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0 수요] 우리의 사명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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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찬송 321 날 대속하신 예수께 / 329 주 날 불러 이르소서
묵도후 찬송 317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본문 요 1:6-8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세례요한”에 관한 말씀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사명을 기억합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한다. 우리가 사명에 대해 생각할 때에 세례요한의 생에와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어쩌면 오늘 설교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세례요한처럼 살아가자” 라는 핵심과 크게 다르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떠한 사역을 했는가?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익숙하게 들어왔고 또한 성경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일생의 섬김과 사역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성도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고, 도전이 되며, 인생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왜일까? 중요한 것은 세례요한이 그의 일생동안 자신이 받은 사명을 기억하고, 그것을 위해 달려갔던 자이기 때문이다. 사명. 사명이 중요하다.
‘사명’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에서의 의미는 이렇다. “맡겨진 임무” 혹은 “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곧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늘상 받은 사명을 기억하였기 때문에 외치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 “회개와 세례”를 전파하였던 자였다. 그는 그의 평생동안 단 하나의 목표, 그 사명을 기억하고 그것을 붙들고 달려갔던 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명’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명’이라는 단어는 목회자나 선교사와 같은 사역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사명’이라는 것이 일반 성도들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 자리로 세우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시다. 따라서 ‘사명’이라는 것은 목회자나 선교사나 특정 사역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사명은 무엇일까?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양문교회에 주시는 사명은 무엇이고, 우리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늘상 받은 사명을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사명’과 관련된 3가지 자세를 말씀드리려 한다.
첫째로, (따라해 주세요)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받았다. 6절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성경에는 ‘보내다’ 라는 단어를 보통 ‘펨포’ 라는 단어와 ‘아페스텔로’ 라는 단어, 이 두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첫번째로 말씀드렸던 펨포 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보내다’ 라는 의미를 가진 반면, 후자인 ‘아페스텔로’라는 단어는 매우 특별한 단어이다. 이것은 공적으로 파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를 부여하여 특정한 목적을 지닌 채로 파송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 단어를 오늘 본문 안에서 세례 요한에게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명을 받은 채로 세상에 파송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함께 읽진 않았지만 요1:15 를 보면, “내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이고, 사도행전 19:4 를 보면,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즉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이며, 말3:1 을 보면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즉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이었다. 정리하자면, 세례요한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지금 세례 요한이 어디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또한 누구에게 ‘자신 뒤에 오실 주님’을 증언하였는가?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자신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준비하였던 자이다. 그는 결코 교회 안에서 머물거나 정체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이것은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또한 복음을 전파 하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안에서 먼저 받은 은혜들을 확고히 붙들고 세우는 사역도 매우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들을 공급받고 누리는 것,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같은 신앙으로 똘똘 뭉쳐서 우리끼리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일에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리끼리만 잘먹고 잘 살다가 천국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밟고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이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을 교회에 일임하셨다. 우리가 그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으로 파송받은 자들이다. 내가 서 있는 그 곳에서, 내가 속해 있는 가정 가운데에서, 내가 속해 있는 직장 가운데에서, 내가 속해있는 어떠한 공동체에서, 우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확신하라.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양문교회가, 우리 한국교회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 귀한 사명을 힘있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둘째로, (따라해 주세요)우리는 증인이다. 7절 말씀을 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증언하다’ 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증언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마르튀리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번역된 의미대로 1차적으로 “증언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본문에서는 세례요한의 사명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원어로 보면 “그가 증거의 용도로, 그가 증언하기 위한 목적으로” 라는 의미이다.
“증거, 혹은 증언” 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어떤 때에 주로 사용하는가? 이 단어들은 사실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법정에서 증거, 혹은 증인은 억울한 생명을 다시 살릴 수도 있고,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을 수도 있을만큼 중요하다. 어떠한 사건의 목격자는 자신이 본 바를 그대로 증언한다. 이 증언은 단순하게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하는 것이다. 만일 증인이 사실과 다르게 증언한다면, 이 사람은 참 증인이라 말할 수 없다.
