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4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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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지평선이신 예수님!
사건의 지평선이신 예수님!
예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기적이 중심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경험이야 말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렇지만 자세하게 경험이라는 부분을 들여다 보면 체험과는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겪어본 일 그래서 몸이 반응할 정도의 경험은 지속적으로 일어나 거의 틀림없이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콩콩팥팥이라는 프로그램에 초보 농부들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예능으로 풀었지만 결국 노련한 농부의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노련한 농부의 오랜 경험과 축적은 초보 농부가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부분의 숙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초보 농부가 자신의 ‘농사기'를 다른 사람에게 경험했다고 말한다면 말은 틀리지 않지만 경험을 했다는 말에 전부 동의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앞선 요한복음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3장의 니고데모 4장의 사마리아 여인 5장에서 병 고침을 받기 위한 왕의 신하와 38년된 병자도 만났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의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경험과 경험'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를 통해 무리들도 그랬고 스스로를 제자라 말했던 사람들도 그랬지만 결국은 예수를 떠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건'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사건'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빌립은 6장에서 예수께 질문을 받았고 답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일로 먼저 받아들였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다는 고백'과 함께 자신의 경험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교훈을 선택한 사건이지만 ‘가룟 유다'는 드물게 예수님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배신하는 결론을 향하여 치닫는 사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조차도 그런 ‘사건'에 자신들의 경험을 따르는 결정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자신들의 경험'을 세상이 가지는 경험, 세상이 요구하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이러한 경험이 ‘믿음'과 관련되어서는 오히려 ‘믿지'않는 것과 연결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치와 다를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럴 것이다'는 경험에 의한 결과를 바꿀 수도 있는 것 또는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를 ‘신념'이라고 부릅니다. 신념에 따라 살아가고 신념에 따라 결정합니다. 그런면에서 ‘신념'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고 그런면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도 극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관계를 이제 자신의 ‘때'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예수님께서 앞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때를 의미합니다. 이런 부분은 설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때 이런 말, 이런 행동을 했던 이해가 말 그대로 시간이 지나고서 알도록 예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보여주었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던 사건, 오병이어의 사건 만으로도 대부분이 베드로와 같은 고백에 도달했어야 합니다. 고백과 이어진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했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했어야 하지만 기대했던 빌립조차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14절에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올라가셨습니다. 은밀하게 올라갸셨다고 10절에 말씀하셨으니 제자도, 유대인들도 무리들도 예수님을 찾았을 뿐 아니라 화제의 인물인 예수에 대하 각자가 경험하고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배경을 두고 올라가신 예수님이 하신 것, 명절 중간이 되었다는 정보는 초막절이 초막을 치고 7일을 거하는 장소적인 상황이라면 예수님은 14절 ‘성전에 올라갔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명절이 한창인 중간이라면 이들은 성전 앞 넓은 뜰이 아니라 예루살렘 근처 즉 성문 밖의 장소에서 대부분 거처를 두고 성전에 드려야할 제사의 법에 따라 성전을 출입하는 7일 동안의 일과를 시행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인파들 사이로 은밀하게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는 미완의 상태 즉 계속해서 가르치시는 예수를 발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찾던 사람, 예수가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서로의 주장을 펴고 있을 때 요한 사도는 예수를 어떤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나요.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참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가르치려 합니다. 이는 나이와 상관없고 남성 여성과도 상관없습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 나이가 많은 자들은 특징적으로 더 그런면이 강하기 때문에 요즘 같은 시대에는 ‘니가 뭔데'라고 아예 대놓고 말합니다. 그 당시도 그랬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권위의 문제이며 권세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이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가르치는 행위는 도대체 무슨 근거가 있냐는 질문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접근합니다. 첫 번째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접근이고 두 번째는 ‘너는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어지는 16절의 예수의 답은 오늘 본문과 앞으로 보아야 할 14절부터 53절까지 ‘답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해 일반적인 것을 무시합니다. 경험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서로가 갈등합니다. 배웠다고 다 안다는 듯 말하고 경험했다고 배우는 것을 무시하는듯 말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7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아닙니다. 둘째 오해는 그래서 몰라도 가르칠 수 있다는 태도는 분명하게 잘못된 처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지식과 하나님을 말씀한다고 해서 특히 종교적인 다양한 곳에서 소위 ‘하늘의 지식'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주 잘못된 일이며 이 역시 그런 자들의 논리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을 보면 먼저 그런 사실을 알았습니다.15절에 ‘놀랍게 여겨’ (미.직.능)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논리적 정합성 뿐만 아니라 그 선지자라는 예언에도 분명하게 충족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도 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사도는 ‘아시는'분 이라고 계속해서 ‘아신다', ‘아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하십시오.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예수님 자신의 교훈이었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17절에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 알리라(미래, 중간태, 직설법)'는 표현은 그들이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때 즉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이끌고 간다는 의도입니다. 우리 말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늘 도둑을 잡았는데 너는 앞으로 소 도둑이 될 것이니까 그에 맞게 형벌을 내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난리나겠죠.