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이리 떼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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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 10:1-3
제목: 어린 양을 이리 떼 사이로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어린 양을 이리 떼 사이로”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세워서 두명씩 파송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3절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2절 말씀을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시대는 추수할 것이 많은 시대였습니다. 추수할 것이 많기 때문에, 추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자들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천군천사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부르시어 친히 양육하신 뒤에 제자들을 추수하러 보내신 것이죠.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주십니다. 2절 말씀 하반절 보세요.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제자들이 주님께 구해야 하는 기도 제목은 단순 명료합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주님께 간절히 구해야만 하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할 것들이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교회의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고,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하나둘씩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다음 세대의 영혼들은 교회를 계속해서 이탈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누가복음 10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추수할 것이 많다고 표현하셨죠. 그리고 3절에서는 추수하라고 보내심 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가 어떤 행위인지를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어떤 행위인지를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습니다. 그런데 3절 말씀을 원어대로 해석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단순하게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이론과 실제가 일치해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는 아무런 선택권 없이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갑니다. 1절 말씀 하반절 말씀 보시면, 예수님께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제자들을 두 명씩 앞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선택해서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라고 보내신 곳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어서 3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행위가 어떤 행위라고 합니까? 어린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행위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린 양이 이리에게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저의 생각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만큼 복음 전파에는 위험요소가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길 가는 사람에게 전도지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자기 돌을 집어서 던진다거나, 거칠게 욕한다거나, 침을 뱉는다거나, 이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 교회 근처에서 복음 전파하는 일은 그렇게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만 넓혀서 생각해 보면,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언론이나 신문에 보도되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 뿐이지,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는 선교사님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가라는 말이 무엇이 그렇게 나쁩니까?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오히려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말이 됩니까? 솔직한 말로 복음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전파자에 대한 박해는 예수님께서도 당하신 일이고, 사도들도 당한 일이고, 사도들의 제자들도 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역사 가운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핍박당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는 어린 양이, 맹수들의 무리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합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기가 세고, 싸움을 잘하고, 이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은 어린 양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맹수와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약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우월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린 양과 같이 무력한 상태로 맹수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겸손한 자세, 더욱 낮아진 자세로 상대방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 수요전도팀이 노방전도할 때 90도로 인사하면서 전도지를 드리는데요. 한참 어린 사람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 전도지를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양이 이리에게 다가가는 바람직한 자세이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이 모자라서 허리를 숙여야 합니까? 우리 전도사역부에 속한 지체들 가운데 40대 있습니까? 40대도 없죠. 최소 50대 이상이신 분들이에요. 그럼에도 나가서 전도할 때 허리숙여 인사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한 의미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린 양과 같고 상대방은 맹수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0장 3절 말씀을 기억하면서 두 가지 내용을 적용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보내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식만 채우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현장에 내보내셨습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라. 가라는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상황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부디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는 전도사역부 지체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는 어린양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복음전파자로 보내심을 받는다면, 누구든 관계없이 어린양처럼 순하고 연약한 자세를 취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거부하면, 니가 복음을 거부해? 너만 손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어린 양의 위치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의 복음 전파자로서의 참된 자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허리 숙여 인사하며 복음을 전하신 우리 권사님들. 대단히 수고 많으셨고 잘하셨습니다. 성경적인 복음 전파 방식을 채택하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의 말씀 따라,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은 이 현상을 벗어나려하기 보다, 한결같이 낮은 자세로 복음을 전파하시며, 주님의 제자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는 우리 전도사역부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 기억하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화평교회가 복음 전파하는 교회 되도록, 양을 이리떼 사이로 보냄과 같은 이 복음전파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는 우리 교회 되도록 기도해 주시고요. 오늘 사역 가운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어서 우리 전도 사역부 부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 보시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추수할 것이 많은 이 세상 가운데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셨음을 고백합니다. 양을 이리떼 사이로 보냄과 같은 이 복음전파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더욱 낮아진 자세로 기쁘고 복된 소식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리 떼 사이로 나아갈 때에,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고, 우리를 통해 주님의 크신 은혜가 온전히 선포되며 전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 감당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 전도사역부 가족들 기억하여 주시고, 이 시간 함께 기도한 기도제목들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하여 주시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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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누가복음2 – 데럴 벅 (pp.74)
예수님은 열두 제자 외에 70명의 제자들을 임명하심.
예수님은 그들이 여러 지역으로 가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준비하게 함.
