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0 양청] 101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Notes
Transcript
오늘 101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101문이다.
101문. 첫번째 간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합니까?
답.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첫번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 모든 것에서 우리와 타인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일을 그분의 고유한 영광으로 처리하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를 가르치실 때, 그 첫번째 간구가 바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였다.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할 때 가장 좋은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살면서 얼마나 구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 부당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억울하고, 곤란하며, 괴로운 일들을 마주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악인들에 대해 분개할 수 있고 실망할 수 있고 때로는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가장 좋은 태도는,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길 구하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 삶이 피폐하고, 각박하고, 여유가 없고, 이기적인 그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길 구하는 기도를 올려드리기가 사실 쉽지 않다. 특히나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하는데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하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시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하나? 나에게 좋은 직장이 필요하고, 좋은 배우자가 필요하고, 여유 돈이 필요하고, 이것들을 하나님 모르시지 않는데 왜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게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렇지 않나? 내 필요한 것을 구하고, 내 사정을 아뢰며 도움을 구하고, 내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시기를 구하는, 철저히 기도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구하고, 또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런 기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 배워가며,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기도란 우리의 믿음의 운동이다" 라는 표현을 한다. 운동, 엑서사이즈. 헬스장 가서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건강한 몸을 위해서. 우리의 근육이 더 단단해지고 더 탄탄한 육체를 가꾸기 위해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도가 믿음의 운동이라고 표현했는데, 신자의 믿음이 어떻게 강화가 되고, 믿음에 어떻게 근육이 생기고, 믿음에 어떻게 튼튼한 힘이 생기느냐, 운동이 필요한데 그 운동이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튼튼해질 길이 없다. 그래서 기도가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기도하느냐”이다! 지난 시간들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요구하시는대로 바르게 기도할 것인가? 종교인들처럼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운동의 역사를 이뤄내는 건강한 기도를 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기도라는 것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에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 방금 읽었던 주기도문의 첫번째 간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가 소요리문답 1문에서 배웠던 사람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었나?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목적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 가운데 삼위하하님이 누리시던 기쁨과 선하심을 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목적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합하게 기쁨과 선하심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첫번째 간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러분 교재의 2번을 보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는 언제 영광을 받으시는가? A를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알리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예를 들어서, “이레”가 뒤늦게 아이돌을 준비해서… 물론 여러분 믿기진 않겠지만, 상상하기도 힘들겠지만, 아이돌을 준비해서 BTS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전세계가 열광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레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훌륭한 딸을 두셨습니다,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말을 하겠지. 그 이름이 영광스럽게 알려졌으니까.
물론 이것이 동일한 비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도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알려지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 등을 깨닫게 되며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 사람 사이는 어떠한가? 때로는 오해가 더 편할 때가 있다. 여러분이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면, 저의 추악한 민낯을 다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하겠나? 저도 죄인인데. 또 지금 이 자리 가운데 연애중이신 분들, 나랑 교제하는 사람의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하지만 정작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럼에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쉬울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히 오해하는 것도 은혜스러울 수 있다.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분이시다. 알면 알수록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욱 자신이 알려지기를 바라시고, 더욱 알려지실 자신이 있으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그분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번의 A의 1)을 함께 읽어보자. “이름은 속성과 성품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옛날 우리 부모님 시대만 하더라도 이름을 대강 짓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지만 오늘날에는 부모들이 심사숙고해서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다. 심지어 오늘날 애완동물의 이름까지도 신중하게 짓기 위해 이름지어주는 곳 가서 돈 주고 이름을 받아오는 일들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이름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고대 히브리인들에게도 동일했다. 그들에게도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인생,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성품, 그 사람의 존재와 연결 되었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나타내실 때 당시 히브리인들의 의식, 개념, 문화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알리시는데, 여러분 교재 3번을 보시면 여호와, 여호와이레, 여호와 라파 등등으로 알리셨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출3 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애굽 왕 바로 앞으로 보냄을 받는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 바로에게 가서 제가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누가 나를 보냈다고 말해야 합니까?”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나는 여호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보냈다고 해라"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처음 나타내신다. 그런데 여호와 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고, 원인이 있었기에 생겨난 결과물이 아니며, 태어난 존재가 아닌, 처음부터 존재하셨던 분,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기원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많은 하나님의 칭호들이 등장하는데,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할 때는 늘 자기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던 그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창22 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하시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대신 숫양을 바치게 하셨는데, 이때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 라는 이름이 소개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 새롭게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상사를 만나게 될지, 어떤 동료를 만나게 될지, 아무 것도 모르는 막막함 가운데 있을지라도, 여호와 이레,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길들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름. 공급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 이레를 부르며, 친히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공급하실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또 여호와 라파. 출애굽기 15장 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뜨거운 광야 한복판에서 마실물을 찾지 못해서 목말라하던 중 아주 시원한 물을 발견했다. 그래서 허겁지겁 그 물을 마시는데 너무나 쓴 물이 아니던가? 도저히 못먹겠는 물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뭇가지를 그 물에 넣게 하셔서 넣었더니 그 물이 아주 맛있는 물이 된게 아닌가? 고치시는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그 쓰디 쓴 환경들까지도 달게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어려운 현실들, 삶의 괴로운 요소들, 괴롭고 쓴 고난들을 선하게 바꾸실 하나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연약한 육체와 우리의 질병까지도 고치시는 그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여호와 닛시. 출애굽기 17장 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수백년 애굽에서 종살이만 하던 이스라엘이 민족간의 전쟁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싸울 법은 알겠는가? 제대로 된 무기나 있었을까? 전술이나 전략이 있겠나?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밖에 할게 없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싸움에서 밀리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싸움에서 이기는게 아닌가? 이를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모세 곁에서 끝까지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모세의 들려진 손이 해가 지기까지 내려오지 않으므로 여호수아와 군대가 칼날로 쳐서 아말렉을 진멸하였다. 여호와 닛시. 이것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것이다. 승리의 깃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에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대결들을 직면해야 하는, 너무나 불편하고 껄끄러운 일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나의 대장이 되셔서 마침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하고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 샬롬, 이것은 사사기 6 장에서 기드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찾아가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구원하도록 그를 사사로 세우셨다. 그러나 의심이 많았던 기드온은 표적을 구했고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눈 앞에서 표적을 보이자 기드온은 탄식을 하며 말하기를 사사기 6:22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이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시는 말씀이 사사기 6:23...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죄인이 지극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는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어야 하는데 죽질 않는다. 여호와 샬롬. 죄인에게 그 죄사함을 통하여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 예레미야에 있는 말씀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실 굉장히 많다. “여호와는 우리의 의” 이것이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는 의로움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것들을 신뢰하는, 그런 소망 가운데서 고백하는 하나님의 칭호였다.