저와 여러분은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경험한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지 경험한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사랑의 증인으로서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증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경험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뿐이다. 온 천지 만물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고 영원한 사망 가운데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사 아버지의 자녀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공로를, 날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돌보심을, 우리가 경험한 그대로의 삼위하나님의 은혜를 이 세상 가운데에서 증언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세례요한의 사명, 즉 증언하러 보내심을 받은 그의 사명은 “단순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증언하다”라는 “마르튀리아” 라는 단어에서 “마르투스”라는 명사가 나오게 되는데, 헬라어 마르투스는 “순교자”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순교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굳게 확신하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까지 각오하는 자들이 아닌가? 따라서 “증언하다” 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에는 단지 어떤 정보를 전달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각오하다”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리하자면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 세례요한의 사명인데, 이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걸고 빛되신 주님을 증언했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만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빛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다. 인정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셨다. 증인은 단지 어떤 정보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내가 알고 경험한 바를 바르게 전하기 위해 때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걸어야 하는 자들이다. 진노의 자녀에서 의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단순하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배우고 알게 된 것을 전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생명의 빛이시다!” 이를 증거하는 사명으로 우리를 이 땅에 세우셨다. 이 거룩하고도 엄중한 사명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복음을, 우리가 경험한 그리스도를 이 땅에 전파해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이 위대한 사명을 받았는데도 복음을 희미하게만 알고 있다면 어떠한가?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해야 하는데 내가 예수를 듣기만 듣되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어떠한가? 내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그저 간접적으로만 경험하였다면 어떠할까? 그러한 상태에서 내가 복음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을까? 내가 예수를 확신있게 전할 수 있는가? 내가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담대히 선포할 수 있을까? 내가 희미하게 아는 복음을 위하여, 내가 만난 적도 없는 예수를 위하여, 내가 누리지도 못하는 구원의 은혜를 위해, 어찌 내 모든 것을 걸고 증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먼저 복음에 완전하게 사로잡혀서 복음에 대한 확신 가운데 있어야만 이 귀한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도 증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유혹과 시련이 찾아오겠지만은 배우고 읽고 들었던 복음, 삶가운데 경험하였던 그 복음에 대한 확신 가운데에서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거하라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를 위해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이 그저 지식적으로만 습득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살아있는 복음이 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내 마음의 생각과 뜻에 숨겨진 죄악들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교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키는 그 놀라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한 영혼을 변화시키시고 교정하시며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은혜! 바라옵기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을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온전히 사로잡혀서 상황에 지배당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생명의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마지막으로, (따라해 주세요) 우리는 도구일 뿐이다. 7절 중반부부터 8절까지를 보라.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특히 8절의 말씀을 원어로 보면 이렇다. “결코 아니다. 그는. 이 빛이” 지금 요한복음 1 장은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을 교차대조하고 있는데, 방금 읽었던 8절은 세례요한이 결코 그 빛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이 빛을 증언하러 온 자일 뿐이지, 결코 생명의 빛이 아님을 강조한다. 또한 7절 말미를 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기로 말미암아” 라는 구절은 “그를 통하여” 라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믿되, 세례 요한을 통하여서 믿도록 하는 것, 세례요한을 통해 예수를 믿는 것, 세례요한을 통해 예수만 드러나는 것, 결국 이것은 나를 가리우고, 나를 숨기고, 나를 덮어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밝히 드러나게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라. 얼마나 많은 거짓 예수들이 판을 치고 있는가? 전세계 통틀어서 한국에 자칭 재림예수가 가장 많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을 의존하려는 연약한 인간의 마음을 악용하여 자기가 하나님처럼 섬겨지길 원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을 따르며 숭배하길 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죄악성, 그 교만함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평생동안 귀한 사역들을 감당했는데 한 순간에 스스로 교만해져서 참으로 비루해져버린 인생들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듣는다. 저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사역들을 감당하다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내 능력으로 이루었노라고 자랑하였다는 것이다.
히스기야 왕이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라의 위기 가운데, 또한 자신의 죽음 앞에서 히스기야의 부르짖음에 응해 주셨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말년이 그리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많은 복을 누렸던 히스기야는 그의 마음이 교만과 허영심으로 가득차게 되어 자신을 스 스로 높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어주셨던 많은 보물들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받은 귀한 보물들을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냐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외국 방백들의 목전에서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자 함이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대하32:31 에 보면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라고 말 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스스로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실 것이다. 내가 도구 임을 망각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떠나실 것이다. 세례요한을 보라. 그는 결코 이 빛이 아니었다. 단 한 순간도 생명의 빛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명의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데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친 자였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여러분, 우리는 도구일 뿐이다. 때로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될 때에도 우리는 도구일 뿐이다. 또한 때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작고 천한 일들을 감당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도구일 뿐이다. 내가 처한 상황과 형편속에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 도구로서 합당한 삶임을 기억하라. 자비하시고 인애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우리 주 아버지께서 우리의 무능함과 무익함을 가리워주시고, 오직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게 하시되,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314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하나님,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증거하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길 원합니다. 세상 가운데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귀한 사명 받았으니, 우리 양문교회를 들어 사용하셔서 이 귀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되게 하시고, 이 자리의 우리 모두를 동일하게 들어 사용하셔서 생명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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