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5 금요기도회: 히브리서 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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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덕분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지금의 힘듦 때문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저희의 연약함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하나님.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가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어 이 힘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6:13-20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6:13–20 NKRV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금요기도회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맹세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보통 맹세를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약속을 하는 상황 속에서 상대방이 약속을 신뢰하지 못할 때 맹세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신뢰를 심어줍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시 이야기하자면, 히브리서 저자는 5장과 7장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6장에서 편지를 받는 교회에게 5:12에서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성장을 해서 이제 선생이 될 시기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배워야 할 나이로 퇴보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기 떄문에 어렵다고 5:11에서 말하면서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교회를 책망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교회를 책망한 이유는 교회가 여전히 유아기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퇴보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아마 교회가 신앙생활을 하던 도중 인내하지 못하고 일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배워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두고 히브리서 저자는 교회를 향해 안타까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꾸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퇴보하여 흔들리는 교회가 무엇을 붙잡고 인내하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특별히 멜기세덱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를 위해 교회가 잘 아는 이야기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아브라함의 맹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사용한 것은 책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히브리, 즉 유대 문화나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에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사용하여 교회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저자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사용합니다. 먼저 저자는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14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며 번성하게 하실”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22:17 의 약속입니다.
창세기 22:17 NKRV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지킬 것을 맹세하셨는데, 바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맹세할 때 1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 이름을 걸고, 더 나아가 자신보다 더 큰 권위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바로 명예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때 약속의 진실성과 확실함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특히 성경의 인물들이 맹세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한다면 신뢰성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시는 이유는 13절에서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라고 말하듯이 자신보다 더 명예롭거나 권위가 높은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믿고 인내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이삭’이라는 자손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15절에서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분은 어떤 목적으로 맹세하신 걸까요?
첫째는 자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맹세하셨습니다. 16절 하반절부터 17절입니다.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바로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자신이 약속한 것을 번복하지 않고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맹세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난 약속했어. 땡땡떙”이 아니라, “내가 말씀으로 약속을 준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연약한 너희를 위해 내가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맹세하는 이유는 서로가 약속을 지킬 것인지, 못 지킬 것인지 싸우는 상황 속에 반드시 지키겠다는 맹세를 통해 싸움을 끝내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16절 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이유는 우리와 하나님이 싸워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맹세하셨습니다.
오늘 저자가 인용하듯이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 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있는듯 하지만 애굽으로 갔을 때 어떻게 합니까? 곧바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해질 것을 염려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죄를 짓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창세기 15 장에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첫 약속을 주신 후에 오랜시간이 지난 터라 약속을 향한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손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라며 자손을 여전히 주시지 않은 것을 두고 투덜거립니다.
이렇게 연약한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십니까? 제일 먼저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별이라는 시각적 장치를 통해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확실하게 약속을 믿고 붙잡을 수 있도록 맹세를 하십니다. 그 맹세가 바로 고기 쪼갠 언약입니다. 고기를 둘로 쪼개 그 사이로 하나님만이 지나가셔서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을시 이 고기처럼 둘로 쪼개지겠다는 맹세를 통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잘 알아들을 수 있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심으로 자신의 뜻을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큰 안위를 주시기 위해 맹세하셨습니다. 18절 끝에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강력한 위로를 가지도록”이라는 말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목적은 우리가 강력한 위로를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맹세를 통해 나타내심으로 큰 위로를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받은 약속이 지켜질지 알 수 없는 약속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불안하고 초조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약속이 확실한 것이라면, 우리는 약속이 이루어질 미래를 바라보며 위로를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상대방이 맹세를 한다고 해도 어느정도 의심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18절 앞부분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19 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변하지 못할 두 가지,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인해 약속을 받은 자들은 큰 위로를 가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맹세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그가 받은 약속을 의심하게 될 때 밤 하늘을 비추는 별을 보거나 고기 쪼갠 언약을 기억함으로 큰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아브라함에게는 피난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너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맹세하셨고 아브라함을 그것을 믿고 인내함으로 이삭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이 바로 너희다. 너희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다. 그러니 너희도 인내해라. 너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 확실한 것으로 인내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19절은 우리가 이 소망, 즉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닻처럼 우리를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주어 휘장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휘장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지성소는 오로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곳이어서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앞의 이야기와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5:6에서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하신 그 맹세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에게 지켜졌따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성소로 먼저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맹세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배가 닻으로 정박되었을 때의 배는 어떤 상태입니까? 닻을 내린 배는 떠내려가지 않는다는 확고부당한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지성소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께 닻을 내린다면 인내할 수 있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자신에게 닻을 내리고 정박할 수 있도록 대제사장이 되어 자신이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 너는 어떻게 해라? “교회 너는 그리스도께 소망의 닻을 내려라. 지금 당장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리스도께 닻을 내려라. 그리한다면 너는 아브라함처럼 인내할 수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인내함으로 이삭을 받은 것처럼, 너도 인내함으로 약속된 구원을 받으라.”라고 히브리서 저자가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께 소망이라는 닻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끔씩 들을 기회가 생길 때가 있는데요. 그때마다 성도님들이 치열한 삶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는게 참 쉽지 않겠다 그리고 신앙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드실텐데 열심히 하시는게 대단하시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때론 포기하고 싶고, 일탈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며 인내한다면, 우리는 약속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공로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기로 되어있는 그 구원이 우리를 믿고 인내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어 지성소로 들어가 소망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 그리스도께 소망을 둔다면 우리는 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도 믿고 인내하며,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인내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큰 위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로 퇴보한 교회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닻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열한 삶 속에서 우리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고 다시 퇴보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새순교회가 일탈하여 퇴보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영혼의 닻을 내려 튼튼하고 견고하게 되어 인내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우리의 믿음의 동역자들이 어느 누구 하나 퇴보하거나 낙오하지 않고 서로 힘을 내어 인내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이 두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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