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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본문(새생명축제 중심으로)
자유본문(새생명축제 중심으로)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합니다. 드림인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패륜아라는 단어를 아는가? 효도의 반대말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심각하게 어그러지는 행동인 “패륜을 저지른 자”를 뜻하는 한자어이다. 특히 자식이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패륜아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부모에게만 한정된 뜻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거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상황에서도 패륜아라고 말한다. 만약에 여러분이 패륜을 당한 상황이라면 기뻐할 사람이 있을까?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는 본문이다. 말씀을 보게 되면,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누가 패륜짓을 저질렀는가? 둘째이다. 둘째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땡겨서 지금 당장 달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뻔히 살아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건 “아빠 도대체 언제 죽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보았을 때 둘째 아들이 아버지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황당한 것을 넘어서 아주 패륜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여러분은 친구가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 멋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연히 정신나간 행동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패륜적으로 이야기한 자녀를 몽둥이로 두들겨도 모자를 판에 기여코 그 유산을 둘째 아들에게 주셨다. 그렇게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사업을 성실하게 하거나 그러면 좋으련만, 마치 미국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으로 탕진하여 쫄딱 망한 사람처럼 모든 돈을 다 잃고 어느 돼지농장에 쫒겨나 돼지들이 주어먹는 쥐엄열매를 겨우 먹으면서 그때 아버지한테 했던 패륜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나는 실제로 이스라엘에 가서 돼지 쥐엄나무 열매를 먹었는데 달달했다.
둘째 아들은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어서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지만 중동사회에서 여전히 이뤄지고 있는 법이 있다. 어떤 법인가 하면 마을에서 어떤 친자녀가 패륜짓을 하게 되면 아버지와 마을의 명예를 훼손시킨 죄로 죽여도 합법인 명예살인 제도가 있다. 현재도 매년 5,000명의 사람이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그래서 아들은 굶어죽을 바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마을 사람들의 눈에 걸리면 죽겠지만, 잘 피해서 어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아들로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일용직 노동자로 평생을 일할테니 살려만 달라고 간청하기로 결단하고 아버지께 가가기로 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둘째아들을 본 아버지의 반응이 아주 놀랍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러분은 정말 친한 사람을 멀리서 보면 어떤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지 않은가? 부모님은 여러분의 걷는 모습 실루엣만 보아도 자신의 자녀를 바로 알아보지 않는가? 여기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온 동네에 둘째 아들이 패륜짓을 했다는 것을 소문이 난 상태였고, 마을 사람들이 둘째 아들을 보면 돌로 쳐 죽이려고 할테니 아들이 언제 돌아오나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했던 행동이 무엇인가? 저 멀리서 오는 너무나 처량하게 망가져 있는 아들의 모습이 속상하고 너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픈 것이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달려갔다. 달려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조선시대, 몇십 년전만 해도 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옛날 사회는 발목이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고대에서는 긴 치마를 남성들이 입었고, 조선시대에도 양반이나 귀족일수록 긴 치마나 바지를 입었다. 뛰게 되면 발목이 보이기 때문에 몇 십 년 전만해도 양복을 입고 뛰어다니면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이 혼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뛰었고, 뛰었다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아들을 감격하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곧 아들을 가족 안으로 명예롭게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연합의 의미가 있다. 둘째 아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입을 맞춘 것은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것을 표현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저번에도 말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키스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했었다. 결혼을 통해 한 몸을 이루고 하는 것이 올바른 스킨쉽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연애할 때는 절대 금지이다. 본론으로 넘어와서 그렇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서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한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종이 있는 것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옷, 손에 반지, 신을 신기는 것을 무엇인가? 이때 좋은 옷은 귀족들만 입는 긴 옷을 뜻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긴 옷은 무엇을 가려주는가? 수치를 상징하는 발목을 가려준다. 반지는 아들의 신분을 나타낸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신발을 신을 수 없다. 그렇게 신발이 없는 둘째 아들에게 신을 신겼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수치를 가리시고 아들의 자격이 없다서 자신을 완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한 둘째를 신분을 바꾸어주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열리는 것은 마을의 아주 큰 경사가 났을 때만 사용되는 최고급 고기이다.
보통은 이렇게 둘째 탕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끝내면 안된다. 이제 또 다른 탕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누구인가? 첫째 아들이다. 밭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대학교 행사처럼 둠칫둠칫(비트가 넘치는)하는 소리가 들려서 자기의 종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집나간 네 동생이 돌아와서 축제를 벌였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패륜짓을 한 아들이 돌아온 것이 부끄러웠으면 부끄러웠지 뭐가 자랑이라고 축제까지 열면서 파티를 한 것일까? 이러한 아버지를 보고 아들은 진짜 어이없어한다. 그러면서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아버지에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것이다. 그러면서 집 앞에서 씩씩대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와서 같이 들어가자고 말하지만 첫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29-30절에 한글 성경에는 아버지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어인 헬라어로 보게 되면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른다.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내가 이렇게 오래 동안 몇 년을 그렇게 밭에 가서 당신이 하라는 대로 개고생했는데, 나한테 염소 새끼 한마리도 내 친구 불러서 저딴거 해준 적도 없으면서 당신의 재산을 창녀들과 꿀꺽한 저 대단한 아들이 돌아왔는데 뭐? 아주 그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대접을 해주셨더만요?” 싸울 때 당신이라는 호칭은 상대를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다. 더군다나 화가난 첫째가 집의 잔치가 있을 때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장남의 역할을 거부한 것이다. 장남은 손님을 맞이하고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한다. 집안의 잔치에 장남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저 집은 콩가루 집안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동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 집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밭에서 일한 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눅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서 나타나는 얘라는 것은 아들이라고 부르는 호칭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것이 너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장남의 특권을 이야기하시면서 첫째와 회복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자의 관계 회복을 축하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하셨던 모습으로 행동하고 잃어버린 사람과의 회복을 기뻐해야하는 것이다. 첫째 아들은 책임성 있고 순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는 본문에서는 탕자가 한 명이 아닌 두 명인 것이다. 또 이 모든 탕자의 이야기는 탕자가 주인공이 아닌 아들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행동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아들과의 화해를 위해서라면 아버지가 수치를 당할 각오를 하고 심지어 스스로 수치스럽게 만드는 길을 택하였다. 우리는 이제 돌아오는 토요일이면 새생명 축제를 한다. 우리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을 위한 성대한 축제를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시선은 교회 밖에 있는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있으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같아야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첫째 아들의 시선은 온통 자신에게 있었다. 지난 주에 진짜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삶의 기준도 사랑하는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첫째 아들이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저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통치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을 컨트롤하고, 리더의 권위에 따라서 리더의 마음대로 통치하지만, 예수님은 제자의 발을 씻기면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노예가 하는 자신을 낮추신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스스로 낮추어시고 우리를 맞춰주시어 섬김으로 통치하신다. 벼가 익어갈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와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연히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이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모든 수치와 조롱과 침뱉음을 당하면서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여 십자가에 실오라기 걸치지 않고, 매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주님이 구원역사의 부르심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달려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신다. 여러분의 주변의 이웃들, 친구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초청하여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꼐 돌아오는 기쁨의 축제의 토요일 저녁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