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0주일예배_미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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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베들레헴과 우리의 믿음
베들레헴과 우리의 믿음
본문: 미가 5:2-5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지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떡의 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그 이야기를 각기 다르게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적 진술이라는 점에서 딱 두 가지만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사실 탄생에 관한 진술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자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사건을 전하고 있는데도 사실관계를 구성하는 이야기가 다른 점은,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가 단순히 사실관계를 전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그 의미를 전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전하는 의도의 맥락은 지난 주일 말씀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주인공으로 동방박사를 내세운 마태복음은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고 있으며,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을 내세운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미묘한 의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복음서는 그 의미상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시점의 배경이 되는 사건으로 마태복음은 헤롯 왕의 유아학살을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로마 총독의 인구조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세상 권력이 횡포를 부리고 있는 현실 한 복판에서 평화의 구세주께서 탄생하여 새로운 구원의 빛을 비추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실관계의 다른 묘사와 미묘한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복음서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두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아기 예수의 탄생지입니다. 두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지로 전하고 있는 베들레헴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역사적 사실이니까 그렇게 전하고 있다고 보면 더 이상 따질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볼 것 같으면 마태나 누가 가운데 한 기록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전하는 의미의 측면에서 우리는 사실관계에서 모순되는 두 이야기를 동시에 진실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이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탄생지 베들레헴에 관한 이야기 역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까닭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미가서의 예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미가서의 본문은 평화의 시원지로서 베들레헴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 주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으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은 그로부터 300년 전에 선포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탄생지, 곧 메시아의 고장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예언 그대로 딱 떨어지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비로소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이 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 평화의 시원지가 된 것은 오랜 정신사적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이 된 것은 그곳이 다윗 왕의 출신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그 다윗의 고장에서 다시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나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상관관계에서 비롯한 단순한 상상의 소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째서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들레헴일까 생각하면, 그 믿음은 단순한 상상의 소산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작 다윗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고장은 베들레헴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다윗의 도성’으로 흔히 불립니다.
다윗이 처음으로 수도로 정했던 곳이고 다윗의 왕조가 그곳을 중심으로 그 역사를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입신양명을 한 곳이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도성으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메시아를 그린다면 바로 그 예루살렘과 메시아의 출신지를 결부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농사꾼 예언자 미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위대한 정치지도자요 군주로서 다윗 왕을 기억하기보다는, 베들레헴에서의 목동 다윗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이 된 진짜 사연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고장에서 태어난 다윗 역시 작은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막내둥이였고,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이 설마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점지했으리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이었습니다(삼상 16장).
오늘 본문에서 미가는 그 기억을 환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의 일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함으로써 신학적으로 무한히 확장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으로까지 말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은 그 이전에 그 베들레헴에 얽힌 옛 기억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 이것은 ‘베들레헴의 에브랏 가문의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에브랏 가문’, 바로 다윗의 가문입니다. 미가는 그 가문이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도 작은 족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서 룻기는 바로 그 가문의 기원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에브랏 가문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이방인 며느리 룻이 일군 가문입니다. 에브랏 가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어 대가 끊어져 멸문지경에 이르렀을 때 현명한 어머니 나오미와 신실한 며느리 룻이 그 가문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은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 곧 ‘질병’과 ‘기룐’ 곧 ‘황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함으로 그 가문을 다시 세운 두 여인의 이름은 ‘나오미’ 곧 ‘기쁨’, ‘룻’ 곧 ‘아름다움’(또는 ‘친구’)이었습니다. 그 이름들은, 질병과 황폐의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일구어진 가문이 바로 다윗이 속한 에브랏 가문이었습니다.
궁벽한 고을, 아슬아슬한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으로 되살아난 한 가문, 그러나 여전히 미약한 가문, 그 가문의 후예 가운데 가장 어린 막내둥이이자 목동,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의 다윗’이 갖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메시아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다윗’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다윗’, ‘예루살렘의 메시아’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메시아’는, 그와 같이 절망스러웠던 상황에서 기쁨을 일구어내는 존재를 말하며(룻기),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는 존재(삼상 16:7)를 말합니다.
‘베들레헴의 메시아’는 그 초심의 자리를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예루살렘의 다윗은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기는 하지만 사실은 흠도 많았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의 암투에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권력에의 야욕이 자초한 필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다윗에게는 그러한 어두운 그늘이 없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집안의 막내둥이로서 목동으로서 별 볼일 없어 보였을지 몰라도 그의 인물됨은 당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중심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삼상 16:7), 특히 눈이 아름답고 외모 또한 준수했다(16:12)고 했습니다.
그가 가진 조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윗이 사랑을 받았던 진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다윗,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목동으로서의 다윗, 바로 그 다윗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바로 그 다윗의 고향,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는 그 다윗의 초심의 자리였습니다.
시골 농사꾼 예언자 미가는 ‘예루살렘의 메시아’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메시아’를 선포함으로써, 다윗 왕으로부터 이어진 예루살렘의 왕조와 그 권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절대로 그 권력의 자리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목동의 낮은 자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두 복음서의 증언은 바로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 예언이 이뤄진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그 믿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평범한 우리들의 삶의 자리 한 가운데 진정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화려하게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한 가운데 진정한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능력 있고 위대한 그 누군가가 뭔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화려한 구호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내 마음 가운데 진실이 자리하고 있고, 그 진실을 지키고 따를 수 있다면 그 가운데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 태어났고 오늘 다시 그 자리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바로 우리들 한 가운데 진실이 자리하고 있으면 희망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희망 또한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