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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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능력과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말씀을 사모하여 주 앞에 나온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내일을 살아갈 새 힘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귀한 예물 드리는 손길들 있습니다.
감사헌금, 일천번제, 00헌금, 00헌금을 올리오니
받으시고, 만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드릴 것이 차고 넘치게 부어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의 지혜로 깨닫게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믿음도 부어주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대언할 때, 나의 연약함은 감추시고
하나님의 지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말씀입니다.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할렐루야~ 우리 앞뒤 옆사람들과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큰 은혜 받으세요.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말씀을 통해
“신령한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으니
더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장 조심하고 경계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문제의 근원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1절을 보겠습니다.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것’은 신령한 ‘은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꺼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권면의 뉘앙스가 강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은사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은사가 넘치고, 그래서 은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들을 책망하고 있을까요?
그 당시 로마 식민지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직업이나 지역 조합을 구성했습니다.
그 조합에는 예외 없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기 모임 때 우상숭배 의식에 참여했고,
그 의식에서 황홀경 가운데서 예언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문화가 있지요.
개업을 하거나,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
돼지머리에 돈을 꼽고 절을 하는 문화입니다.
왜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돼지가 복과 재물을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에 돼지머리 우상신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가 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돼지 꿈을 꾸면 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돼지꿈을 꾸고 복을 받았던 경험이 없어서
실제로 그 미신이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꿈은 우리가 늘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
매일 상상하는 생각과 경험을 토대로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여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일에
기쁨과 기대함이 있다면
꿈에서도 주님이 나오고,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땅과 그 영혼을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이 향하는 선교의 꿈을 꾸고, 전도의 꿈을 꾸고,
봉사와 섬김의 꿈을 꾸고, 교회학교가 성장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꿈을 꾸지 않을까요?
그러나 교회에서 믿는 성도들과 대화하면서
어제 꿈에서 주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수고와 헌신, 내가 다 기억하고 있단다.
너로 인해 내가 참 기쁘단다.”
옛날에 가르쳤던 교회학교 제자가 꿈에 나타나서
“선생님, 선생님이 전해주신 복음 때문에 제 삶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번 주일에 전도한 성도님이 꿈에 나타나서
“집사님 때문에, 권사님 때문에, 장로님 때문에
교회가 너무 평안하고 행복해요.”
이런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믿는 성도님들끼리 대화하면서
“나 어제 돼지꿈 꿨잖아.”
“정말? 그럼 빨리 복권부터 사야지.”
“그 꿈 나한테 팔면 안될까?”
이런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은 참 많이 봤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로마 식민지에서 섬기는 우상숭배 의식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의식에서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조합 모임의 우상숭배 의식에 빠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술자리나 회식모임같은 비공식 모임에 빠지게 되면
불이익을 당하는 요즘 문화처럼 암묵적인 합의하에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통해 황홀경 중에 예언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로마나 헬라 도시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식을 통해서 사탄의 영에게 이끌려
우상을 숭배하기도 하고, 황홀경에 빠져 예언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주안에서
신령한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주인이 누구인가 그것이 중요한 핵심입니다.
바울은 참된 주인은 예수님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참된 주인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곧 신령한 것이고,
그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은사인 것입니다.
바울이 우상숭배 의식과 기독교 공동체의 예언을 비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는 의식에도 예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최고의 은사를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은사를 어떻게 받고, 어떻게 사용하며,
어떤 목적을 위해서 쓰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안에는, 자신들의 받은 예언의 은사가
다른 모든 은사 가운데 가장 최고의 은사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신령한 것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너희가 이렇게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
무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제발 예언이 가장 최고의 은사라고 생각하는
그런 무지한 생각을 버려라.
바울은 지금 예언을 강조한 미숙한 성도들을 향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은사와 직분은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 은사를 가진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선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본문 4~6절은 은사를 설명하면서
성령, 성자, 성부 하나님을 모두 소개하고 있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와 관련해서 삼위일체의 관계성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먼저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은사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은사의 다양성이 아닙니다.
은사는 여러가지 모양이지만, 은사의 근원은
모두 성령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 은사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은사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사처럼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을 가지고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직분과 은사는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직분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분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바닥에 대시고, 허리를 굽히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게 가장 높은 직분자의 모습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걸으셨던 갈보리 언덕길
십자가 고난의 여정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낮아지고, 헌신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감당하는 모습이
우리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습니까?
