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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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1.서론
서론 : 예수님께 대한 예언들 59가지 읽어보기.
2. 예수그리스도, 새 시작, 새 사람 (고전15:2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로3;23-24)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로4:13-14)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인해 사망(지옥, 심판)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즉 율법이 있기 전에도(아담이 오기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계시인) 율법이 없으므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율법은 분명히 아담에게 말씀하신 명령이며, 아담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일컫는 간음,살인,도둑질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간에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에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율법과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선악을 분별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선악을 분별하게 된 사람만이 죄를 알게 되며 짓게 되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아주 결정적인 것입니다. 분별력이 주어졌을 때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아니하고 ‘율법'을 주십니다. 선악을 알게되고 그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모세를 통한 율법인 토라가 없었을 때에는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계속 있었다. “
그런데 왜 여기에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죽음이 군림'했다고 말하는가? 오히려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왜 ‘죽음의 군림’을 모세로 한정시키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율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즉,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서 옥스퍼드가 번역한 것과 같이 ‘세상 가운데 계속해서 존재하였으나, 책임이 어디에도 돌려지지 않는 상태였다’ 라는 말씀인 것같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줄 계시가 없었다는 것이 아닌가? ‘죄'를 밝혀서 죄를 죄로 여기고 미워하는 바가 율법이 주어지기까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죄악으로 빠지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죄악을 저질렀으므로 이것을 일컬어 ‘죽음이 군림'했다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 같다. 이 시기에 분명히 ‘죽음'이 있었고 ‘심판'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 있던 사람들은 ‘희미하게 주어진 본성의 율법'만을 의지했기 때문에 가감없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죄악으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시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아주 악했으며,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은 이것을 대변한다.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는데,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본질을 논하는 율법은 당시에 파격적이고 놀라운 꺠달음이며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대하고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이 율법과 정신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통해서 퍼져나갔을 것이다. 당시 근동과 유럽과 이집트에 말이다.
에덴 동산 = 거룩한 천상세계
에덴 동산 = 거룩한 천상세계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창설하신 공간이며 아담은 이곳에서 쫓겨난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아주 거룩한 공간이며-죽음이 있어서는 안되는 공간-죄가 있어서는 안되는 공간-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일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쫓겨난 공간은 그렇지 않은 공간이어야한다. 만약 지구위에서 그런 두 공간이 공존할까? 지구의 한 공간에서 죽음과 죄가 없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며 우리는 그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덴은 천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 이 지구의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 ‘죄 지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그에 마땅한 공간' 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지옥은 어떤 꿈도 희망도 없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공간인 것처럼, 에덴은 오직 거룩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뵐 수 있는 공간인 것처럼, 지구는 일종의 하나님의 은혜로서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이자 중립적인 중간지점으로 봐야할 것 같다. 