늘 본문과 연결 짓는다면, 기도라는 공통 요소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줍니다.
1. 신자의 기도는 하늘 아버지를 향한다.
2절에서 기도의 대상이 언급됩니다.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언급됩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측면이 바로 이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부르고, 또 그분의 성품이 무엇인지 온전히 아는 것이 기도의 가장 결정적인 측면을 좌우합니다. 13절에서도 동일하게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문의 단락이 하늘 아버지로 시작해서, 하늘 아버지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대상인 아버지를 명확히 알고, 이를 분명히 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옛날 선조들이 물을 떠 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것, 일월성신께 비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부처와 알라와 어떤 측면에서 다른지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부처와 알라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분명히 알 때,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자세 또한 달라집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5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하는데,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되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5-10절은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큽니다. 5-10절이 보통은 ‘강청하는 기도’라고 말씀하는데, “무리하게 억지로 청하는 기도” 인거죠. 한 밤 중에 이웃 친구의 집을 두드리고, 또 갑작스레 빵 세 덩어리를 빌려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제한된 관념으로 본문을 보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가령 문화마다 상징과 기호를 달리 받아들이는 거죠. 가령 우리가 V를 표시하면 어떻습니까. 사진을 찍을 때 많이들 취하는 포즈이죠. 윈스턴 처칠처럼 Victory의 승리를 상징하듯 사진을 찍을 때, 이러한 포즈를 많이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나 터키에서는 모욕감을 주는 제스처라고 합니다. 조금더 이색 있게, 손등을 뒤집에서 포즈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타문화권에서는 손등을 뒤집으면 더 심각한 표현이 되기도 하는데, 영국,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다”라는 조롱의 표현이 되기도 한답니다.
이렇듯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문화에 대한 이해가 다소 중요하다는 인식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서양권과 동양권의 문화가 다르듯 성경의 문화권에 대한 재조명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서양 문화권는 개인 문화가 강한 반면, 동양 문화권은 집단 문화가 강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면서도 이처럼 문화를 고려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보통은 서양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동양의 문화권으로, 집단 문화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을 이해하면서, <명예와 수치> 문화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8절을 보면,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대해서 8절의 내용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8절의 간청하다라는 단어는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용례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간청함’으로 끈질기다는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케네스 베일리 등의 학자들을 보면, 동시대의 문헌들을 보면 이 단어는 “수치심, 파렴치함, 몰염치”으로 번역되었다고 말합니다. 거의 모든 문헌에서 이처럼 번역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8절을 다시 번역한다고 하면, “그 수치로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7절에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노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곧 몰염치라는 겁니다. 이러한 거절이 수치라는 겁니다.
아직 잘 이해가 안되실 겁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의 문화가 개인 문화 사회가 아니라, 집단 문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문화권인 현대의 중동 등에서도 이 본문을 보여주면, 절대로 이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마을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지역에서 한 개인의 손님으로 온다고 해도, 이것은 곧 마을의 손님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개인주의 문화가 아니라, 집단주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손님에게 “우리 마을은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제스처를 줄 수 있어야 하고, 떠날 때에도 마을의 환대를 받고 떠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개개인이 마을과 집단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헌신하고 섬겨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천사들을 굳이 초대해서 식사를 하게 하고, 극진히 대접한 뒤에 떠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화가 낯설 수 있습니다. 한국도 집단문화라기 보다는 이제는 개인문화가 아주 짙어졌기에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저 또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라는 지역을 가보았는데, 이러한 유사한 문화가 있습니다. 한 산악 지역을 탐방하고 있었고, 길에서 만난 몇몇 아이들이 저희를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점차 해가 저물어 갈 때, 당시 자칫하면 산에서 캠핑하듯 자야 할 경우가 생겼는데, 한 아이가 저희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주었습니다. 이러한 문화를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괜찮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괜찮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럼에도 한사코 괜찮다는 겁니다. 집에 들어가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직 부모님은 집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부모님들이 집에 와서 얼마나 당황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집에 복귀하고도 당황해하지 않고 진심으로 반겨 주었습니다. 낯선 이방인이고, 외국인이었지만, 그 환대가 참 한 가족처럼 따뜻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정말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주고, 선물까지 서로 교환하는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잠자리까지 쾌적하게 마련해주었던 것이 아직까지 생각이 납니다. 