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되어라 밥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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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되어라 밥이 되어라
길고도 길었던 욥기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욥기를 설교하는 저도, 욥기를 계속 듣는 여러분도 고난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욥기를 다루면서 벗어날수 없는 주제는 고난입니다.
인생에서 고난만큼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주제도 없습니다.
특히 예고없이 고난이 찾아올때 그렇습니다.
왜곡되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고난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욥기는 바로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친구들과 수많은 대화를 통해 고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토론으로는 수수께끼같은 고난의 비밀을 찾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욥이 최종적으로 한 말은 주님을 만나 그 이유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바람대로 곧바로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고 엘리후라는 친구가 먼저 등장했습니다.
지난주 설교때 엘리후가 한 말에 대해서는 나눴습니다.
엘리후의 말은 다른 친구들보다 참 길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빨리 등장하셨으면 좋겠는데 엘리후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타나실 시간을 버는 바람잡이처럼 느껴진 사람이 엘리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주님이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볼 말씀은 40-41장이지만 38장부터 하나님은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폭풍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셔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십니다.
예를들어 누가 땅과 바다를 만들었는지, 누가 바다의 경계를 만들었는지 물으십니다.
빛과 어둠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눈과 우박이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 물으십니다.
누가 비를 내리는지, 어떻게 동물들이 비가 오는걸 미리 아는지 물으십니다.
미련하지만 엄청 빠른 다리를 가진 타조를 만든 이가 누구인지, 힘과 용맹함을 가진 말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물으십니다.
우리가 푸바오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귀여운 동물을 만드셨는지,
원래 육식동물인데 어떻게 대나무만 먹고도 사는지,
어떻게 그렇게 나무를 잘 타는지,
어떻게 사육사들과 그런 교감을 할수 있는지,
너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세상을 둘러보면 참 신비한 존재들,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창조된 수많은 피조물들, 그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신비한 일들에 대해 욥에게 물으십니다.
1-2절입니다.
주님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셨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먼저 우리가 1-2절을 볼때 생각해봐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욥에게 분노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처음 1-2장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욥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욥은 말그대로 까닭없이 고난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께 따지고 불평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잘못은 내기를 한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욥에게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1-2절을 하나님이 욥에게 분노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리분별을 못하는 갓난 아이가 칭얼댄다고해서 어른이 분노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욥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은 단지 하나님이 욥을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시려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는 원래 욥이 하나님께 바라던 바입니다.
욥은 법정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고 하나님과 다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겪는 까닭없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변론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제 욥은 소원대로 하나님을 만났으니 마음껏 물어보면 됩니다.
왜 자신에게 이토록 큰 고난을 주셨는지,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하나님께 여쭤보면 됩니다.
왜 세상이 인과응보, 권선징악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것인지 여쭤보면 됩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욥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3-5절입니다.
그 때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욥은 왜 나에게 이런 큰 고통을 주셨느냐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정당하지 않다며 따지지도 않습니다.
욥은 오히려 자신이 비천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더이상 할말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과연 욥에게 어떤 심정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38,39장의 수많은 질문들을 듣고 뭔가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대답은 분명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한가지 가능성은 욥의 인정과 순종입니다.
압도적인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 욥은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다른 가능성은 욥의 포기와 체념입니다.
여전히 욥은 억울하지만 하나님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포기하고 체념한 것입니다.
둘중 무엇일까요?
개역개정이나 새번역에 나온 어투를 보면 마치 욥이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욥이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라면 하나님도 여기서 그치셔야만 합니다.
더 말씀하시는 것은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또다른 예들 2가지를 들면서 설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욥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백퍼센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냥 하나님께 포기하고 체념한 것에 가까운 것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욥의 마음을 아시고 또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6-14절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수 있느냐? 어디 한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어 보아라. 모두 얼굴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어 보아라. 그렇게만 할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
하나님은 폭풍속에서 또다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구차해 보일 정도로 길게 설명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욥 너가 옳고 내가 틀리다고 말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욥 너가 바르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욥에게 나처럼 천둥소리를 낼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나처럼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심판할수 있겠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은 너가 나한테 따질만큼 그렇게 능력있고, 지혜롭다면 나 대신 이 세상을 운영해 보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가 가진 그 능력과 지혜로 이 세상을 질서있게 운영할수 있을것 같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욥이 옳다고 여기는대로 어느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곧바로 징계를 내리고, 선하게 살면 복을 받게 한다면 이 세상이 잘 돌아갈까요?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잘 드리면 이 땅에서 무조건 잘살고, 주님 안 믿으면 무조건 망하고 고통받는다면 세상이 잘 돌아갈까요?