중립과 중간이 어디있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과 의로써 내리신 지혜로운 처신이 나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쨋든, 죄는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왔다. 놀랍고 신비로운 한 사람이 죄를 이 세상으로 끌어왔다. 사람들은 지혜와 선악을 아는 분별력을 갖게 되었고, 그 일에 책임을 져야했다. 여기에 쓰여진 ‘죽음' 타나토스는 육신적인 죽음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영적인 죽음' 즉 영혼의 심판을 의미하는 경우일까? 5장12절 말씀에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의 ‘이르렀다'는 말씀은 헬라어 ‘디에르코마이'인데 이것은 ‘통과하다’ 혹은 ‘지나갔다'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사망이 모든 사람들을 지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연히 육신적인 죽음이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즉, 옥스포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육신으로서 죽는 것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옥스포드 본문주석참고) 죄 때문에 육신이 죽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에서 지금까지 밝혀온 ‘진화된 인류'의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것인가? 원문의 뉘앙스는 분명히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성경의 진정성을 생각해본다면, 여기서 말하는 육체적인 죽음은 영원히 살아야될 존재가 불가피하게 겪어야만 했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영원히 살아야만 했던 존재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에덴, 곧 천국에서 영원히 존재해야했던 존재였고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900년을 살았다고해도 말이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끊어지지 않는 존재로 여겼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로 많이 쓰이는 것이 아닌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되" 이사야삼십팔장십오절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과 육을 긴밀히 연결되어있다는 것으로 인식했고, 사람이 죽으면 스올에 빠지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스올은 ‘악인'들이 빠지는 곳이며, 거기에서는 주를 찬양하거나 기억하는 신앙도 없는 곳이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은 ‘스올에서 건져지기를' 간구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반적으로 스올에 빠진다는 것을 인식했고 동시에 그곳에서 건져냄받기를 소망했음을 알고 있었다. 즉, 인간에게 죄가 있으며 이 죄에서 자유하기가 어려우며, 그 죄의 결과로 사망-멸망-스올은 필연적이다. 아주 자연스럽지만 저주스러운 이 필연을 끊어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뿐이라는 것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위의 말씀을 생각하고 미루어서 다시 로마서5장 아담에 관한 말씀을 보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는 말씀은 결국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올'까지도 의미하며, 이것은 사람으로서 피해야하며 건져냄바 되어야하는 것으로서 말씀되고 있는 것 같다. 놀랍게도 구약과 신약의 죽음에 관한 차이는 극명하고 명백하다. 구약은 죽음은 곧 ‘스올'로서 겪지 말아야할 것으로 묘사되지만, 신약에 들어와서는 죽음을 보지 않는 것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분명히 우리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성도들이 죽었지만, 신약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이 세상에 갖는 몸이 아니라, 변화된 새 몸과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며 스올에 빠지지 않고 건져냄바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누리게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는 것은 ‘스올을 보지 않는다’ 와 ‘스올을 겪지 않는다'라는 말씀일 것이다. 비록 위의 말씀이 육신의 죽음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전인적인 죽음-스올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은 살아있는 사람을 “네페쉬 하야”로 표현하고 죽어있는 사람을 “네페쉬 메트"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화된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다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의 죽음은 의미없는 죽음이며 지나가는 죽음이겠고, 아담 이후에 있게 된 죽음- 죽음의 군림- 죽음의 왕노릇은 스올과 지옥 심판을 의미하는 것인 것 같다.
아담 이후에 죄의 규명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 때까지는 엄청난 암흑의 시대였을 것이다. 이것을 일명 ‘죄가 군림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계명이 주어졌으나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적인 최소한의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되고 많은 오해와 거짓들이 만연하게 되자 이제는 율법의 역할도 매우 약해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주어질 때가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모세'와 비견될 수도 있지만,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담'입니다. 죄의 태생의 개념으로 보자면 아담의 역할이 아주 핵심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담이 가져온 것은 문명 - 죄 - 스올 이었습니다.
