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마무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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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31-33
매년 연말이면 그 해를 대표하는 단어를 발표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 미국에서 발표한 올해의 단어로 “Truthiness”(츄루스네스)라는 단어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성향’ 이런 뜻을 가진 신조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튜브에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꾸미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보니까, 살을 빼주는 약이라고 만들어서 무명의 배우들을 마치 약사인 것처럼 인터뷰 영상을 만들어서 약을 판매하기도 했더라고요.
쉽게 체지방을 뺄 수 있는 알약이 정말 있다면 누구나 다 쉽게 살을 빼지 않겠습니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 인간의 성향을 악용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19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서 불순종했던 사울 왕을 책망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렇게 책망을 합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여러분, 이 구절을 가만히 보니까요. 사울 왕이 전쟁을 치르면서 탈취하는 부도덕한 일에만 몰두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요. 가솔린 기관이 생각났습니다. 가솔린 기관의 구조를 아시죠? 흡입밸브가 있고 배기밸브가 있습니다. 흡입밸브가 열리면 배기밸브가 닫히고, 배기밸브가 열리면 흡입밸브가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사무엘상을 읽으면서 영적인 흡입밸브가 이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영적인 배기밸브 같더라고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열려지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밸브가 열려 있으면 불순종과 탐욕으로 유혹하려는 밸브가 닫혀서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고 반대로 우리가 탐욕과 불순종의 밸브가 열리게 되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밸브가 닫혀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원리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어느 쪽 밸브가 주로 열려 있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 17절에 보면, 우리 주님이 탄식하시면서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들이 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들 좋아하는 것만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슬픈 쪽에는 귀를 닫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조용히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주님, 오직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밸브를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제 심령에 원활히 들려질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연말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 제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차원에서 오늘 마태복음 13장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밭에 심어놓은 겨자씨와 같고 또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이 두 비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천국을 소망하는 우리가 늘 마음에 담아야 할 두 가지 전제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첫 번째 전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의 생명력’입니다. 복음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큰 바윗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옆에 눈에 보일까말까 한 먼지 같은 겨자씨가 있습니다. 맨눈으로 보기에는 이 겨자씨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바윗덩어리에는 없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이 작은 겨자씨가 바윗덩어리보다 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룩곰팡이가 큰 밀가루 속에 던져졌다 했을 때, 양으로 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그 누룩곰팡이 속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부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에게 이 복음의 생명력이 있었는가?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생명이 내게 있는가? 그래서 늘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사는가? 이 부분들을 곰곰이 점검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전제가 있다면, 천국은 미약하게 출발하는 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것 아닙니까? 이렇게 작고 미약하게 출발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속성을 이해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정리가 많이 됩니다.
여러분, 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신 주님이 슈퍼히어로처럼 망토를 휘두르면서 모든 사람을 압도해 버릴 영웅의 모습이 아닌, 약하디약해 보이는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왜 메시아이신 그분의 태어나심을 권력이 있는 헤롯왕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리지 않으시고 보잘것없는 천한 목자들에게 먼저 알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천국 사역에 필요한 12명의 제자를 뽑으실 때, 준비도 안 되고 볼품없는 사람들을 사용하실까요? 더 이해가 안 되는 거는요. 왜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목사로 부르셔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실까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게 천국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미약하게 시작하는 것, 항상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 이것이 오늘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천국의 비밀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일하실까요? 왜 약한 자를 사용합니까? 왜 출발이 미약해야 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시작이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해야지만, 그 연약한 재료로도 차질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면 초라할수록 이런 나 같은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차질없이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왜 기뻐합니까?