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추억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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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8:11-18
<순전한 기독교>를 쓴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인이었던 C.S 루이스는 8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두 가지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절대로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어린 나이에 이런 다짐을 했다는 것은 실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픔의 크기가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사는 것으로 표출된 것이죠.
이후에 C.S 루이스는 냉철한 이성주의자가 되었었는데요. 그런 그의 삶에 대변화가 일어납니다. 평생 사랑을 준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이 살아온 그가 나이 60세가 넘어서 조이 데이비드맨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둘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졌는데, 더 놀라운 것은요. 결혼 당시 데이비드맨은 암으로 1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기에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녀는 이후에 3년 2개월을 더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C.S 루이스가 참 복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60세가 넘어서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 하필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보냈던 3년 2개월의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이후의 삶은 그 사랑의 힘으로 살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진실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단번에 치유하고도 남을 정도로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실제로 성경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다 덮는다고 말하는데요. 벧전 4:8 합독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적당히 사랑해서는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적당히 사랑할 경우 덮일 듯 말 듯 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길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정한 사랑만이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자신의 가족, 지인, 공동체의 허물을 덮고도 남을 사랑을 하고 있을까요? 이것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지근한 사랑 정도야 어떻게든 하겠지만 허다한 죄를 덮는 뜨거운 사랑은 잘못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이런 허물을 덮는 사랑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을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 저희집 애들을 보면요. 허물도 이런 허물이 없어요. 하나는 머리 비운 애가 하나 있죠. 또 하나는 머리 비운 애를 오빠를 둔 사춘기 딸이 또 있죠. 와~ 이 애들만 보면 하나님께서 허물을 덮는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 부부는 애들 때문에 막 간증이 넘쳐요. 이 녀석들을 어떻게 쓰실지 정말 기대가 되는 게 요즘 저희 부부 현실인데요.
저희 부부처럼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자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 안에도 이런 인내하는 사랑이 있구나. 내 안에 이런 허다한 허물을 덮고도 남는 사랑이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아예 시키지도 않으시는 분이세요. 결국 못할 것을 알면서 시키시고는 못 한다고 혼내는 분이 아니시더라고요. 예수님이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41)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어떤 배우자가 좋은 배우자일까요?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존재라서 상대방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배우자는 자신으로 하여금 상대방의 허물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을 하도록 만드는 사람 아닙니까? 반듯하고 모범적인 배우자도 정말 좋지만, 한시라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배우자로 인해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경험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허다한 허물이 있는 교회가 오히려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허다한 허물이 많아야 그것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기 때문이죠. 우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공동체는 분위기는 좋을 수 있겠지만, 그곳에서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 있는 사랑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 하름교회 공동체에 너무 비판적이고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런 사람 때문에 마음이 힘들고 공동체에 갈등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허다한 허물을 덮은 사랑을 작동시켜야 할 때입니다. 힘들지만 그런 사람을 사랑으로 품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진짜 좋은 교회이며, 감동이 있는 교회입니다.
C.S 루이스에게 있어서 3년 2개월 동안 아내와 쌓았던 사랑의 추억이 그 이후의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교회는 바로 사랑의 추억을 제공해주는 곳이라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제 결론이 뭔지 아세요? 좋은 교회는 성도들에게 사랑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추억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성도들 간에 사랑의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를 돌아보면, 평범하고 그저 그런 학생이었던 같아요.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아주 잘한 기억도 없어요. 초등학교 때 그 흔한 반장도 한 번인가 해보고 고등학교 때까지 눈에 띄는 그런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선생님들은 저 같은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뭔가 질문을 하면 귀찮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열등감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기를 펴고 다닌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학교에서는 기가 죽어 있었지만, 교회에서는 달랐습니다. 엿새 동안 움츠린 학교생활을 하다가도 주일에 교회에 가면 제가 마치 주인공 같았거든요. 제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교회학교 교사를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애가 애를 가르치는데 뭘 알았겠습니까? 그래도 어른 선생님들이 교사를 잘한다고 얼마나 칭찬해 주시는지, 지금 생각하면 제가 안 한다고 할까 봐 그랬던 것도 같은데, 아무튼 그런 칭찬을 들으면 더 힘이 나서 분반 공부 가르친다고 학교 공부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는 교회에 가면 선생님들이 다 저를 그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하던 시절에 제 청소년 시절에 선생님들에게 받은 축복을 생각하면서 애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서울 반포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다 보니 제가 담당한 고등부에 강남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도 있었고, 당시에 제가 다니던 신학교 교수님 딸도 있었거든요. 부모님이 둘 다 교수님에 의사에 대단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 고등부 선생님들이 예쁘고 눈에 띄고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쏟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담임목사 자녀들이라고, 중직자들 자녀라고 더 특별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아이들은 등 떠밀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아이들이에요. 오히려 부모님은 안 다니시는데 혼자 교회를 나오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을 더 돌봐야 합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부득이하게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종종 좋은 교회를 추천해달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모르는 지역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담임목사의 설교가 좋은 교회보다 직접 다녀보고 만남의 축복이 제공되는 교회인지를 보고 결정하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좋은 설교는 유튜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만, 만남의 축복이 제공되는 교회,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내가 직접 속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의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과의 추억을 쌓아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에 사람들과의 추억은 많았지만, 하나님과의 추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스무 살 중반까지만 해도 제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같고 믿지 않는 것도 같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군대를 강원도 철원 최전방 철책 근무를 했는데요. 워낙 오지이다 보니까 그 흔한 군인 교회도 없이 선임병 두 명과 난방도 안 되는 조그마한 식당에서 덜덜 떨면서 예배를 드리고 삶을 나누면서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더라고요. 어느 날은 저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나기도 하는 거예요. 지금도 생각하면 그 시절에 하나님과의 추억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강원도 철원이 정말 춥거든요. 맨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으면 그대로 얼어붙어서 조심해서 떼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휴전선에서 근무하다 보면 대북 방송이라고 해서 요즘 같은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북쪽을 향해 틀어주곤 했었는데, 막 집이 그립고 교회가 그리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추운 날 8시간씩 밤새 근무를 서면서 찬양을 부르고 기도만 하는 거예요. (물론 인간적으로 좀 졸기도 했지만요) 그때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너를 보호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던 주님과의 추억은 C.S 루이스처럼 그 이후로도 제게 줄곧 힘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추억을 많이 쌓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려울 때, 외로울 때, 눈물이 날 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누구와도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과의 추억을 쌓을 때인 줄로 믿습니다. 조용히 십자가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으세요.