지금은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임. 그러나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일꾼들이 너무 적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일꾼들이 현장에서 수고하는 것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기도와 절대적인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결정됨. 추수할 것이 많다는 표현을 통해 복음 전파를 위한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묘사됨. 선교 사역은 흔히 추수라는 이미지로 표현됨. 추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할 것이라는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것을 가리킴. 또한 추수할 것이 많다는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사람들에게서 거부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점을 넌지시 알려줌.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추수를 도울 일꾼들이 매우 적다는 것. 복음 전파 사역의 목적 중 하나는 제자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 이를 통해 선교 사역에 더 많은 제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메시지가 더 널리 전파되도록 도울 것.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이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공급해 주시는 것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힘.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일꾼들을 강제로 보내서는 안 됨. 또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야 함.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은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해야 함.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추수하는 주인’(직역-추수의 주인)이라고 말씀함.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강조함. (눅 10:21-22에서 다시 강조됨)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널리 전파되도록 주관하시고 이끄심.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이를 테면 일꾼들을 내어 쫓듯이 보내심. (에크발로는 내던지다, 내어쫓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 그러나 에크발로는 강제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준비시킨 다음, 그들을 내보내시는 것을 강하고 생생하게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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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반 누가복음 (pp.474)
제자들은 가서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음. 추수가 궁극적으로 그들의 추수가 아니라 주님의 추수이며, 모든 것은 주님의 제한이 없는 자원에 달려 있기 때문. 예수님은 추수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이 돌아올 때 그들은 예수님을 “주”(17절)라고 적절하게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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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TC 누가복음(pp.413)
70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음.
“세웠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헬라어 문헌에서 외교 상황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 누가-행전에서 이 동사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할 때에만 사용되는 단어. 본문과 사도행전 1:24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공적인 임명을 가리키며, 하나님에 의한 임명은 예수를 주로 표현한 내용으로 확인됨.
추수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하며(욜 3:1-13; 사 27:11-12)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핵심 계절을 상징함. “추수의 주”는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으나, 1절에서 예수님이 “주”로 밝혀지고, 17절에서도 “주”로 언급되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과 사실상 동일하고, 예수님께서 “추수의 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함.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사명을 맡은 70명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심각한 말씀일 수 있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음. 70인은 부족한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름 받음. 그들은 사명을 위해 가기 전에 추수를 위해 주께서 일꾼을 보내주시도록 먼저 기도해야 함. “구하라”는 표현은 ‘데이스다이’인데, 이는 간청하다, 애원하다, 기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에크발레인’은 보내다라는 뜻보다 훨씬 강력한 뜻을 가지고 있음. 조금 특이한 표현으로서 일꾼들이 이 사명을 지원하는 개념보다 급파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함. 따라서 2절은 70명의 제자들이 “추수의 주인”에 의해 파송되는 것을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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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pp.325)
벤하닷이 목숨을 구걸했고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음.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합이 두 번이나 자신과 자신의 백성을 초토화시키려고 했던 오래된 숙적과 조약을 맺는다는 것. 아합이 얻는 모든 이익은 “포획된 성읍들의 반환과 다메섹에 치외법권을 갖는 시장을 세우는 권리”임. 왕상 15장 18-22절에서 점령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에 반환될 것. 그러나 그것은 열성적인 적을 살려 주기로 보장하고 받는 비싼 대가임. 아합은 평화와 우정을 사고 싶어 함. 그는 앗수르인들을 주시하고 있는지도 모름. 그러면서 아합과의 조약으로 자신의 힘이 강해져서 이 위협적인 동부 세력에 맞서기를 바랬을지도 모름. 아합은 실제로 BC 853년에 살만에셀 3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아람과 함께 카르카르로 출정함. 아합은 자신이 자비를 베푼 이점이 무엇이 될 것이라고 상상했든, 곧 자신이 지불할 대가를 알게 될 것.
이름 없는 선지자가 아합에게 비유를 들어 말을 하는데, 아합은 다윗과 같이 자기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림. 선지자는 아합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을 통해 아람 사람들을 넘겨주었을 때, 벤하닷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그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열왕기상 20장 29-40절에서 사실이 됨. 그의 판결을 들은 왕은 시무룩하고 화가 나서 왕궁으로 돌아갔음. 이런 뾰루퉁한 성향은 생애 마지막 두 주요 에피소드에서 아합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