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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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절 그리고 믿지 않는 것!

민수기 28:7 “7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
이사야 12:3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본문의 이야기 구성을 먼저 살펴보면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하시는데 유대로 가지 않는 이유가 ‘유대인들이 죽이려'한다고 시작합니다. 이런 흐름은 예수께서 ‘죽음을 피하시려는 의도'로 읽혀집니다. 그렇게 시작된 글은 형제들의 말 즉 ‘죽음을 피하시려는 의도'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는' 사이의 갈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제로 끌고와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줍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희망을 주는 행동이고 6장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구약의 예언에 따라 ‘그 선지자'와 ‘왕'으로 연결해 무리의 대장 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죠.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구조 즉 ‘히어로' 를 등장시켜 사람들을 매료시키죠.
7일간 행하는 ‘초막절'이라는 (초막절에 대해서는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 명절이 유명세를 극대화 하는 기회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3-4절의 짧은 구절에 ‘그 형제들' 이들이 ‘유대로 가라' 4절 왜냐하면 드러내기를 원하면서도 갈릴리에서만 숨어 있다면 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에게는 추석과 같이 긴 명절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죠.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바로 ‘우리가 보고 듣고 사고하는 방식'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1장부터 이미 우리가 보고 사고 하는 영역을 넘어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팩트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형성된 가치를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형성이 됩니다. 예수 당시의 세계관은 무엇이었을까요? 로마가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지중해 연안 그리고 이집트까지 또한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삼았고 계속해 확장되어가는 로마는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의 세계관을 덮어 버렸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문화는 그리스의 것을 가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로마는 곳곳에 ‘로마신'을 전파했습니다. 힘으로 지배하고 세력을 확장함으로 로마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이죠.
이런 힘에 의한 방식은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다니엘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던 세상의 방식입니다. 2장에 느부갓네살 왕의 환상에(두 장) 나타난 거대한 신상은 머리부터 다리까지 각 시대의 나라를 대표합니다. 바벨론으로 시작한 나라는 메대와 페르시아 그리고 헬라 다시 로마로 이어졌다가 많은 나라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상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힘을 키우고 기존의 약해진 세력을 뒤엎어 세워가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죠. 그러니 사람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를 형제들 역시 이러한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세계관을 갖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는 없을까요? 저는 최근 두 교회에서 월드비전의 미션 연주를 참석하거나 유튜브의 방송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두 교회에서 아주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공연을 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목사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것이죠. 큰 교회라는 힘, 다시 말해서 돈이 있기 때문에 저 정도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이렇게 돈, 즉 물질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교회까지 넘쳐나고 있다는 것이죠. 오히려 좋은 답은 수고하는 월드비전을 더 후원하고 아이들을 보내어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은 답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야말로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 민족을 이끌어 다시 회복시키고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이다. 그러니 7일 동안 행해지는 초막절이야 말로 당신이 앞으로 나서서 사람들의 중심에 설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얼마나 절호의 기회입니까? 그러니 올라 가시죠.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러한 우리의 사고를 ‘믿음'과 대립시킵니다. 5절에 ‘이는' 앞서 살핀 3-4절의 ‘그 형제들의 행태를 ‘믿지 않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초막절이라는 절기를 통한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의 요구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장막절)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에는 유월절을 중심에 두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월절보다 대략 6달 후에 있는 명절인데 7일 동안 지키는 명절이고 다음 날인 8일째 ‘총회'가 있는 절기 입니다. 초막절 또는 장막절로 말하는데 ‘장막을 세운다', ‘오두막을 건설한다'는 의미로 레위기 23:34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는 규정을 가지만큼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기를 만들어 지키게 하셨을까요? 장막이나 오두막을 짓고 거기에 거주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설명에 긴 시간을 할해할 수 없어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라는 땅을 주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당장은 집도 거할 땅도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만나, 고기, 물과 같은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면 아직은 해결되지 않은 집과 땅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나안'이라는 소망을 갖게 합니다. 이것이 사막에서의 장막이라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누리는 것이지만 현실은 불편함 그 자체 였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대다수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오늘을 사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를 잃은 이들이게 독립운동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며,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오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인데 굳이 일할 필요가 무엇이냐, 현실을 즐기자는 무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펴보면 이런 사고를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회사에 주어진 일들에 무관하며 자기의 발전과 노력을 등한이 여기면서 교회에서는 그 누구보다 열심이면서 종교적 언어에 심취한 이들이 대표적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인 분들입니다. 