여러분,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 빠졌던 장면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베드로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물 위를 걷다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어 물속으로 빠져버리자 주님이 손을 내밀어서 건져주시지 않습니까? 물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 상황을 아실 겁니다.
그때 베드로를 건져주시던 예수님이 눈빛이 어땠을까요? 화가 나셔서 “이 골칫덩어리!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구나” 그런 눈빛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저는 100% 확신합니다. (그림 ppt) 김용성 화가가 그린 ‘핸드 오브 갓’이라는 그림이거든요. 예수님의 은은한 미소가 보이십니까?
저렇게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베드로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담은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미안해하지 마라, 부끄러워하지 마라, 괜찮다, 내가 다시 건져주면 되지 않니?’ 하는 그런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일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는 그 일이 주님과의 추억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런가 하면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하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닭이 세 번 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 눈빛이 어땠을까요? 저 같으면 베드로에게 무지 실망한 눈빛을 보냈을 것입니다. 아니! 증오의 눈빛을 보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미안해하지 마라. 내가 미리 말했잖니? 넌 그렇게 약해. 그래서 넌 나를 의지해야 하는 거란다.’ 이런 눈빛을 느꼈던 베드로의 마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평생 자기를 괴롭힐 수 있는 순간이 그 눈빛으로 인해 예수님과의 추억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이런 추억이 쌓여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설교 세 편이 담겨져 있는데요. 그런데 신명기에서 모세가 말하고자 했던 요지는 한 가지에요.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라’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핵심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 마치고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된 모세가 남겨진 백성들에게 마지막까지 했던 말은 바로 “하나님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기억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추억을 기억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진을 매일 바라보며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추억하라는 것은 그분의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은 단순히 감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율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고자 애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돌아봐야 하는데요. 여러분, 어떤 예배가 은혜로운 예배일까요? 성도들의 감성을 자극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예배가 결코 좋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럼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좋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킬 힘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한 주 동안 세상에서 하나님을 잊은 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행하며 살았다면, 예배를 통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동안의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내일부터 세상을 향해 나갈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정직한 모습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로운 예배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추억을 기억하라는 말의 의미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12-13절 혼자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자, 이렇게 번성하고 풍부할 때에 그다음 14절을 보세요. 합독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마음이 교만해질 때 사람은 과거에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교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잊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겸손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크심을 인정할 때, 나는 작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진짜 기억한다면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교만해질 것 같으면, 휴전선 최전방에서 손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에 외로웠던 군복무 시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또 9개월 동안 목회를 쉬면서 다시 목회할 때는 진심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때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면 제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 풍성함의 원천은 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 내면에 결코 교만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하면 셋째,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의 의미는 과거에 부어주셨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 임종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조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요. 14절-16절 화면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여러분, 모세는 왜 과거에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강조하는 걸까요? 과거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밝은 미래의 문을 여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이처럼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늘 되뇌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님들도 이것을 잘 알고 지켰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이 눈물로 부르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송가 301장요.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랴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우리 조상들은 이 찬양만 부르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던 것 아닙니까? 힘들고 어려웠을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찬양의 가사처럼 과거에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바로 현재와 미래를 형통의 길로 인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현재 우리나라가 이만큼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비참하고 가난했던 과거를 잘 극복한 우리 윗대 어른들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행렬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거고요.
8, 9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우리나라 제품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에서도 삼성이나 LG, 현대 자동차 등이 눈에 많이 띈다고 그래요. 얼마 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국산 자동차가 나오더라고요. 엄청나게 가난했던 나라가 이처럼 우뚝 서기까지 누가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죠. 그리고 60년대, 70년대 그 모진 세월을 참고 인내하신 부모님들, 조부님들 세대 덕분 아닙니까?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이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 속에는 우리의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의 수고와 헌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의 기도를 들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머릿속으로 자신의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거 외롭고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이 밀려올 때 나를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추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 추억으로 인해 지금의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강한 마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생겨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지금까지 지내온 것(찬301)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어떤 사랑의 추억이 있으십니까? 모태신앙에 30년 4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더 그 추억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다 주의 크신 은혜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아직 믿음이 연약한 분들이 계신다면 저처럼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주님은 물에 빠지고 배신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과 다시 시작하세요. 마음을 주님께 드리세요.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름의 성도님들이 하나님과의 추억이 많이 쌓이길 원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성도들 간에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기를 원합니다. 신명기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결코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하게 하시며 특별히 과거에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다 주의 크신 은혜랴” 이 찬양의 가사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이 약하고 나약했던 베드로를 다독이며 끝까지 함께 해 주신 주님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주님의 그 손 내밀어 주심을 꼭 붙잡고 형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또 하나님과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