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며 한 가지 거짓말, 또는 잘못을 보며 너 그렇게 하면 소 도둑된다고 말하면 소 도둑이 되라고 듣는 자녀의 잘못인가요? 지금 하나의 거짓말이 아니라 미래적 이야기를 한 것이 잘못인건가요? 여기에 ‘알리라'는 표현이 이런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부모된 자들이 자녀의 미래를 향해 축복하지 못할지언정 걱정의 말과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긴 설명까지 붙여야 하는 시대를 사는 것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예수께서 ‘뜻을 행하려'면 사람의 뜻, 오늘 태어나 30살 이상을 경험하며 살아본 인간 예수의 뜻이 아니라 이미 5장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고 계심을 대답하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사람은 자기의 뜻, 앞서 설명드린 각자가 살아가는 ‘신념'이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동물에게 없는 인간에게 유일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뜻이 드러나길 바라는' 우리 속담의 ‘소도둑'된다는 경고는 그렇게 살아본 사람, 그렇게 산 사람을 본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 즉 ‘바늘 도둑'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 스스로 바늘을 훔쳤음에도 훔친게 아니고 빌렸다든지, 주었다든지 자기 변명으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모든 이들을 포함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사시면서 인간이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가르치시는' 교사로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말하는, 즉 가르치는 내용이 내 교훈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을 비교해보고, 맞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그것이 19절의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2:17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로마서 9:4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 그들 스스로가 지킨다고 했던 ‘모세의 율법'의 요구가 이것인데 너희는 모세의 율법을 너희 스스로 정하고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규정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그런 규정이 올바른지 아니면 과도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고 시대의 여건에 따라 규정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고가 하나님의 율법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자신들이 정한 율법을 지키는 방법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율법대로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율법을 우리가 그동안 지켜온 방법 또는 방식대로 지켜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말이 22절 할례 사건과 예수께서 5장에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살리신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에 대한 비교입니다. 그에 앞서 이런 논리를 펼치시는 예수님을 이들은 20절 귀신 들렸도다라고 몰아 붙입니다.요즘 표현으로 ‘프레임 씌우기'입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교회다니는 것을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을 해봤습니다. 어떤 상대와 다툼이 벌어지고 나름 논리적인 말 싸움이나 아귀먼트가 있다면 그런 싸움의 범위는 어떤 일에서 벗어나야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 끝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러냐'하는 일종의 치트키를 쓰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너는 귀신 들렸어'라는 것이 바로 치트키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자기 정의가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치트키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쉬운 방법이 숨기는 것입니다. 한때 종교 재판으로 수많은 크리스천을 죽인 중세의 사건이나, 십자군 원정과 같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만행이 이런 프레임 씌우기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유대인 역시 예수를 그런 프레임으로 죽이려고했습니다. 분명 그들의 속내가 예수의 죽음이라고 요한사도는 밝혔지만 그들은 말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합니까'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는 그들을 아셨고 그 이유까지 밝히는 것이 그들의 오랜 전통 즉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를 그저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방식으로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21절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한것이 5장에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입니다. 그러니 유월절부터 다음해 초막절까지 결코 잊혀지지 않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전통은 ‘모세가 행한 할례’라고 했지만 요한 사도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고 사실 따지고 보면 모세가 행한 할례도 아닌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창세기 17:9-14 그렇게 갖다 붙이면서 안식일에 할례 즉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하는 율법과 그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행하는) 그렇게 사람의 신체 일부를 칼로 베어 피를 흘리게 하는 행위는 (신체를 해하는 것이나, 피를 흘려 피와 함께 있어 거룩에서 벗어난 엄청난 율법의 잣대로 보면 피할 수 없는 기준도 옮겨 놓고는 23절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다시 말씀드려서 ‘안식일’ 즉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거룩한 상태' 이는 가장 노멀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38년된 병자를 고침으로 그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 어떻게 안식일에 대한 올바름이 아닐 수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24절 여기에 이어지는 외모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오해하는 많은 표현중 하나입니다. 앞서 맥락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모와 비교되는 ‘공의로움'입니다. 외모와 비교를 대부분 ‘우리의 중심'으로 해석하죠. 물론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신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상태 즉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앞서 가룟 유다처럼 앞으로 그렇게 될 일,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되는 경험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가룟 유다 스스로도 모르는 미래를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모는 그들이 지키는 그들이 만든 과정이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 즉 안식일의 존재를 그대로 나타내는 방식이 ‘공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끔 듣는 표현 중에 ‘행한대로 판단/보응 하신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과 예수께서 답하시는 첫번째 과정을 살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저와 여러분에게 차분에게 설득하듯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말하면 다 알아듣고 내 원하는대로 움직일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있는 그대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다만 간구하기는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자기의 입장, 처한 상황에 따라 예수를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예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과 앞으로 몇 차례의 설교를 통해서 접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있는 그대로를 받았듯 서로에 대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을 나눠보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