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하면 약할수록, 내가 겨자씨처럼 미미한 존재이면 미미한 존재일수록 강하신 그분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법칙을 깨닫는 성도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의 원천이 자기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아는 겸손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바로 내가 겨자씨와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 처음 출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보잘 없는 연약한 존재였다는 것. 이 처음 출발할 때 우리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식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자! 이렇게 두 가지 전제. 복음의 생명력과 미약하게 출발하는 천국 법칙을 겸손하게 반응하며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꼭 붙잡고 살아가시면 이 두 가지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의 은혜로운 모습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런차원에서 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비록 미미하지만 생명력을 품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하는데요. 생명력이 있는 복음을 간직한 사람들의 세 가지의 모습 중에 첫 번째는, 그들에게는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망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의 증거입니다. 디도서 2장 13절 합독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여러분, 성경의 표현들을 보세요. 얼마나 멋집니까? “복스러운 소망”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이 구절을 읽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누가 커야만 하고, 누가 크면 안 될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누가 크셔야만 합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크셔야 합니다. 그분은 크셔야 하고 높으셔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은 크고 그만 안 커도 그만이라는 거예요. 크신 주님을 바라보니까 현재 내 모습이 겨자씨와 같이 작아도 낙심하는 마음이 없어요. 크신 주님을 바라보니까 현재 내 꼴이 초라하고 약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복스러운 소망을 건들지를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9절 합독.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모든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어떻게 이런 낙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다 우리는 메뚜기 같고 죽을 것 같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현실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만 크시면 된다는 것 아닙니까? 나는 메뚜기 같아도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만 크시면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셔서 이기게 해 주실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메뚜기 같지만,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는 긍정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간직한 사람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하면 전 세계에서 천재들만 모인 학교 아닙니까? 그중에서 이 하버드 법대생들을 수십 년 동안 관찰하고 연구했더니 아주 참 흥미로운 것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하고 30년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2023년이니까 1993년에 입학한 사람들을 역추적해서 조사를 했겠죠? 다 조사를 해보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의 출발이 어디 있는가 봤더니 학교 들어갈 때 입학성적순이나 아이큐 순이 아니더래요. 부모에게서 많이 물려받은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인생의 행복의 척도가 입학하던 그 시점, 오늘로 치면 1993년 입학할 때 그가 세상을 얼마나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는가 하는 그 무게만큼 30년 뒤에 행복을 누리더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공부 잘하는 순으로 행복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순이나 재산 많은 순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누리는 이 정도의 행복은, 20년 전, 30년 전에 그 환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낙관적인 태도의 무게만큼 오늘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가정이 행복한 분들 계시죠? 배우자를 잘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을 잘 만나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20년 전, 30년 전에 결혼을 할 때, 알고보니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멀쩡하게 보이는데, 가정도 별로이고 허우대만 멀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겨자씨와 같이 작은 그 연약한 상황에서 그것들을 기쁨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간 사람들. 그렇게 현실의 어려움을 낙관적으로 바라본 그 무게만큼 지금 그 가정이 행복한 거예요.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행복해지려고 애쓰고 노력했지만, 결혼 관계라는 게 나만 노력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방이 다 흩트려놓아서 가정이 깨지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 법칙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마음을 고쳐먹고 오늘 가정을 보는 태도를 고치고 오늘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고 그렇게 살아나가면 이것이 겨자씨가 되어서 10년 뒤, 20년 뒤에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1절과 12절에 보니까요.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또, 로마서 15장 13절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자꾸 허무한 마음이 찾아오십니까? 내가 올 한해 뭐 했나 싶고 빈손으로 마무리하시는 것 같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충만함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면 내 안에서 사라진 소망이 회복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60장 22절에
