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정말 살 만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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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 세상이 정말 살 만한가요?
요한복음 1장 1–5절
이 세상의 허망함과 덧없음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불교 초기 경전인 아함경(붓다가 45년간 그 제자들과 나눈 대화와 가르침을 모은 것)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판에 나갔다가 미친 코끼리에 쫓겨 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피신했습니다. 우물 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고 우물 입구에는 코끼리가 버티고 있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넝쿨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흰 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나타나 교대로 넝쿨을 갉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매달려 있는 곳에서 우연히 벌집을 발견하고는 벌집에서 흐르는 꿀을 먹다가 단맛에 취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처한 위험을 망각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가리키고 독사는 죽음, 꿀은 잠깐 누릴 수 있는 오욕, 벌집은 헛된 생각을 가리킵니다. 인생을 찰나로 놓고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단순하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도, 독사도, 쥐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넝쿨에 매달려 있는 동안만이라도 달콤한 꿀을 먹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고 곧 넝쿨이 끊어질 위기라면 잘 먹고 풍족한 것은 헛될 뿐입니다. 그렇게 매달려 있는 사람이 얼마나 비싼 옷을 입고 있는지,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얼마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매달려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땅에서 좀 더 잘 살려고 애쓰는 것이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인간의 상태를 ‘어둠’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어둠은 단순히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이런 절망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넝쿨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곧 바닥에 떨어져 죽을 것을 모른 채 양질의 꿀을 배가 부르도록 먹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벌집이 더 많은 곳으로 이동하려고 애쓰고, 조금이라도 더 배부르게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다 헛된 일입니다. 사람은 모두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죽음 앞에서는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귀한 것이다”라는 말은 진실일까요?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은 장례를 집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든 생각은 고인이 아무리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더라도 죽음은 언제나 불쌍하고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은 아름답게 창조되었다. 당신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놓으셨다”라는 설교를 들으면 어떠십니까? 요즘 기독교에서 인생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독교는 동양 종교만큼 정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지 않은 한 평생 원하는 대로 멋지게 살아보자”는 말도 결국은 허무함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솔직히 인생이 허무해서 마음껏 즐기자는 말은 이해되는데 인생이 멋지고 좋은 것이라 즐기자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생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절망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은 절망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에 이 어둠의 상태를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각이든 환각이든 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인생이 그렇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인생은 목적이 있어 창조된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이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에 함께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1절과 2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창세전부터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에 개입하셨다는 예수님의 존재를 보여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말씀의 의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에 의해 지음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만물을 향한 주님의 계획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절에는 조금 더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이 말씀은 읽기도 난해하고 해석도 다양합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죽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말은 인간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 즉 하나님 안에 있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생명 때문에 빛, 즉 절망을 의미하는 죽음의 반대되는 행복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원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하면서 불행해졌습니다.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인간의 타락 과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인간이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한 것도 결국 인생은 절망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좋은 집에 살아도, 좋은 대학을 나와도, 착하게 살아도 결국 다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요한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가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인생을 정죄하기보다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5절도 그 맥락에서 읽어 보겠습니다. 개역개정에는 5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깨닫다’라고 번역된 헬라어(καταλαμβανω)는 ‘압도하다’, 혹은 ‘굴복시키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1년 개정 NIV 영어 성경은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이라고 번역했고, ESV 영어 성경도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5절을 개역개정대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하면 그런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에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인간의 무지함과 불신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몇몇의 영어 번역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매 어두움이 능히 이기지 못하더라”라고 번역하면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하나님의 빛이 강권적으로 임했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됩니다. 문맥상으로 둘 다 가능하지만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를 생각할 때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하나님은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알려면 우리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태에 있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괜찮은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보너스로 영생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는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살려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조금 과격한 예일지 몰라도 자녀가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연봉이 높은 회사에 취직해도 그 인생은 불행합니다. 사업에 성공해서 왕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강한 권력을 누리며 살아도 그 사람은 불쌍합니다. 남보다 나아서 남을 불쌍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그 자체로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우물 속으로 피신한 사람이 큰 벌집을 차지했다고 깔깔거리며 좋아하지만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몹시 짧아서 불쌍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비아냥거리는 것도 아니고 불만에 차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는데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현재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그 영생의 확실한 존재 때문에 그것은 불행입니다. 요한은 이 생명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몹시 추상적인가요? 다시 아함경으로 가 보겠습니다.
누군가는 끊어져 가는 넝쿨에 매달려 꿀로 배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꿀에 취해서 인생은 살 만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꿀에 연연하는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절망과 불행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집이나 건강한 몸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어둠도 막을 수 없는 생명의 빛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영생의 가치를 아는 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어찌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눅 18:18 참조)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에서 이미 그는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음을 예수님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 자신도 예수님처럼 비슷하게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켜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눅 18:19 참조) 하시면서 율법을 다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의 마음을 알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눅 18:21)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눅 18:22).
이것은 엄청난 파격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런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적 요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은혜의 초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화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가 핵심이 아닙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이 사람이 정말 영생의 가치를 아는가’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어도 괜찮을 만큼 생명의 가치를 아는가가 중요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알려면 당연히 죽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불행해서 이 생명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예수님 한 분만이면 됩니다”라는 고백에 힘이 생깁니다. 그 고백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소유를 다 나눠 줄 수도 있고 오지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 고백과 타협했습니다. 자꾸만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다시 말해 빛, 생명이 없으면 세상은 절대로 좋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빛인 생명을 회복할 수 없다면 큰 교회도, 좋은 집도,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수려한 외모도 다 소용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쌍한 것인데 그것을 부러워하고 좋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 생명의 빛이 없어도 세상이 정말 살 만하다는 말입니까? 이 어둠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6)라는 말에 한 줄기 빛을 보는 시원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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