예수의 형제들처럼 종교적인 열심을 ‘자기화해서 해석'하는 것이죠. 요즘 세계관의 중심은 바로 ‘자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끝입니다. 보편적 기준은 사라지고 자기 해석의 기준이 지배 합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그때나 지금이나 ‘믿음'이라는 영역까지 침투합니다. 이에 대한 사도 요한은 거침없이 말합니다. ‘믿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는 것은 예수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6절에 자신에 대해 ‘아직 이르지 아니한 것, 너희 때는 늘 준비된 것', 그 때는 7절에 ‘예수를 더 미워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예수께서 움직이시는 가장 중요한 ‘명분' 은 ‘하나님의 일' 일 때입니다. 예수님은 10절에 ‘올라간 후에도 나타내지 않고 은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11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고 찾는 모습은 그들 역시 예수를 왕으로 세워 자신들의 리더를 삼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믿는다는 쉬운 구분을 합니다. 비교가 잘못되었습니다. 오히려 요한 사도는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믿는다'는 말에 ‘예수는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믿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들, 무리들, 예수의 형제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요한 사도는 ‘믿지 않는 것'이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믿지 아니함'이라고 질책을 받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는 당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때를 1차적으로 의미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믿을 시간'을 주신다는 때로도 여전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사라집니다.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은 지중해 연안으로 뿔뿔히 흩어질 뿐만 아니라 성전이라는 정체성은 회복되지 못할 때 그렇게 에베소에 모여든 이들 역시 ‘한편으로는 책망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아직은 때가 있다'는 위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믿음'이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고백하고 분명하게 아는 요한복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미 2천년의 시간이 지나 예수에 대한 공개적인 내용은 더 이상 숨길수 없을 만큼이나 차고 넘치지만 저와 여러분의 것인지는 고민스러운 대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것은 우리에게 ‘꿰어야'하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분명 ‘예수의 때' 아래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한 이유입니다. ‘예수를 향한 미움'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온전히 가지 못하기 때문에 욕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워하지만 종류가 다릅니다. 예수께서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방식으로 사고하니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죠. 예수를 따르는 빌립이 그랬습니다. 무리가 그랬고, 제자라 불리는 이들이 그랬고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그랬습니다.
앞서의 이야기들은 ‘믿지 못했서' 예수의 길을 떠났다면 요한 사도는 ‘믿지 않는다'라고 더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한다'는 요한 사도의 표현은 앞서 보여준 사람들의 그런 행동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초막절'은 광야의 일상이지만 가나안에서도 지켜야 할 중요한 절기입니다. 가나안도 결국은 ‘내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구나' 여기에 집 짓고, 건물 올리고, 땅 사고 그렇게 살지만 7일 동안 ‘장막'을 짓고 불편함 속에 살면서 잊지 말고 생각해보라는 것이죠. 그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6절에 너희 때, 8절에 내 때라는 말씀으로 초막절이 갖는 의미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지금'입니다. 방금의 시간은 과거로 흘려 보내고 지금이 우리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지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마음 먹은 일은 언제해야 합니까? 지금이죠. 하지만 내일로 미룹니다. 다이어트도 내일, 공부도 내일 이렇게 내일로 미루면 결코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때, 즉 도래할 것을 믿는 것은 지금 광야 같은 곳에 거쳐를 옮겨서 7일동안 지금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식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 즉 생각만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연스럽다는 사고와 행동을 예수님의 시선에서 보여주며 이것은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를 먹어야 합니다. 나중에 빌립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난 주 왜 가룟 유다는 시간이 지나서 예수를 팔 수밖에 없었는지를 찾아내고, 다른 인물들은 없는지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맛을 느끼려 설탕만 섭취한다면 결과는 불보듯 뻔합니다. 유능한 요리사는 ‘맛 있다’는 음식을 먹게한 후 각종 재료를 찾아들어가며 맛을 이해하듯 요한 사도는 복음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12명의 소수의 제자들에게 집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의 삶에서 당연한듯 찾아오는 유월절, 초막절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유월절, 초막절을 통해 하신 말씀을 올바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동일하신 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신 분이심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예수께서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 시험을 치루듯 주관식을 푸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삶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에 여러분이 원하시는 미래를 미리 살아보는 각자의 초막절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가장 중요한 믿음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래서 이미 임했다고 말합니다. 초막절로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께서 오심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이미 오신 예수를 성령의 능력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능력은 로마서 14:17–18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너무나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여전히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하면 성령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올바른 길을 따라 살때 찾아오는 평강과 희락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의 형제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러한 삶은 사람에게도 우리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칭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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