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아비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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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에게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는 양이 새끼를 낳는 시기와 양털을 깎는 시기예요. 새끼를 낳는 시기는 1, 2월이고, 양털을 깎는 시기, 목자에게 가장 중요한 소득분배가 이루어지는 3, 4월 방목이 이루어지는데, 이후 며칠 동안 축제가 이어져요. 다윗의 장남 압살롬이 반역(살인)을 저지르기에도 적기일 만큼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취하는 ‘바우덕이’와 같은 축제기간이었어요(삼하 13:23).
네, 이러한 축제기간에 나발이라는 한 목자에게 모욕을 당해 참지 못한 다윗은 지금 눈에 살기를 띠고 분에 겨워 복수를 하기 위해, 격분한 400여 명의 동료를 이끌고 복수의 길을 가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었겠어요? 지금 다윗에게는 사울 왕과 같이 하나님은 없고 나발과 그의 식솔들을 죽이고자 하는 자아만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한 결핍은 추함만큼이나 명확히 드러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나타나 다윗에게 하나님을 회복시켜 줍니다. 이전의 다윗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불렸어요. 하지만 지금으로 보아서는 전혀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죠. 그런 다윗에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의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는 한 여인, 아비가일을 그대들과 함께 만나보고 싶어요. 본문 사무엘상 25장 23-31절 함께 교독 할게요.
다윗은 동료들과 함께 피난처로 삼은 광야에서 단순히 숨어지내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나 벌였던 것 같아요. 광야는 자연재해가 많을 뿐 아니라 범죄 발생률도 대단히 높은 지역이기에 강도들이 자주 출몰해서 여행자들과 거류민들을 습격해서 약탈을 일삼았어요. 그래서 다윗과 동료들은 여행자들과 거류민들을 강도들로부터 구조하는 선한 사마리인단을 결성했던 것 같아요.
다윗이 나발이라는 부유한 목축업자를 알게 된 것도 이 선한 사마리아인단 활동 때문이었어요. 나발의 가축을 돌보던 그의 목자들은 광야의 무법자들과 가축 도둑들에게 특히 많은 해를 당하고 있었는데, 다윗은 이를 적어도 한 계절 동안 보호해 주었던 거예요. 사무엘상 25장 16절에서 그 목자 중 하나가 그의 고용주 나발에게 다윗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어요.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어 주었습니다.”
광야 생활 중에 할 수 있는 일 중에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또 어디있겠어요? 그는 계속 사울에게 쫓겨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중간 중간에 숨 돌릴 틈도 생기게 마련이었고, 그럴 때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던 거예요. 무자비한 무법자들이 협곡과 평원 등지를 판을 치며 돌아다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다윗은 일종의 법과 질서를 들여놓은 셈이에요. 이로 인해 나발의 목자들이 가장 큰 혜택과 수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때는 3, 4월 양털을 깎는 방목 시기가 돌아왔어요. 한 해 동안 공들인 양모를 거두어들이는 시기이기 때문에 양털을 깎는 길고도 힘든 작업 후에는 술과 음식이 가득한 굉장한 잔치와 소득분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축제가 벌어졌고, 이웃에 살던 다윗은 10명의 동료를 보내 잔치 음식과 술을 좀 달라고 요청했어요. 물론 이는 사리에 맞고 상황에 적절한 요구였잖아요. 그들은 1년 내내 호의를 베풀어 나발의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고, 광야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잔칫상의 단골 메뉴인 떡과 포도주 그리고 양고기 몇 조각만으로도 그들은 흔쾌히 만족했을 거예요.
그런데 나발의 처세는 어떠했죠? 나발은 그 요청을 듣고는 다윗에 대해 광야에 출몰하는 강도 같은 부류로 취급해버립니다. 사무엘상 25장 10절에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나발은 잔치 음식을 나눠 주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과 그의 동료들의 호의를 무참히 짓밟고 또한 모욕했던 거예요.
자, 나발에게 이런 취급을 당한 다윗은 어떠했을까요? 지금까지 광야 생활하며, 어려움도 있었지만, 광야의 심원한 아름다움에 심취해 거룩함으로 가득했던 다윗이라면, 이 정도는 잘 참고 웃어넘겨야 할까요? 다윗은 그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이 모욕을 피로써 갚아 주겠노라고 결심하고는 동료들을 불러 무장시키고 나발의 잔칫집으로 출발합니다. 배은망덕하게도 터무니없이 은혜를 모욕으로 갚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나발을 쳐 죽일 참이었어요.
네, 나발의 야비함이 다윗 속에 잠들어 있던 야비함을 건드려 깨웠던 거예요. 오늘 본문 바로 앞 22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나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네, 이제 나발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어요.
다윗은 이성을 상실해버렸어요.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거예요. 다윗은 그동안 광야에서 배운 아름다운 거룩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결함이 있었던 사울 왕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볼 줄 알았던 다윗이었지만, 이제 그의 눈에 나발은 악취를 뿜어대는 더러운 쓰레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다윗은 또 다른 사울이 되어 버릴 위기에 처한 거예요.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위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없애 버리려고 기를 쓰는 사울 같은 그런 인간 말이에요.