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바로 이 소망입니다. 작지만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올 한해를 돌아보면 저도 하나님께 부끄러운 게 많고 죄송한 것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힘을 얻는 것은, 내년을 기약하는 것,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그날을 속히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저는 오늘 이 시대를 낙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낙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낙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온 2023년보다 내년이 더 화목한 가정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올해보다 내년이 더 부흥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항상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커지는 게 천국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생명력이 있는 복음을 간직하고 사는 성도들의 모습 두 번째는,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으로서의 ‘실행력’을 갖춘 사람이더라는 겁니다. 이 실행력이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다른 각도로 31절을 보기를 원하는데요. 31절 합독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제가 이 구절 속에서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뭐냐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라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이 실행력이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연약함이 뭘까요?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이 씨앗의 성분만 분석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지?’ ‘왜 안 되는 거지?’ 또 설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유튜브, 기독교방송 온통 설교와 강연이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겨자씨를 심읍시다” “겨자씨를 심으면 좋다던데요” 그거 의논하고 분석하느라고 정작 심으러 가야 할 때 못 가는 것 아닐까요? 책상에 앉아서 그거 분석하느라고 심어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릴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은요. 실행력이 있으신 분이세요. 천국이라는 겨자씨를 땅에 심으셨어요. 반면에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깨달음은 많은데 너무 실행력이 약해요. 깨달았으면 겨자씨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세오경 성서강좌 때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비대칭 신인협력‘이라고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실 때,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도 전쟁에 나서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90을 해 주시면 인간은 10, 하나님께서 99를 해 주시면 우리 인간은 1을 하는 게 바로 ‘비대칭 신인협력’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전3:5-6 합독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우리가 물주고, 노력하고 우리가 애쓰면 하나님께서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실행력요. 저는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가 큰 깨달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심고 물주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만큼 일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해야 할 일을 실행하시면 됩니다.
벌써 한 20년 전인 것 같아요. 캐나다에서 한국, 일본, 캐나다 청년들이 모여 국제 포럼을 열었는데, 제가 거기에 참석했다가 캐나다 밴쿠버 공원에서 참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거기 벤쿠버 공원에 연어가 회귀해서 올라가는 물길이 있더라고요. 이것을 밴쿠버시에서 투명한 관으로 덮어가지고 관광용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연어가 거꾸로 올라가는 것을 다 보여주는데, 와~ 연어들이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여러분, 연어는 회귀하기 위해 폭포를 뛰어넘는 물고기 아닙니까? 그런데 가까이 가서 봤더니 그게 그냥 힘이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 투명 유리 안으로 비치는 연어들을 보니까 몸이 성한 연어가 별로 없어요. 어떤 연어는 거친 물살을 거스러 오르느라 비닐이 찢어지기도 하고, 어떤 연어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더라고요. 여러분, 그 연어의 도전정신, 폭포에 막히지 않는 힘 있는 도전정신이 아무런 대가지불도 없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같은 목사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이론으로는 꽉 차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연어보다 더 잘 알고는 있는데, 움직이지를 않아요. 털끝 하나 다칠까 봐 아예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대가지불 안 하고 싶은 게 우리 마음 아닌가요?
우리가 움직이면 죽을 것 같아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가 그 파도 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론적으로 ‘내가 여기 뛰어내리면 주님께서 받아 주실까?’ 그러면서 배 안에서 턱 괴고 생각만 했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다소 무모하지만, 모험정신을 가지고 그 파도 치는 바다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 물 위를 걷는 기적을 경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이 연약함이 다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소망이라는 낙관적인 마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행할 수 있는 실행력도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언제나 주님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시면서 악한 것과 게으른 것을 동급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악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올 한해 우리가 악한 적은 없었지만, 혹시 게으른 적은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을 회개하고 2024년 내년 한 해는 연어처럼 도전정신과 실행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겨자씨를 심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겨자씨와 누룩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장해 가되, 점진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이것을 뭘 의미할까요? 믿는 사람에게 요행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심었는데, 내일 나무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주세요. 