이처럼 은사도 직분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영혼을 살리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특정 은사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은사를 주신 목적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가 있음에도
은사를 주신 만큼 헌신과 섬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두려운 마음에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분들도 계십니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볼 때는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이 앞서는
교만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주신 은사와 직분으로
다양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신자들이 아무리 탁월하고 남다른 은사를 가졌다고 해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있으나 마나한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자비하게 사용할 경우 없는것보다 못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은사는 성령의 도구일 뿐, 사람의 도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은사를 가지고
다른사람과 자신을 구분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이 주신 은사라고 해도 악한 영에 의해 쓰임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무너뜨리는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8절부터 아주 다양한 은사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이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은사가 각종 방언을 말함과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더 신령하고, 덜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은사들의 순서를
거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더 신령하다고 여겼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전하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가
더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14장에서 예언의 은사를 방어의 은사보다
더 사모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러분, 예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말이
예언과 계시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먼저 계시의 뜻을 살펴보면,
한자어로 열 계, 보일 시 자를 사용합니다.
열어서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포칼립시스’
감추어져 있고, 덮여 있던 것을 직접 열어보여 알려주는 것.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계시는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하셔서
그 사람만 알도록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열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성경도 모두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은 무엇일까요?
한자어로 맡길 예, 말씀 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프로페튜오’ 입니다.
하나님께로 받은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언에 대해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미리 예, 말씀 언을 사용하여
미래의 일들을 미리 말하는 것이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예언서와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고, 점치고, 그래서 미리 복권사고,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언서가 미래의 일들을 말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항상 그대로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들을 알려주신 목적이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는데 목적이 아니라
지금 짓고 있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할 것이기 때문에
죄를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심판의 예언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실 때는 항상 심판과 회복의 예언이었습니다.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늘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방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자신이 더 신령하다는
교만으로 교회를 어지럽히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예언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권면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은사 자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그 은사를 사용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은사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따라서
더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은사를 두고서 갈등을 겪거나
분열이 생기는 것은, 공동체보다 개인의 유익을 위한 은사를
더 많이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높아져, 교만하게 상대를 판단한 것입ㄴ디ㅏ.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특정 은사를 자랑하거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이후에 은사운동,
성령 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은사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고,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하거나, 서로 받은 다양한 은사를
비교하며 무시하는 우월주의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됩니다.
코로나 시대가 지나고, 엔데믹 시대가 접어들면서
예배의 형태와 방향성이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간구하며
역전의 기회로 삼고 다시 날아오기를 기대하는
교회와 공동체의 분위기가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동안 잠자고 있던 영적 갈망을 일깨우며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사도의 권면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교회와 한국교회 안에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경제성장과 함께 극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동시에 은사 운동, 성령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영적인 것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영적 우월주의와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은사 남용으로 인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폭력과 불편함으로
교회의 이미지를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시점이 코로나 직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코로나 터지기 전부터 교회의 이미지는 추락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를 향해 “개독교”라고 부르며 비난했습니다.
그로 인해 코로나 확산의 초장을 기독교의 잘못으로 뒤덮는
해프닝들이 계속해서 발발하게 되었지요.
이제 코로나 시대를 잘 버텨온 한국교회가
다시 새롭게 성령의 능력으로 제 2의 부흥기를 준비해야 될 때에
성령의 은사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적용하여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덕이 되며, 서로를 세우는
아름다운 헌신과 섬김의 모습으로 자리매길 것인지
우리는 주어진 은사와 맡겨진 사명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왜 은사를 받기 원하는가?”
혹시 일부 고린도 교회 교인들처럼, 자랑하고, 비교하여
나의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닌가?
성령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은사를, 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여
다음세대의 희망을, 예비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거룩하고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통성기도
은사 우월주의로 인해 남들과 비교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에 덕을 세우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 예언의 은사를 주시도록
엔데믹 시대에 맡는 새로운 성령의 은사가 우리 교회 안에 넘쳐나도록 큰 은혜를 부어주소서
2024년 다음세대에 희망을, 예비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서울제일교회가 되게하소
주변에 환우들과 연약한 자들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세 번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