한편 자신의 남편 나발이 다윗을 모욕했다는 첩보를 아비가일이 접하고는 그 결과를 예상합니다. 그녀는 이성을 상실한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면 전부 도륙당할 것을 짐작하고 재빨리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어요. 즉시 잔치 음식을 가득 싸서 나귀에 싣고 다윗이 오는 길목에서 반드시 그를 만나야만 했으니까요. 그녀의 예상대로 다윗과 마주했고, 다윗을 보자 황급히 나귀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얼굴을 땅에 대며 말했어요. “부디, 제발, 간청하오니 참아 주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자가 하실만한 행동이 못 됩니다. 당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잊지 마십시오. 원한을 풀기 위해 싸우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여호와를 위해 싸워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그녀는 연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9절입니다.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마치 시처럼 들리는 이 말은 이런 뜻이에요.
“어느 누가 당신의 앞길을 막으려 한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일어나 당신을 해하려 한다 하더라도, 당신의 생명은 당신이 섬기시는 주 하나님이 속싸개에 싸서 보존하실 것이요. 당신의 적들의 목숨은, 주님이 물매로 던지듯이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산부인과에서 신생아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씻겨서 속싸개로 꽁꽁 둘러 싸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왜 이렇게 속싸개로 꽁꽁 싸맬까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몸을 움찔하거나 만세를 하듯이 손을 번쩍 드는 행동을 하게 되고, 빛이나 소리, 자신의 자세 등 주위에서 자극을 받았을 때 아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원시 반사가 나타나요. 그것을 모로반사라고 하는데, 아기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운동 기능을 발달시키기 위한 반사행동이에요.
생후 4개월 이후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6개월쯤에는 완전히 소멸 되는데, 아기를 보통 딱딱한 바닥에 눕히면 흔히 깨요. 그래서 부모가 안아서 재워요. 잠들었다 싶었을 때 바닥에 눕히면 ‘등센서’가 작동해서 바로 눈을 떠서 부모와 눈을 마주쳐요. 그럼 아기는 울어요. 그렇게 아기가 울다 자다 울다 자다해서 부모까지 밤새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요. 그래서 모로반사를 줄이기 위해서 속싸개로 몸을 고정 시켜서 엄마 뱃속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서 신생아에게 안정감을 주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 싸개인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신생아처럼 보호해 주시기 위해 생명 싸개로 감싸주신다는 고백인 거예요.
이처럼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증언해줘요.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 그녀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오래전 엘라골짜기에서 그가 기도하며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일을 환기시켜서, 다윗의 기억을 자극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비가일의 말은 사실 이런 뜻이에요. “다윗이여, 원수를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당신이 스스로를 시험해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인하고 꼿꼿한지 알아보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나발 하나로 족합니다.”
순간 믿기 힘들 정도로 다윗은 가만히 서서 아비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느 시점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윗 앞에 무릎을 꿇은 아비가일은 기도와 시를 통해 다윗 속에 다시 하나님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녀의 바람대로, 좀 전의 분노와 살기가 그저 그녀의 목소리와 무릎 꿇고 있는 모습만을 응시만 할 뿐입니다.
점점 고조되어 가던 이야기의 흐름은 저지되고 역전됩니다. 철저히 주변인(마지널리티)인 아비가일에 의해서 말입니다. 아비가일은 철저히 주변인이었어요. 남자들이 주름잡고 있는 고대사회에서 그녀는 여성이었으니까요. 칼부림하는 세상에서 그녀는 아무런 무기도 갖추지 않았어요. 물질과 실리 중심의 세상에서 그녀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존재였어요.
아비가일의 내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33절의 ‘지혜’와 조화를 이루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다윗을 분노하게 하여 갑작스럽게 빠져들어 갔던 추함에서 그를 구해 내었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되었어요.
비록 타락하긴 했지만, 사울 왕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고 그 안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계셨어요. 엔게디의 동굴(삼상 24장)과 하길라 산(삼상 26장)에서 사울 왕의 생명을 보전했던 것처럼, 그 일 사이에 이 아비가일과의 만남(25장)이 놓여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도 25장이 없었다면 26장의 내용은 다윗의 추함이 고스란히 드러았을 거예요. 하지만 25장 아비가일이라는 생명싸개를 통해 다윗을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길 소망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의 만남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자신 의 내면에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들여다 볼 수 있었어요. 자신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어리석은 나발의 도발에 사로잡혀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피를 보려고 달려갔던 다윗, 바로 자신에게서 말이죠.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였고 그의 안에는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 계셨어요. 다윗은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이라는 거울을 통해 하나님이 다윗을 바라보셨던 대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셨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준 생명싸개였어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어요. 그 어리석은 자들이 우리를 몹시 화나게 만들죠. 그러나 그들을 바로잡아 주겠노라고 나서면서 우리 자신도 그들과 같은 어리석은 악독에 빠지는 때가 많아요. 어리석은 자 나발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과 자세가 아니에요. 우리는 자신을 더 크고 참된 빛 속에서 볼 수 있어야 해요. 다윗은 거해하고 방대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기도와 거룩 속에 살아왔어요. 그런데 시시하고 속 좁은 보복심에 사로잡혀 그만 그런 삶을 상실한 뻔했죠. 그러나 생명싸개 아비가일의 내면의 아름다운 성품을 통해 다윗에게 주님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주었음을, 그리고 다윗 앞에 무릎을 굻은 아비가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무릎을 꿇게 만들어 주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생명싸개가 바로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하며,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