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7 청년교회
Notes
Transcript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잠언 26:1–12 (NKRV)
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5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네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사람들이 자신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내가 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이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기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처럼 자신을 살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한다. 그것을 조금 있어보이게 말하면 성찰이고 자기 반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그것이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련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 말씀에 그 미련한 사람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미련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일반적으로 미련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것 처럼 배울 생각이 없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주체로서의 주권이 없는 사람도 미련한 사람이다. 이 말은 늘 남들이 하는 이야기에만 흔들리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다. 흔히 귀가 얇은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다. 이런사람들이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미련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어리석은 자, 바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잠언 전체에서 말하는 미련한 사람은 단순히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특징은 당연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강팍한 삶을 사는 것이다. 강팍한 삶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다고 본문은 이야기를 한다. 영예로 번역된 ‘카보드’의 뜻은 무거운, 영광, 존귀 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 경외하지 않으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존경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한여름에 눈이 온다거나, 추수할 때 비가 오는 것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되면 피해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런 미련한 사람이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까닭 없는 저주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까닭 없는 저주는 아무런 근거 없이 행해지는 악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깐 미련한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을 해코지 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은 말의 효력을 믿었다. 다시말해 저주의 말이나 축복의 말이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상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에서가 아버지의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엄청나게 분해하면서 야곱을 죽이겠다고 까지 한다. 또 야곱도 자신이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형인 에서에게 어떻게 될지 또한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행위를 하면서까지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의 효력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히브리사람들만이 아니라 고대 근동 모든 국가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언의 지혜자는 이러한 미신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참새를 예를 든다. 조그마한 참새도 이유 없이 아무 장소에 내려 앉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저주도 아무런 이유없이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철새를 의미하는 제비와 같이 때가 되어야 날가기에 아무런 이유와 목적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와같이 참새나 제비와 같은 미물도 목적과 이유 없이 행동을 하지 않듯이 아무런 근거 없는 저주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에 저주를 들었다면 그것가지고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비판을 들었다면 그것을 내가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들어야겠지만 내 영혼이 상할만큼 남들의 저주로 인해 상처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 바로 미련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미런한 사람에게 필요한것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광과 존경이 아니라 매라는 것이다. 말에게는 채찍이 필요하고, 나귀에게는 재갈이 어울리는 것같이 이러한 미련한 사람에게는 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귀가 열리지 않을만큼 어리석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러한 미련한 사람을 대하는 적절한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먼저는 미련한 자의 말에 되도록 대꾸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의 날선 질문들을 받곤한다. 그런 상황이 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함께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비판과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우리도 어느순간 혈기를 부리면 우리 역시 기독교를 방어한다는 이유로 날선 비난과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때는 그런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다. 그들과 이야기 해봤자 대화가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들의 잘못된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이다.
진실된 말을 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진실이라고 믿을까?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 해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어느때 그러겠는가?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삶이 성실하지 못할 때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마지막에 양치기 소년은 진실을 말하였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아무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 해도 우리의 삶속에서 성실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진실을 이야기 해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진실로,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생활이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선포할 때 진리가 진리로 들려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가? 그러면 선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진리를 선포할 때 진리가 진리로 그들에게 전달 될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미련한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6-7절이다.
잠언 26:6–7 (NKRV)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이 말은 무엇인가? 미련한 자를 메신져로 사용하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말이다. 분별하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게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누구보다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리석음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우리를 하나님 당신의 메신저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세상앞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모험이다. 하나님이 모험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사항하시고 우리를 신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아신다. 우리를 통해 왜곡된 하나님이 전달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이유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이 뒷받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는 실수 할거니깐 넌 안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드시는 그 일에 우리를 동참 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올바른 메신져가 되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미련한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잠언 26:11 (NKRV)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미련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것이다. 무엇처럼?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말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실패 했지만 계속해서 도전하라는 뜻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한단계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 발전하지 않고 배우지 못한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련한 행동을 끈지 못하고 그것에 끌려가는 것이 미련한 사람의 특징인 것이다.
그래서 중독이 무서운 것이다. 성경에서 또는 교회에서 하지 말라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한번 한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것들에 중독이 되어 우리가 그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교회에서 또는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미련한자가 누구인지 그의 특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12절에 갑자기 반전이 된다.
이러한 미련한자보다 더 소망 없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 이다. 스스로 미련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장차 나아질 소망이 있어도,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구제 불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매일 같이 주님을 붙잡고 사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이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모두가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늘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