아담이 가져온 것은 문명 - 죄 - 스올 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가 가져온 것은 겸손 - 의 - 구원 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가 가져온 것은 겸손 - 의 - 구원 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앞서 언급했던 율법을 다시 끌여들어와서 중간에 있던 율법의 역할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앞서 언급했던 율법을 다시 끌여들어와서 중간에 있던 율법의 역할을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를 확정짓고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과정은 필수적이며 죄의 충만끝에는 오직 은혜만 있게 되며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5:20-21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를 확정짓고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과정은 필수적이며 죄의 충만끝에는 오직 은혜만 있게 되며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5:20-21
바울은 분명히 아담과 예수님에 대한 대조를 보았을 것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와 시작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가지고 오셨을 때에와 아담이 죄를 가지고 왔을 때를 직관적으로 보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담과 예수에 관한 공통점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아담은 천상에서 쫓겨난 어떤 존재, 예수님도 천상에서 내려오신 존재. 즉, 이 세상의 일반사람들과 다른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 두 존재를 바울은 보았습니다. ‘천상에서 내려온 존재'는 이 세상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반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아주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놀라운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와 반역의 결과로 얻게된 것이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전해주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선악과 분별과 지혜와 이성을 배우고 알게 되었지만, 필연적으로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후로 죄를 지었고 이 죄가 군림하는 시기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죽은뒤에 있을 스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따름입니다. 다만, 스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천상에서 내려오신 또 다른 존재'를 바울은 목격했습니다. 그분은 이전에 내려왔던 아담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아담이 이뤄두었던 문명과 경제와 정치들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것들은 죄의 대가였고, 죄를 유발할 잠재성이 농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기 시작한 인간들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좋은 영향을 발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분은 이제 그것들로부터의 자유와 초연함을 보여주셨고 알려주셨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자랑'과 ‘오만'과 ‘투쟁'이 난무하며 그것을 덕으로 여겼지만, 이제 예수로부터 ‘겸손'과 ‘검소'와 ‘용서'가 전해지고 발견되었습니다. 즉, 이전의 아담의 작품들을 완전히 부정하고 대적하며 새롭게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죄로 시작해서 죄로 물들였지만, 예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자연스러운 섭리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의로 시작해서 세상을 의로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이후에 (그로 인해서 죄를 알고 받은자들은) 스올과 죽음이 확정되었지만, 예수이후에 (그를 믿고 의롭게 된자들은) 생명이 확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죄가 왕노릇' 했다라고 하며 ‘생명이 왕노릇'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죄와 생명의 왕노릇은 당연히 범지구적으로 실제적으로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겪는 사람에게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확장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왕노릇'에 대한 설명을 다시 명확하게 합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생명이 군림한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한 자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즉, 모든 인류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과정과 시간을 통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많은 범죄로 인해 은혜가 뒤따라왔다.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기 위해 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해 사람을 지배하여 예수로 인해 영생을 얻게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범죄의 증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되며, 그리고 이것이 있어야만이 ‘은혜가 시작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만약 죄가 죄로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은혜인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너무나 잘 확인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죄를 책망할 때에 그것이 미묘하게 드러나면(예를 들어 범법하고자하는 마음) 그것을 책망하기가 어려울뿐더러 그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아주 명백한 죄로서 드러난다면 (예를 들어 범법행위로) 그것은 율법의 처벌을 받고 죄가 죄로 인정되며 범법자 스스로에게 인정된다. 이런면에서 예수님께 유독 범법자로 낙인된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 죄가 스스로에게 명백하게 드러났고 인식되었기 때문일것이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오지 않은 것은 죄가 죄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 세상에 주어짐으로 죄를 더욱 죄로서 드러내고 죄가 가득차있다는 것을 모든 인류에게 인식시켜준뒤에야 은혜가 오는 타이밍이 되는 것이다. 그럴때에야 은혜가 은혜로서 드러나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일종의 용서와 사죄이다) 이것이 일종의 ‘죄의 확장'이며 ‘생명의 확장'이다. 이것은 내가 봤을 때에 두 가지 측면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지구적-인류적 의미에서의 확장이다. 죄의 시작은 아담이다. 그러므로 죄는 일시일회적으로 한순간에 온 지구에 퍼진것이 아니라,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아담이 이 땅에와서 과정과 역사를 통해서 인류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한 차례 죄의 관영으로 인해서 심판이 있었고, 또 다시 죄의 관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의 확장을 막으시고 은혜의 확장을 시작하셨다.
