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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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입니다
[서론]
푸른 나무 재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그 피해자들을 돕는 기관입니다.
이곳을 설립하신 분이 김종기라는 분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이곳을 설립하시고 27년 넘게 학폭 피해자 청소년들을 돕고 계십니다.
원래 이 분은 삼성에서 잘나가는 분이셨습니다.
입사한지 10년만에 홍콩법인장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날 그 대기업을 그만두고 이 단체를 설립하셨습니다.
어쩌면 유키즈에서 여러분들도 그 분을 보셨을지 모릅니다.
그 분 아들이 고등학교때 학교폭력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아들이 견디다못해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자동차 위에 떨어져 살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다시 걸어서 아파트 고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두번이나 시도할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듣고 참 기가막혔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학생의 아버지가 이 기관을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은 이 가정에 참 이루말할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이 기관을 설립하실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하던 때였는데 그 분이 발벗고 나서신 것입니다.
그 기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인해 학교폭력방지 특별법까지 제정될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참 많습니다.
부모한테 버림받은 보육원 출신분이 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기관을 만들어 돕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그 어려움을 잘 알기에 누구보다 더 잘 도울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난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될수 있습니다.
유익이 될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유익때문에 우리는 고난이 선한 것이라고 과연 말할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 깊어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욥이 아닌 욥의 친구 엘리후입니다.
이 친구는 31장까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뉴페이스 입니다.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욥과 세 친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러니까 원래 친구가 4명이었는데 그냥 입다물고 옆에서 듣고만 있었던 겁니다.
엘리후의 말이 32장부터 등장하는데 그 바로 앞에 나온 29-31장이 욥의 최후변론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하는 것처럼 최후진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판사이신 하나님의 판결이 곧바로 나와야할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이야기는 38장이 되어서야 나옵니다.
그러니까 엘리후의 말은 욥의 최후진술과 하나님의 말씀 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럼 왜 갑자기 엘리후의 말을 끼워 넣었을까요?
엘리후의 말이 욥기 전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세 친구들이 한 말과 엘리후의 말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세 친구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엘리후에 대한 책망이나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엘리후의 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어 그냥 무시하신 것일까요?
아무튼 이런 점들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엘리후의 말을 욥기에서 빼도 크게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렇지 않습니다.
빼도 상관없는 사람의 말을 성경에 이렇게 길게 써놓았을리가 없습니다.
성경에 분량이 많이 나오거나 어떤 단어가 자주 등장하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말이 세 친구들보다 훨씬 깁니다.
심지어 32장부터 37장까지 무려 6장에 걸쳐 네개의 긴 연설이 등장합니다.
또한 엘리후에 대한 소개도 다른 친구들과는 좀 다릅니다.
32장 2절입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다른 세 친구들에 대한 소개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
이렇게 소개한게 끝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자기 가문과 아버지 이름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뭔가 중요하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또한 아버지 이름 바라겔은 ‘하나님이 복 주시길’ 이라는 의미이고, 엘리후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때 우리는 엘리후의 말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2장에서 엘리후는 도저히 답답해서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을수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제일 어리기 때문에 가만있었습니다.
위계질서가 있으니까 조용히 나이든 세 친구들과 욥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곧 경험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 친구들이 욥을 잘 설득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듣고만 있을수 없어 자신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고난이 모두 그의 죄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이 보기에 이 세상은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원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욥이 죄를 지은게 아니라면 이런 고난이 그에게 있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자신은 이런 고난을 받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억울해 하며 친구들과 변론하고, 하나님께 탄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후진술에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이 억울한 사정을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에 대해 엘리후는 어떤 입장일까요?
누구 한쪽을 편들지 않습니다.
그는 양쪽을 모두 비판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양비론을 펼치는 것입니다.
먼저 엘리후는 욥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12-13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욥 어른께 감히 말합니다. 어른은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수 있습니까?
엘리후는 세 친구들과 달리 욥의 말을 인용해서 조목조목 잘못을 지적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왜 욥의 불평에 모든 대답을 꼭 하셔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훨씬 크신 분인데 일일이 당신의 불평에 대해 대답하실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런 의미입니다.