생각나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브루스 올마이티’입니다.
이 영화에서 브루스라는 친구는 하는 일마다 잘 안됩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자기 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불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브루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할 일을 그가 대신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브루스는 처음에는 무엇이든 할수 있어 너무 좋아 합니다.
그러나 점차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이 되니까 복잡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할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줘야 하니까 너무 힘든 겁니다.
그래서 브루스는 그냥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기도에 응답해줍니다.
그럼 세상이 더 잘 돌아갈줄 알았던 것이죠.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요?
오히려 세상은 혼란과 혼돈 그 자체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서야 브루스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지혜롭고 질서있게 통치하고 계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불만도 불평도 사라지게 됩니다.
어쩌면 욥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게 아닐까요?
너에게 일어나는 일가지고 나를 함부로 선하다 악하다 능력이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판단할수 있니?
너의 능력과 지혜로 내가 하는 일을 함부로 판단할수 있니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욥처럼 생각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옳은대로 조종하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야 좋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내게 관심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에 존재하지 않는 분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우리의 작음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크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욥의 마음이 썩 개운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또다른 예들을 드십니다.
15-24절인데 읽지는 않겠습니다.
개역한글은 여기서 묘사하는 짐승을 하마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무슨 짐승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짐승이 무시무시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통제할수 없는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하마가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그렇치 원래 사자도 잘 덤비지 못하는 무서운 동물이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짐승을 만드시고, 통제하시고, 조종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지혜면에서 우리의 작음과 하나님의 크심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4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베헤못뿐만 아니라 리워야단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하십니다.
리워야단의 강력한 외모와 힘, 길들여지지 않은 용맹함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리워야단은 개역한글이 악어로 번역합니다.
베헤못이 하마냐, 리워야단이 악어냐는 별로 중요한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컨트롤할수 없는 신비한 존재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만드셨을까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공들여서 욥에게 길게 설명하고 계실까요?
그리고 왜 욥이 원했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우리는 까닭없는 고난을 겪는 욥을 하나님이 위로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너는 잘못없다.
내가 너의 신앙이 진짜인지 시험해보려고 한것이다.
이렇게 말해주셨더라면 욥의 속이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일까요?
하나님이 설명하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크고 위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작고 비천한 인간이니까 그냥 입다물고 받아들여 이렇게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런 식이라면 그냥 몇마디 명령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욥에게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일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구석구석을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욥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너가 볼수 없는 곳에서도 너가 손닿을수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통제할수 없는 하마와 악어까지도 내가 만들고 통제하는데 어찌 나를 닮은 너를 돌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은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욥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욥이 진짜 뭔가 얻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욥이 도저히 알수없는 일이 하늘에서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욥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그것이 부조리해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쓴『한 말씀만 하소서에 나오는 한 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박완서씨는 그의 책에서 명문대 의대생이었던 외아들을 잃고 난 후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제관 응접실에서 신부님을 뵙고 긴 위로의 말씀을 들었으나 자식도 낳아보지 않은 분이 내 마음을 어찌 알까 싶어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놓인 백자 필통이 눈에 띄었다. 거기 쓰인 “밥이 되어라”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신부님이 손수 쓰신 건지, 아니면 어떤 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이 쓰신 건지 그건 분명치 않았다.
누가 썼건 실상 그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밥이 되어라, 밥이 되어라”를 입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분도 수녀원에서 맡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냄새를 떠올렸고, 어쩌면 주님이 그때 나에게 밥이 되어 오시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몇 날 며칠을 밤이나 낮이나 주님을 찾아 대들고 몸부림쳤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한 말씀만 하시라”고 애걸복걸도 해 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어쩌면 나직하고 그윽하게 뭐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늦게 난 철처럼 슬며시 왔다.
그래.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을 거야. 다만 내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꽉 막혀 못 알아들었을 뿐인 것을.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응답으로. 그렇지 않고서 그 지경에서 밥 냄새와 밥맛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돌보십니다.
세상의 미물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돌보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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