두번째는 개인적-주관적 의미에서의 확장이다. 죄의 증가는 동시에 내 안에서도 과정과 역사-순차적으로 이뤄진다. 인간이 아기 때에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 죄를 인식하게 된다. 그럴 때에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한다. 그런데 이 죄의 인식은 가려진 상태에서는 결코 이를 수 없다. 죄는 정직하게 전부다 드러나고 일치했을 때에 인식된다. 이것을 두고 ‘죄의 확장'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죄를 저지르면서 스스로 더럽고 추잡하고 죄가 많음을 알게되었을 때에, 즉 죄가 관영하여서 완전히 확장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생명이시며 구원이신 예수를 찾게 된다. 이 죄의 충만으로 인해서 완전한 회귀가 일어나고 예수로 인해서 ‘생명이 역사하게 된다.’ 생명의 과정과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생명이 충만하였다면 이 이야기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처음에 중립적인 상태의 아기로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죄의 잠재성으로 죄로 빠지게 되며, 죄의 관영을 겪고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여기에서 ‘죄의 관영’은 개인의 진솔-정직-성찰-인식에 있다. 내가 죄를 많이 인식하는 것만큼 죄는 발견되고 죄는 관영한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반대로 죄가 많아도 인식하지 못하면(율법을 무시한다면) 그는 죄의 관영을 경험하지 못하고 생명의 시작-역사-이야기를 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에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우리는 그를 두고 ‘새 아담'이라고 ‘두번째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그로부터 ‘태어났다' 라는 표현을 하며 그의 후손과 아들과 제자로 자청합니다. 아담이 천상의 에덴에서 쫓겨나 이 땅에 왔을 때에 사람들이 없을리는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와와 함께 내려오고 하와와 더불어 자식을 낳았지만, 그들의 놀라운 지식을 받은 자들 또한 그들의 후손이며 아들이며 제자였을 것입니다. 비록 실제적인 피로 연결되어있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시 태어난 사람도 있다는 말씀을 보면 그는 분명히 ‘새 아담'이 맞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는 에덴이 더럽혀져서는 안되는 거룩한 천상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의심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지금 지구에서 에덴동산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화염검과 그룹으로 지키게하셨습니다. 그곳은 소중한 곳이기 때문에 아담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곳은 더럽혀지면 안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철거하셨겠습니까? 아니면 땅을 파서 옮겼겠습니까? 아닙니다. 애초에 그곳은 거룩한 천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생명나무가 있는곳인데, 그 생명나무는 계시록에와서 요한이 천상의세계를 목격했을때 발견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내려와서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표현은 ‘천상의 천사'를 의미하는 것같은데, 그렇게되면 충분히 천상과 지상의 이동이 불가능한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에덴으로부터 추방된 ‘아담의 후예' 일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딸들은 ‘진화된 인류' 일것입니다. 이외에 해석은 억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해석이 되었든 아담과 에덴의 특별성과 그 존재(천상으로부터 왔다는)는 증명됩니다.
3. 선악의 분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환영받지 못했고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것은 성령이 오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마태복음의 2장에 보면 헤롯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헤롯은 세상의 왕-대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그가 가장먼저 한 일은 속여서 죽이고자 한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배척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도 배척되심으로서 희생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이미 그 존재 차레만으로 ‘빛’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러분, 빛은 어떻습니까? 빛은 모든 것들을 환히 드러냅니다. 빛은 필연적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어둠은 빛 앞에서 물러납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싫어하고, 빛은 어둠을 싫어합니다.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빛을 품은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둠을 사랑하는 인간은 이 빛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보니, 온통 어둠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요셉' 조차도 등을 돌리고 조용히 떠나고자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온통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와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끔 방치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강권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등을 돌린 요셉에게 친히 찾아가셔서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메시야이심을 알려주셨고, 하늘에 신비한 별을 띄워서 메시야의 탄생을 온천하에 선포하시고, 베들레헴에서 양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메시야의 탄생을 선포해주시고, 예루살렘에 있던 시므온과 안나에게 메시야를 보여주시고, 세례 요한을 미리보내어서 메시야께서 오셨다는 것을 미리 알게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친히 그 모습을 나타내주실뿐만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수 많은 이적과 지혜와 능력으로서 그것을 확증하셨고, 최종적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서 메시야이심을 부정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본심,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하였는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위급할 때’ ‘가난할 때' ‘약한자와 강한자를 대할 때' ‘혼자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죽기 직전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말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의 앞에서 속일수도 가릴 수도 없고, 오직 모든 본심들이 철저하게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완전히 판가름납니다. 내가 빛에 속하였는지 어둠에 속하였는지 말입니다. 이미 모든 증거를 보여줘도 믿는 자는 믿고,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을 기준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는지 아닌지 판가름이 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모든것들이 판가름 난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문조차도 사실 필요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판가름 납니다. 우리는 왜 어둠이 빛과 공존하지 못하며,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빛 앞에서 어둠은 물러나며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나는 것을 압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등장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판가름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걍팍함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음에도 믿지 못했다는 것으로 더욱 더 명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계시라는 은혜를 베풀어주었음에도, 즉 충분히 믿을만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것을 저버리고 등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등장은 세상과의 분리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세상과 연합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만, 우리 또한 그의 빛으로서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독한 단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 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작이며 확장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나를 삼키기 못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서 세상을 삼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세상은 나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침범하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능력으로 하나님나라를 확장시켜 갈 것입니다.