당시 들었던 생각은 이들은 무슬림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환대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화인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죽음과 같은 불문율과 같은 거지요. 이러한 문화를 알고서 8절을 보면 다소 다르게 이해되어 집니다. ‘벗됨’보다도 문화적 수치로 인해서 그 요구를 들어준다는 겁니다. “몰염치와 파렴치함”을 피하기 위해서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7절에서 청중들에게 질문하실 때에는 아무도 No라고 말할 사람이 없는 그런 자명한 질문을 하셨다는 겁니다. 빵을 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5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허락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실 이것도 예수님의 수사학적 방법입니다. 허락되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신 겁니다. 한 밤중에 문을 두들기는 겁니다.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이것은 무례함입니다. 문도 잠근 상태이고, 아이들과 함께 모두 침실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결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친구라도 무례한 것이고,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환대로서 빵을 빌려주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들기는 이유가 명확합니다. 여행객인 손님이 찾아온 겁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밤중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밤중에 도착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내륙 지방은 낮 시간에 이동하는 경우가 더 흔했다고 합니다. 이 지역 자체가 높은 지대이고 바닷바람도 불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드문 상황에서 느닷없이 여행객 손님이 온 겁니다. 그러면 이 손님을 그저 재우고, 내일 아침에 먹이면 안되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동 쪽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손님을 최선을 다해서 예우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먹던 음식을 그대로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명예, 또 집단 전체의 명예와 연관된 일이었으니깐요. 그래서 지금 주변에 실례가 되지만 빵을 얻으러 이웃집에 간 겁니다. 그렇다고 모든 집들의 집을 두들렸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나름 합리적인 이유는 당시에는 마을에 공동 화덕을 이용하여 빵을 구웠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집에 빵이 여유가 있고, 또 없는지 쉽게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가 기도를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도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주기도문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안 들어주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집 주인이 친구로서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마을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기에 일어나서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기도의 자리에서 담대하게, 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 하늘 아버지는 성령을 주신다.
이러한 본문 가운데 결론 부분은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들어서 제게 아주 새롭게 인식되는 것은 무엇이냐면, ‘중생’과 ‘성령 충만’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중생과 성령 충만, 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이지요. 중생의 경험은 우리가 선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곧 중생의 경험이기에,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중생의 경험 또한 특정한 시점을 잡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성령께서 충만히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선명하게 인지되어 집니다.
복음서에서는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또한 메시아임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성령께서 임하실 것을 거듭해서 이야기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었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도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온전히 이해하여서 많은 회중들에게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촉구할 수 있었던 담대함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는 겁니다. 나의 힘과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덧입혀지며, 하나님의 지혜로 선포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해야하고, 또 기도해야만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귀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부지런히 먹이고, 입힙니다. 아무리 악하다고 하더라도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고,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먹이고, 입히고, 정성을 다해서 키웁니다.
하물며 지극히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욱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데, 성령을 주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공생애를 보내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은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기도를 강조하고, 성령을 매우 강조합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우리 또한 주님과 같이 성령을 구하며, 주님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3. 그렇기에 담대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지막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제는 우리가 담대히 구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다 준비하시고, 예비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여전히 주저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주기도문과 성령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것을 구하는 가운데, 이 땅의 필요들 또한 채워집니다. 성령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가장 반복되고 강조되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도전대로 나아가야합니다.