여호와 로에,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할 때 이 문장이 바로 여호와 로에이다. “내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내가 지금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에 지금 인생이 꼬였습니다. 내가 미로 가운데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바른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인도해 주십시오"
또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 라는 의미이다. 여러분들이 이민을 가시든지, 혹은 여러분들이 정말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가시든지, 혹은 타지역으로 일을 하러 가시든지, 그곳이 여러분들에게는 낯선 땅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이것은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야곱이 아버지 속이고 동생 형 속이고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사다리의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러면서 야곱은 여호와께서 정녕 여기 계시거늘 내가 깨닫지 못했구나, 하며 돌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종합해보자면 이런 하나님의 이름들이 다 그분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의 평생토록 신앙생활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칭호의 의미들을 다 경험하면서, 그분의 일하심과 성품과 존재들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직장생활, 가정생활, 다른 어떠한 대인관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누리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아주세요" 라는 간구는, 이 모든 하나님의 칭호들이 내 삶 속에서 의미있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 더욱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와 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고백인가? 이를 이해한다면, 주기도문의 첫번째 간구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 주세요" 라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지금 여러분의 개인적인 어떠한 기도제목보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재 4번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에 대한 열심이 있으시다. 다 살펴보진 않겠지만, 먼저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10번의 재앙을 주셨다. 그냥 한번에 장자죽음 재앙을 주셨으면, 그냥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한방을 주셨다면 한번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수 있었을텐데, 굳이 10번의 재앙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출애굽기 9:13–14 를 찾아보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소개되는 것이다. 그렇게 10가지 재앙을 주신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출애굽기 12:37–38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방금 읽은 말씀을 잘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숙곳에 이르렀을 때 보행하는 장정만 60만이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잡족과 가축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잡족이 무엇인가? 사실 이것은 상당히 편견이 들어간 번역이라 할 수 있는데, 다른 민족들, 애굽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억압을 받던 다른 민족들도 함께 출애굽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이스라엘을 따라서 출애굽을 결심했을까? 10번의 재앙을 보니까 답이 나오는 것이다. “와! 진짜 세상에 참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뿐이구나! 이 하나님을 따라 나가야겠구나!” 하나님께서 이런 결과를 주셨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들에게서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
신명기 7:6 를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시편 23:3 를 찾아보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 했는가?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성공을 위해서?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라합이 하는 말을 듣는데, 너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우리가 소문을 듣고 지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릴 때 이스라엘이 뭘 했나? 그들은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 한 것이 일절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셨을 뿐이다. 출애굽하고 얼마 안가 홍해를 만났다. 홍해 앞에서 그들이 한 것이 무엇인가? 머잖아 아말렉과 전투를 벌이며 그들이 한 것이 뭐가 있나?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이 행한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신다.
그때 가나안 여리고성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야! 너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다 들었어. 그분 진짜 대단하신 분이시더라! 그분 정말 놀라우신 분이시더라!”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다. 여러분, 착각하면 안된다. 내가 빚을 다 갚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다. 내가 성공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굉장한 명예를 얻어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들이 엎어지나 일어나나 높아지나 낮아지나 그들의 현 상태와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존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내가 망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니까 괜히 꼼수와 편법을 사용해서 안망하려고 아둥바둥하는 것,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실패해도 나를 통해 하나님 영광받으신다. 내가 추락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영광받으신다. 또한 반대로, 내가 망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조롱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걸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이다.
적용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첫번째 간구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제가 여러가지를 써놨는데, 한 가지만 살펴보고 마치자. 우리가 첫번째 간구를 통해 붙들어야 할 것은,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내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이죠. 우리가 십계명에서 생각해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바르게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 잘못 사용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 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이를 사용하길 바라신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정말 다양하게 소개된다. 부르시면 돼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부르고 묵상하는 것. 여러분의 상황과 형편과 고민과 염려 가운데 가장 걸맞는 하나님의 칭호를 붙들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다양한 칭호가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말씀에 인도를 받는 기도이다. 바라옵기는 여러분의 기도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도,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사용하는 기도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개인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이 경험되고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삶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저희가 만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저희 통해서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으시기를 원합니다. 늘상 주님의 이름을 바르게 사용하며, 그 이름 붙들고 기도하고, 그 이름에 영광 돌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