4. 겸손, 은폐된 메시야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분, 이게 말이됩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아주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는데 ‘세상이 그가 온 지 알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겸손'이라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특히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에 열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열렬하게 사랑하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당신이 최고로 간직하고 계시며, 그 좋아하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겸손하시다' 라고 표현하는게 조금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그런 생각과 다르게 당신은 진실로 좋아하는 그것을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며 간직하고 계시는지 직접 보이셨습니다.
그는 먼저,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자궁안에 10개월간 계시며 아주 연약하고 부끄러운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천사와 천상의 모든 세계의 시선으로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주아주 미천하고 하찮은 존재로 완전히 추락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확신하건대 이 사건은 천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인간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낮아지실 수 있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 어떤 존재도 갖지 못하는 용기를 가지신 것입니다. 이런 낮고 천한 곳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려오는 그의 겸손함은 우주와 우주밖의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주 숭고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가장 좋은 자리는 커녕 오히려 짐승이 태어나는 자리를 택해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 은폐되셨습니다. 결코 자신을 나타내보이거나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겸손의 은폐라는 방식으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받지 않으면, 참으로 겸손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계시될 수 없는 계시였습니다. 은폐가 어떻게 계시가 될 수 있겠느냐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훌륭한 면접관은 어떤 면접관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그 분야에서 가장 특출나면 됩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오디션 프로그램을 봅니다. 그런데 그 오디션의 심사원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중에 ‘사업가'나 ‘인문학자'가 있는것 봤습니까? 그 심사원들은 다 어떤 사람입니까? 음악에 있어서 가히 ‘신'이라고 불리는 특출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아서 심사를 봅니다. 우리는 노래 잘하는 사람을 봤을 때 잘부른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어느정도의 수준인지 우리는 심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정도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있어봐야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이 많지 않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사랑이 뭔지 알며, 사랑을 하는 사람을 분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사랑하는척하고 속일지라도 진실로 사랑해본 사람은 그것이 거짓인지 단번에 눈치챕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성령안에서 진지한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참 된 신앙인을 알아 볼 것입니다. 만약 그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진실로 참 된 것인지 의구심을 가져야합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신앙을 잘하는 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뿐만아니라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사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대를 보십시오. 겸손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히려 모두다 높아지려고하고, 자랑하며, 사람을 무시하고, 교만합니다. 조금이라도 낮아지기 싫어서 무리해서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옷을 입고, 명품을 걸칩니다. 조금이라도 낮아지기 싫어서 우리는 공격적이고, 처세술을 배우고, 성공하려고 아둥바둥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겸손을 찾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만약에 누군가가 겸손해서 항상 옷도 검소하게 입고, 화장도 안하고, 차도 아주 오래된 똥차나 타고 다니고, 늘 사람들에게 웃으며 반박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합니까? 깔봅니다. 함부로 대합니다. 무시합니다. 갑질합니다. 사실 겸손은 금방 말한 것으로 얻어지거나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깊고 심오한 것입니다. 