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기(고린도전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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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7주일오후
제 목: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기
본 문: 고린도전서 1:1-3
찬 송: 269장 그 참혹한 십자가에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문제를 문제로 보면 문제가 된다.
1. 도입 – 고린도전서 개요(성결 구절을 ppt에 기록)
이 시간은 고린도전서의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의 개요를 잠시 말씀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고린도전서의 저자는 1차적으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딤후3:16)”는 기록을 통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통해서 기록하셨으니 고린도전서를 직접 글을 기록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1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은 받은 바울과 소스데네는”이라고 시작하며 저자가 자신임을 밝힙니다.
(2)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A.D. 49-52년) 기간 개척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기록하며 수신자를 밝힙니다.이것이 1차 수신자이고,2차 수신자는 2절 하반절에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나들에게”라고 기록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교인 뿐만 아니라 2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수신자임음 밝힙니다.
(3) 고린도전서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사진 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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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에 당시 고린고 시가 서신의 중요 무대가 됩니다.
고린도는 지리적으로 좁은 지협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지리적인 특징을 통해 고린도는 배가 다니는 길의 요충지가 되어 해양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야외 극장, 운동 경기장, 각종 이방 신전 등을 골고루 갖는 경제, 문화, 종교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급속한 발전 뒤에는 항상 부작용이 있듯이 고린도 도시는 타락하게 됩니다. 사치, 향락, 매춘 등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울은 2차 여행 도중인 A.D. 50년경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다가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게됩니다.(행18:6) 이 반대로 인해 회당 옆 ‘디보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 회당장 그리스도를 비롯한 많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례를 배출하게 되고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4) 고린도전서의 기록장소와 기록 동기를 살펴보면, 먼저 고린도전서의 기록은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베소입니다. 에베소의 위치는 지도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사진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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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고,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록한 동기를 살펴보시면
고전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개역개정)
고전7:1 이제 여러분이 써 보낸 질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좋습니다(우리말 성경)
첫째 글로에의집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있는 분쟁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둘째 고린도 교회에서 온 편지를 받고 편지에 제기되어 있는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서신을 기록합니다.
정리해보면 글로에의 집 사람들과 고린도 교회에서온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회의 신앙이 이전보다 퇴보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잘못된 예배 행위, 생활 속에서 종종 범하기 쉬운 교리적, 도덕적 범죄, 불법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교훈하고자 고린도전서를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에 개요를 살펴봄으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들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도덕적 영적 타락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는 이 문제를 알고 고린도전서를 기록합니다.그러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자 할까요? 우리나라의 상황도 고린도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불과 몇 십년 동안 폐허가 된 전쟁 국가에서 선진국으로 불릴 정도로 빠른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고린도 도시와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가 얼마든지 우리 나라와 이 나라의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봄으로,
우리 안에 있는 혹여라도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2. 본론
첫 번째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회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무너지고, 영적인 토대가 흔들리니 무엇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정체성은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입니다.예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장 옳은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결정 되어집니다.(사진파일)
강동연 주연의 ’전우치‘라는 코믹스러운 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과 악의 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선에 편에 있던 전우치와 선에 편에 있는 화담 선생이 나옵니다. 화담 선생은 선에 편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선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적들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게 되고 자신이 선에 편에 있는 자가 악에 편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악에 편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자 돌변해서 선의 편의 있는 자들을 해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니 선택과 행동이 결정 되어졌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군 인지를 알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그 행동을 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지금 고린도 도시와 고린도 교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방탕한 고린도 도시, 방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오히려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이 속한 구절은 서신에 반복 되어져 나온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방탕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도 똑같은 인사를 전합니다.
이 서신을 받는 그들이 누구이기 때문입니까?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 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너희의 삶의 모습 속에 ‘도덕적 해이’가 있을지라도, 너희에게 ‘영적 해이’가 있을지라도 너희는 본래 그런 자들이 아니다.”
너희는 ‘방탕한 자’들이 아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로 거룩하여진 자들, 성도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를 읽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 모든 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그림사진)
미운 오리는 남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을 보는 모습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달라보였고 또 다른 모습이 초라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자신은 미운 오리처럼 보였고, 남들과 다른 못난이였습니다. 자신의 다른 모습이 미워 보일 때 그는 여전히 미운오리새끼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백조인지를 깨닫게 되자, 백조가 되어 날개를 활짝 펴고 맑고 푸른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미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인이 여러분을 바라보는 시선, 판단하는 시선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고, 타인이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시고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너희는 누구나, 우리의 삶을 규정하시며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시면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합니다.
이 본문을 필립스 신약성경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벧전2:9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손’이며, 그분의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특별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불렀던 옛 호칭은 이제 모두 여러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둠에 있던 여러분을 놀라운 빛으로 불러내신 선한 그분을 알려야 합니다(필립스 신약성경)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셨습니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특별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우리의 신분, 우리의 소속, 우리의위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으며, 저 또한 여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소속이 어디인지 알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바를 알게 됩니다. (사진)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한 저격수가 러시아 군에게 붙잡여 처형당하기 직접 한마디를 외칩니다.‘우크라이나에게 영광을’ 이 한마디를 하고 의연하게 생을 마칩니다.
여러분 러시아 군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의 소속인지 분명하게 알았고 그 신분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그의마지막 모습을 인형으로 복원하고 고향에서는 동상을 세워서 그의 희생을 정신과 조국을 향한 헌신을 기립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들의 소속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소속에 맞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인가요?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비난과 정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전해줍니다.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질타와 비난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있기를 소망하는 축복을 빌어줍니다. 다른 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인사를 전해줍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들을 음행의 문제, 파당의 문제,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느냐의 문제, 성만찬 문제, 성령의 은사 문제들을 볼 때에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요. 그런데 그 말들을 뒤로하고 축복의 인사를 먼저 건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증언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기록.
1) 가장 율법적이었던 사람,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
빌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2) 교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며 수고했던 사람
고후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 자신의 대한 소개는 그가 얼마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율법적으로나 복음적으로나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그 기준으로 가지고 많은 말을 쏟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 기준으로 비난과 정죄가 아니라 축복의 인사로 고린도전서를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1)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목적이 정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2) 세움이 비난과 정죄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 바울 자신이 지난 과오를 인정할 때, 누군가 자신의 ‘과오’를 덮고 받아줌을 통해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정죄하며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받아주었습니다.
고등학생 때인가.. 어떤 집사님께서 가정에 생긴 물질의 문제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문제가 얼마나 급하고 어려운 문제였는지, 그리고 손 쉽게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응답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주변의 지인이 필요한 물질을 융통해 주는 것이 응답으로 왔습니다. (여러분 서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는 물질 거래를 되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니 어떻게 응답이 왔습니까? 주변의 사람을 통해서 응답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임하기도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은혜의 통로로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비난과 정죄의 말이 아니라축복과 평강의 말로 시작함으로 그들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어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혜가 식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일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는 기꺼이 자신을 은혜의 통로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의 자신을 기도의 자리로, 섬김의 자리로 내어주게 될 때, 그와 같은 헌신자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교회와 가정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떻게 은혜가 임하게 됩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누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꺼이 은혜의 통로가 되어줄 때 가정은 회복되고 교회에는 은혜가 넘쳐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그와 같은 헌실자들이 되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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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으로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신 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의 가정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평강의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주여 세 번 부르시고 간절히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1. 광고는 주보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신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기꺼이 은혜의 통로가 되어 발걸음이 닿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평강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기로 결단하시는
함께 예배드리는 모두위해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