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1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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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본문 눅22:24-34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크고 놀라우신 사랑을 힘입어 주님께 나아갑니다. 크신 은혜 앞에 늘 겸손케 하사 늘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우리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큰 자 논쟁’ 과 ‘베드로 부인예고’의 두 가지 주제로 알려진 말씀이다. 예수님의 베드로 부인예고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사이며, 누가복음에서는 ‘큰 자 논쟁’과 ‘베드로 부인예고’ 기사가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2023년 한해를 정리하고 2024년을 준비하는 이 때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님 앞에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분의 표적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믿음은 점점 더 굳건해져 갔다. 특히 베드로는 점점 더 받을 자격 없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는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 대표 역할을 했으며, 그중 특별히 사랑하시는 제자들 안에도 포함되었다. 또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질문에 당황하여 말을 못하고 있을 때에, 어쩌면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해 보지 않았을지 몰라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이 되었을 그 때에, 베드로는 자신있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제자들과 저녁 만찬을 준비하신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아주 충격적인, 정신이 확 깰 만큼의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함께 읽진 않았지만 21절을 보면,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여러분, 그 방안에 감돌았을 끔찍한 느낌을 상상할 수 있는가? 3년간 함께 다닌 스승을 팔 자가 그들 중에 있다니! 이에 제자들은 “도대체 우리 중에 그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며 서로 물으면서 자기들 중 한 명이 그러한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배반하게 될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24절부터 보라. 예수님께서 장차 자신이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져,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 당하고 모욕당하며 결국 죽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고, 이 자리에 자신을 팔 자가 함께 있다는 것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도대체 이런 일을 할 것인가를 묻다가 결국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마치 거대한 유산을 놓고 싸우는 자녀들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안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상속될 권위에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정말 이기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제자들이 서열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이 이번 한 번 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말다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다투기를 좋아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 이전부터 제자들이 서열을 두고 그들 중 누가 큰 자인지를 두고 논쟁을 자주 벌여왔음을 의미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제자들 역시도 예수님의 곁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이 장차 로마 군인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 가운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니까, 그때 우리 제자들에게도 분명 좋은 자리쯤 마련해 주실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권력을 휘두르게 될지, 자신들끼리 서열을 정하며 말다툼을 지속해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장차 이 자리에 나를 팔아 넘길 자가 있으며, 또한 고난을 받다가 죽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데, 그런 자리에서까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권력을 갖게 될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참 황당하면서도 마음 아픈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제자들 중에서 믿음이 제일 나은 것처럼 보이고, 또한 12제자 중 대장 역할을 하던 베드로는 본문 33절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특히 본문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베드로의 고백은 더욱 결연하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분명 이러한 결단의 모습, 각오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 같다. 다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가 권력을 잡게 될런 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 때에, 이와 같은 베드로의 고백은 정말 대단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이러한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참 대단한 고백이다. 칭찬받아 마땅한 고백이다. 그런데 예수님께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어떠했나? 34절 말씀을 보라.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참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결연한 고백에 칭찬을 해 주시지 않고 저주를 하실까. 그것은 베드로의 고백 가운데 그 중심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만약 예수님께서 31절 말씀에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라고 하셨을 때에 “네! 주님, 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말씀 따라서 제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도록 돕겠습니다!” 라고 했었더라면,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 즉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 교만함을 물리쳤더라면,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르는 척하는 비참한 단계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라 부르셨는데, 31절에서는 그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 부르신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자기 과신과 영적 교만함에 대한 꾸짖음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베드로가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큰자인지 논쟁’ 하였을 때에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자 중 하나였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주님께 훌륭한 모범 답안을 하며 ‘내가 죽는 데에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의 뒤편에는 그의 영적 교만과 자기과신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베드로가 칼과 창을 든 수백만의 군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당대의 기득권층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굴복하여 예수님을 모르는 척 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작고 연약한 한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 했다. 나중에 닭이 운 후에, 얼마나 비참했을까? 무기를 든 남자들 앞에서도 용맹스러움을 잃지 않고 대제사장 종인 말고의 귀를 배어 버렸던 그 였다. 그런데 지금은 작고 연약한 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척 했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르는 척 할 때에, 닭이 울고, 예수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한다. 자신이 모르는 척 하던 구주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 과연 베드로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땅을 칠만큼 후회하지 않았을까?
여러분, 신앙의 경력이 쌓아지고 연수가 오래 될수록,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영적 교만함이 자라갈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영적 교만함들을 경계하고 제거해야 한다. 우리도 모르게 자라가고 있는 영적 교만함은 결국 우리를 비참한 상태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믿음의 신앙고백까지 했던 그 였지만, 그의 신앙 안에 교만함, 남들 보다 높아지려는 마음들이 결국 그를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이다. 비록 열두 제자들 중에 대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그 였습니다만, 그런 자리에 있을수록 더욱 겸비해야 함을 간과했던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25-26절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일수록 무리 중 가장 어린 자와 같이 겸손해야 하며, 다스리는 사람은 종의 신분과 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욱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는 잠언의 말씀을 기억하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각층에서 세상이 기억하기 쉬운 1위의 자리에 올라선다 하여도, 매순간 겸손하지 아니하고 낮아지지 않는다면 쓰러지기 쉽상이다. 사도바울도 고전10장에서 말하기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든 종과 같이 섬기는 자세로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여러분, 여러분은 21세 때에 왕위에 오른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비하지 못했다고 역대기 기자는 말한다. 결국 시드기아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나?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지 않던가? 그 외에도 성경에 겸비하지 못하여 무너져 버리는 얼마나 많은 인생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내 방식과 습관이 맞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교만이 내 안에 싹트게 될 수 있다.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 일찍 발견하고 마음을 돌이키면 되는데 사실 그것은 죄인의 본성상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 했는가를 기억하자.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도 영적인 교만에 의해 비참한 상태까지 내려 갔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라.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하신다. 비록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가장 낮은 자와 같이 행동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기 보다는 대접하기를 힘쓰며, 상전보다는 종과 같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겸손의 본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시편 147:6 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주께서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잠언 3:34 에서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주님께서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다. 또한 이사야 29:19 에서는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주께서 겸손한 자에게 주님으로 말미암는 넘치는 기쁨을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넘치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남은 2023년 2주, 그리고 다가올 2024년을 바라보며, 우리가 무엇보다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질 수 있길 기도하자.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와 성도들 앞에서 더욱 엎드려지고 더욱 겸손하게 되기를 간구하자. 교만하면 망한다. 교만하면 넘어진다. 그러나 겸손할 때 은혜가 있다. 겸손할 때 복을 주신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주여. 더욱 겸손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 앞에서 더욱 엎드러지게 하여 주옵소서. 높임받는 자가 아니라 높여주는 자 되게 하시고,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2024년 더욱 낮아지는 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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