사실 겸손은 완전히 은폐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남들에게 말입니다. 오히려 겸손이 자신과 남들에게 인식되어진다면 그것은 ‘겸손한 척’ 이거나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은폐되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은폐되어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완전한 가려짐이며, 낮아짐이며, 은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겸손하다”라는 칭찬을 받는다면, 또 그것을 듣기 좋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겸손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겸손은 완전한 ‘은폐'입니다.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는것입니다. 오직 나조차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참 된 겸손 그 자체이기 때문에 당신에게조차 ‘은폐'되어 있었고, 세상에서도 은폐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환영하여 그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고, 별이 그의 탄생을 외쳤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아는 천사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중에서는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과 겸손, 그리고 이 사랑과 은혜가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성령의 임재로 주 안에서 합일 이루게 되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의 놀라운 사랑과 겸손을 알게 될 것이고, 이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이 은폐되신 메시야가, 진실로 참 된 메시야이심이 확인되고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보잘없어 보이는 것이지만, 겸손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은폐되는 그것이 얼마나 겸손한 일이며 눈물나고 감격스러운 것인지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오늘 이 세상에서는 가려지고 드러나지 않으신 그 메시야가 여러분들에게만큼은 가려지지 않고 오직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서 영접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금이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는 것의 폐해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 온갖 폐단이 여기서 나온다.” 주서경명
"만일 어진 이를 알지 못하였다면 이는 지혜가 밝지 못한 것이요, 알고도 들어 쓰지 않았다면 이는 어진 이를 엄폐한 것이다." - 공자가어 <안회편>
예수님의 새 시작 - 선악의 분리 - 겸손과 은폐 -시작 > 분리 > 핍박 > 확장의 과정
아담은 ‘죽음을 이 세상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 이다.
기다리는자와 그리고 소망하는자
나라의 시작은 분리와 회복과 통합의 과정 정반합(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과정)
예수그리스도의 ‘겸손'과 ‘은폐'의 역설 (어린 처녀, 낮고 천한 자리)
예수그리스도의 명백한 선악의 분리 (ex : 학교 이야기들) - 요셉과 헤롯 / 배척의 시작 그리고 파송-선교의 촉구
예수그리스도의 새 시작, 첫 사람 아담과 첫 사람 예수 (아담 족보와 예수 족보) 새 사람 아담, 새 시작 멜기세덱 , 새 사람과 새 시작 예수
성리학의 덕목은 현인을 알아보는 것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 과정신학 - 과정철학 ) 만들어져가는 우주 이야기
<참고 내용 : 고대이스라엘의 죽음과 사후세계 (소형근 교수) >
https://matsy.tistory.com/7175362
고대 이스라엘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였으며,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9) 그래서 히브리 성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네페쉬
하야’(nephesh hayah, 창 2:7), 즉 ‘살아있는 영혼’으로 표현했고,
죽은 사람을 ‘네페쉬 메트’(nephesh met, 민 6:6), 즉 ‘죽은 영혼’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육체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죽은 자의 뼈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그 사람의 영혼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다만 죽은 자의 그 영혼은
“극도의 허약한 상태에 처하여 있을 뿐”이다.10)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체와 뼈가 묻혀 있는 무덤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창 3:22-24).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신학적으로 볼 때 하나님
과의 관계로부터 나오며,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
한다.13) 그래서 죽은 자들과 접촉은 자신의 몸을 더럽힐 수 있기에(레
21:1-4) 고대 이스라엘은 죽은 자들을 터부시했다. 또한 죽은 자들은
야훼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시 6:5; 사 38:18).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면서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특정인들은 이 죽음으로부터 제외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경건한
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며(창
5:24),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
다(왕하 2:11).