덧붙여 엘리후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지 않으신게 아니라 욥이 못알아 들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4절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뿐입니다.
못들은 것은 욥의 잘못이지 하나님을 탓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사람이 알아들을수 있도록 계속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의 때에 가장 괴로운게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멀리 떠나 계신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일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라는 굉장히 유명한 감독의 영화입니다.
일본에 복음이 전파되었을때 핍박받았던 크리스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영화제목이 사일러스인 이유가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불에 타 죽거나, 뜨거운 온천물에 살이 파이고, 파도에 온 몸이 찢겨 죽어가는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회 신부들과 크리스천들이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변화도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의 괴로움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필요할때에 오히려 침묵하시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15-18절입니다.
사람이 꿈을 꿀 때에, 밤의 환상을 볼 때에, 또는 깊은 잠에 빠질 때에, 침실에서 잠을 잘 때에,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경고를 받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며, 사람의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악몽이나 희한한 꿈을 꾸지 않습니까?
자고 일어났더니 찝찝할때 있지 않습니까?
엘리후 말에 의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꿈과 환상을 통해 우리가 죄악의 길, 사망의 길로 가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또한가지를 소개합니다.
19-26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병든 사람은 입맛을 잃을 것입니다. 좋은 음식을 보곧 구역질만 할 것입니다. 살이 빠져 몸이 바짝 마르고, 전에 보이지 않던 앙상한 뼈만 두드러질 것입니다. 이제 그의 목숨은 무덤에 다가서고, 그의 생명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질병이라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욥이 겪고 있는 고통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통로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우리들이 잘나갈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교만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병이나 고통을 통해 우리가 낮아질때 우리는 눈과 귀를 열게 됩니다.
마음이 몹시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메가폰처럼 우리에게 너무 잘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대로된 신앙을 갖게 된 계기가 큰 고난을 겪고 난후라고 고백합니다.
예를 들어, KBS 최선규 아나운서의 간증을 들어보니 그분도 자기 딸이 거의 죽다 살아났을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마음이 가장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23-26절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천사 천명 가운데서 한 명이 그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천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그를 살려 주어라. 내가 그의 몸값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건강도 되찾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당할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자신의 뜻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건강을 회복할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게 몸값, 죄값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죄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값을 받은 것으로 여기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7-30절입니다.
27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옳은 일을 그르쳤으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28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구원해 주셨기에, 이렇게 살아서 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29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이렇게 되풀이하시는 것은,
30   사람의 생명을 무덤에서 다시 끌어내셔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그것은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양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채찍질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분명 세 친구들의 주장과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고난이 곧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난은 없어야 좋은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주장에 따르면 고난은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됩니다.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죄의 구렁텅이 빠져 멸망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요?
고난이 하나님의 교육용 목적으로만 사용되던가요?
세월호 참사로 죽은 자녀들때문에 내내 슬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교육용 목적이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엘리후의 말처럼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큰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함부로 죄의 문제다, 하나님의 교육용 목적이다 말하기 힘듭니다.
물론 많은 경우 고난이 죄의 문제일수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면 그에 대한 대가 지불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게 세상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때로 고난과 고통 때문에 더 큰 선을 이루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푸른 나무재단이 그렇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들은 도저히 해석할수가 없습니다.
자연재해나 재난, 전쟁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에 어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다고 함부로 말할수 있을까요?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앞서 소개한 사이런스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자들이 크리스천들을 걸러내는 테스트가 있습니다.
성화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화아시죠?
예수님 그림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회 신부에게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그림을 밟으면 성도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딜을 합니다.
예수회 신부가 그 성화를 밟고 지나갈까요?
그는 엄청 고민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두렵습니다.
당신의 침묵의 무게가 두렵습니다.
저는 허공에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때 그는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어서 밟아라, 너의 고통을 잘 안다.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발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님이 침묵하시지만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고통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 고통의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다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비밀이자 신비라는 믿음 말입니다.
고난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믿음으로 나의 고난의 때에 위로를 받고, 이웃의 고난의 때에 참된 위로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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