먼저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입을 여는 겁니다. 가장 쉽게, 그리고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가장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겁니다. 본문의 문맥과 의미를 기준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를 드려야겠습니까. 단순히 내 개인적인 기도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가정과 각 부서와 기관,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기도로 들으십니다. 주기도문은 계속해서 공동체적인 기도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부흥의 역사 또한 공동체적으로 임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가 있기를 간절히 구하기 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극적으로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 겁니다. 본문에서 여행 온 손님을 위해서 이웃집을 향해 나아갔던 사람과 같이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찾으러 가야합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을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비전을 찾기 위해서 이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행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빵 세 덩이를 간절히 찾는 이처럼 우리 또한 그러한 간절함이 엿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민감하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정말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전인의 기도요, 진정어린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두드려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웃 친구의 집을 두드리는 것이고, 우리는 하늘의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두드리는 사람 자체에게는 수치가 될 수도 있고 망설여지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두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 두드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반드시 간구할 것이 있습니까. 이성적이고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이유에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반드시 간구할 것이 있습니까. 이웃의 친구의 잠을 깨우고, 그것도 모자라 온 집안의 사람들을 깨우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간구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몰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몰염치로 나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는 나와 우리 모두의 간절함이 담기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여행 온 객에게 필요한 것이며, 또한 동시적으로 내게도 필요한 것이며, 같은 마을 안에서 명예롭게 살아가는 이웃의 친구에게도 필요한 것이며, 그들의 가족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간구이자, 온 교회의 간구입니다. 그렇기에 이 기도는 결코 거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또한 그 분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가 잠시 부끄러움에 있다 하더라도 용기 있게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이 베풀어지기를 구합시다. 또 나와 접촉이 있는 사람들 중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이 베풀어지기를 구합시다. 또한 우리 교회 주변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까.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이 베풀어지기를 구합시다. 이들 모두에게 충분하고도 넘치는 하늘의 양식이 베풀어지기를 구합시다. 늦은 저녁 식사 뿐만 아니라, 다음날 아침과 또 나를 떠나서도 충분히 먹을 양식을 구합시다.
우리의 기도가 단박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했음에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 때로는 은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 또한 동일합니다. 우리의 원하는 때에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응답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간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때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9-10절이 우리의 담대한 믿음의 선포가 되길 원합니다. 믿음의 선포로서 큰 소리로 외쳐 읽습니다.
누가복음 11:9–10 (NKRV)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의 기도는 하늘 문을 두드리는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담대히 하늘 문을 두드릴 때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겁니다. 또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십니다.
히브리서 7:25 (NKRV)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들으시고, 우리의 부족한 간구들 친히 하늘 아버지께 대언하셔서 간구하실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어서 무엇을 망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동행하시고, 친히 간구하실 겁니다.
<찬양>
이전에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애통함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기 원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이십니다.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1. 말씀을 결단하며 기도
성령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을 신뢰하며,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니성령의 임재를 허락 하소서. / 가정과 교회와 지역에 주님의 부흥을 허락 하소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하늘의 기도를 드리니, 우리의 필요 또한 채워 주시는 은혜를 허락 하소서.
2. 환우들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주님의 보혈로서 우리를 덮어주시고, 또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옵소서. 우리의 죄됨과 연약함을 모두 담당하신 주님 이 시간 주의 치유의 손길로서 환우분들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3. 교회를 위한 기도
연말 가운데 온 성도의 영육 간의 강건함을 허락 하소서. / 주의 은혜 속에서 교회적인 화평함과 평안함을 허락 하소서. / 내년을 소망함 속에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준비케 하시고, 모든 성도들의 성품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충만함을 주옵소서. / 늘 교회 안에 기도의 일꾼을 세우사, 기도의 기름부음을 허락하소서.
4. 가정과 개인을 위한 기도
온 가정이 주님을 함께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고,주님께서 머리 되시는 가정되게 하소서. /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주님을 알고 기뻐하도록 하시고, 성령께서 자녀들을 양육하시고 이끌어 주소서. /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영광의 때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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