죽은 자들은 사후(死後)에 하늘로 올라가는
것16)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지상세계 아래로 모두 내려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스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스올’을 중립적인 장소의
‘무덤’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로써 ‘음부(=지하세계,
지옥)’라는 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올’이 구약성서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이유는 ‘스올’에서는 하나님과 죽은 자가 단절되어 있고(욥 7:9),
‘스올’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고(사 38:18), 흑암의 장소(욥 17:13)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성서의 죽은 자에 대한 숭배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자(死者) 숭배 사상은 야훼 외에
또 다른 힘의 세력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는 엄격하
게 금지하는 규정이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빈번하게 나오지 않지만
마르제악 제도를 통해 사자 숭배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 민중 신앙의
일부 모습을 관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르제악 제도는 히브리어
20) 우가릿 지역과 고대 이스라엘(므깃도, 하솔, 악십 등)을 포함한 가나안 지역에서는
무덤의 천장에 구멍이 있어서 그곳을 통해 죽은 자에게 음식물이나 혹은 술이
공급되었던 것으로 보는데 이는 고대 근동에 있었던 사자 숭배의 모습이다.
그러나 가나안과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전체 무덤의 수에 비해 많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돌아간다는 생각이나, 자기 열조에
게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사후 세계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관심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일부 본문들 중에는 죽은 자가 죽음으로
끝나거나 혹은 죽음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사상을 지적해 주고 있다.
죽음에서 깨어나 영생을 받게 될 것이며,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들은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단 12:1-3). 그런데 폰티어스(N. Ponteous)는
이 본문을 저자가 죽은 자의 부활사상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계획하는 본문이었다고 주장한다.44) 그러나 다니엘 12장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묵시문학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본문이
맞다. 특이한 점은 다니엘 12:2에 선인이나 악인 할 것 없이 모든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는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는 자’45)
라는 표현은 ‘죽은 자들’을 의미하고,46) ‘깨어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 단어는 ‘키츠’(qîṣ)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KBL III, 1026). 즉, 다니엘 12:2은 천사장 미가엘의 우주전쟁을
통한 세상 심판 후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일부는 “영생”(ḥayey
ʿolam)47)을 얻고, 또 일부는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ʿolam)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과 회복을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 묵시적 종말사상에 근거한 개인의 부활을
다루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창 2:7), 하나님의 ‘생명 호흡’(창 2:7)으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언젠가는
깨지거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운명론적 존재가 인간이었고,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명 호흡’은 창조주가 원하면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었다(시 104:29-30).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치명적인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54) 구약성서에 나오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고대 이집트에 비하면 관심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는 인간이 죽으면 ‘쉐올’, ‘보르’,
‘샤하트’, ‘케베르’로 내려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죽은 자는 ‘조상
에게로 돌아간다’ 혹은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족묘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함께
매장하는 관습 때문으로 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자가 사후에
조상들의 모임에 들어감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경에는 ‘신접자’와 ‘초혼자’의 행위에 대해 금지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레 19:31; 신 18:11). 이런 금지 조항이 있다는
것은 당시 죽은 자의 영을 불러오거나, 죽은 자의 영과 대화하는
행위들을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일부 학자들이
죽은 자를 숭배하는 마르제악 제도를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고대 근동에 보편화된 마르제
악 제도를 명확하게 주장할 만한 내용이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의 영을 땅에서 불러오는 행위를
통해 신접자 혹은 무당의 제의적 행위들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부활사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이 이사야
26:19과 다니엘 12:2이다. 이 두 본문은 묵시문학이라는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을 의미하기보다, 묵시문학의
특징들 중에 한 요소인 ‘부활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성서는 사후 세계인 ‘스올’을 생명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미 ‘스올’에 내려간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하며(욥 7:9), ‘스올’에서
죽은 자는 잠잠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 밖의 자료인 키르베트
엘-콤에서 발견된 명문 중에는 부자 우리아가 자신의 무덤에 야훼를
“나의 보호자”, 즉 ‘나의 수호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후
세계에도 우리아 자신을 보호하시는 신으로서 야훼를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기록은 구약성서의 전통 야훼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자(死者)에 대한 민간신앙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