단번에 뭔가를 이루기를 바라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일에 충성하며 겸손하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변화의 결과’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 겨자씨와 같은 천국 법칙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32절 합독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저는 이 모습을 우리 교회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내년이면 70주년이 되지 않습니까? 이 하계동 땅에 처음 하계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했는데, 장자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의지할 데 없고, 쉴 곳 없는 이 하계지역의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가 넉넉한 나무와 같이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누구나 우리 교회에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진짜 로뎀나무의 쉼터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이 32절을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에 이런 소원이 생겼어요. ‘주님, 제가 이런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전에 저는 그 조성모씨가 불렀던 가시나무라는 노래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나도 많아서’ 이 헛된 자아가 많아서요. 모나고 뾰족뾰족한 게 많아서 저에게 선심을 베풀었던 사람들을 찔러대는 일만 하고 그래서 쉬러 왔다가 상처받고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풍성한 은혜를 누려서 이제는 그런 모난 부분은 다 깎아지고 더 성장하고 자라서 누구라도 내 인생에 찾아와서 쉬고 가고, 상처받은 사람은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인생이 되면 어떻겠나? 하는 마음에 소원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새벽에 가장 많이 기도하는 제목은 그런 것입니다. ‘주님, 제가 미숙하고 어리지만, 우리 교우들의 쉼터가 되길 원합니다. 찢기고 상한 심령이더라도 심목사를 찾아오면 평안해지는 쉼이 있는 목사.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잘 갖추어진 나무와 같은 목사가 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또 주님,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더 자라게 해 주십시오. 더 성장하게 해 주십시오. 모난 부분은 더 깎이게 해 주옵소서.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녀들이 마음껏 내 심령에 참 둥지를 틀고 쉴 수 있는 넉넉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좀 더 따뜻하게 대했어야 하는데, 그때 더 받아 주고 이해해줬어야 하는데, 그때 그 말은 내가 안 해야 했는데’ 부끄러운 것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으로 위로해 주세요. 괜찮다는 거예요. 원래 저는 약하다는 거예요.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가정도 일구게 하시고 목사로 만드셨다는 거예요. 겨자씨와 같이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거예요.
깨닫게 되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더 자라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올해보다 내년은 좀 더 성장해있는 내가 될 거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올해는 미숙했지만, 내년에는 더 성장한 가장으로, 성도로, 또 목사로 조금 더 성장한 모습으로 자라게 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름교회도 내년에 더 좋아질 거예요. 지난번 정책당회를 하면서 장로님들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올 한해 교회가 안정되어 좋다는 거예요. 그게 저 같은 목사 한 명이 잘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장로님들이, 우리 성도님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소망을 품고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년에는 더 좋아질 거예요. 이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올 한해 마무리를 잘하시고 송구영신예배 때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와서 ‘하나님, 우리 가정이 올해를 출발할 때는 겨자씨처럼 미약했지만, 이만큼 자라게 하셨는데, 가장인 제가 우리 자녀들에게 손주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인생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한 가정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제가 지혜가 있어야 이 가정을 잘 이끌 수 있는데, 지금은 겨자씨와 같이 너무 약합니다. 주님, 넉넉한 다 자란 나무처럼 남편과 자녀들을 넉넉히 품을 수 있는 넓고 깊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소망 되시고 힘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그 마음들을 다 알아주시고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올 한해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고, 뭔가 이룬 것도 없는 것 같고 내 안에 연약한 것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있지만, 겨자씨와 누룩같이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주시면서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풍성한 마무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가는 저와 우리 교우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약할 때 강함되시네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올 한해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고 뭔가 답답하십니까? 미약한 출발이었지만 반드시 풍성한 은혜로 마무리해 주실 것을 사모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제가 가장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넉넉한 나무처럼 쉼을 제공하고 품을 수 있는 인생 되길 원합니다. 게으르지 않게 하옵소서. 더 자라게 하옵소서. 더 성장하게 하옵소서! 복음의 생명력을 주옵소서”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복음의 생명력을 주옵소서. 비록 올 한해 겨자씨처럼 미약한 출발이었지만, 천국의 법칙에 따라 점점 더 풍성한 은혜로 마무리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 하름교회가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을 가지고, 실행력을 가지고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넉넉한 숲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년에는 더 좋아질 거라는 복스러운 소망을 품게 하시고 더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겨자씨와 같이 미약한 출발이었지만, 넉넉한 나무처럼 풍성하게 올 한해를 마무리하길 소망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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