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임과 전진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3 views
Notes
Transcript
본문: 빌 1:12-2:4 (봉독 빌 1:12-26)
제목: 매임과 진전
오늘 본문 말씀은 옥중 서신으로 분류되는 빌립보서 본론의 첫 번째 단락입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형제들이 어떤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는 말로 운을 뗍니다. 12절 말씀 보시면,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본론의 첫 번째 단락을 시작하면서, 본인이 당한 일이 결과적으로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본인이 겪었던 사건들을 신학적인 진술의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매일 매일 영적으로 성찰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것, 내 인생의 이정표가 있다면, 오늘의 나는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이러한 부분들은 선지자나 사도, 위대한 목사님들만 묵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지하게 묵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고,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이 부분만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본인이 당한 일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해서 당사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사도 바울이 당한 일이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빌립보 교회 지체들이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표현인 “복음 전파에 진전”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 따르면 이 표현은 “복음의 진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5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 믿음의 진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12절에서는 진전, 25절에서는 진보. 의미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유의어 정도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헬라어 성경으로 볼 때, 진전과 진보는 완전히 똑같은 단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개역개정성경에서 똑같은 단어를 마치 조금 다른 단어인 것처럼 번역해 놓은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당한 일이 어떻게 복음의 진보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바울이 도덕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가만 놔두면, 복음 전파가 삽시간에 일어나니까, 어떻게든 복음 전파를 막기 위해서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 복음 전파를 막으려고 감옥에 가뒀는데, 이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진보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불을 끄려고 물을 뿌렸는데, 불길이 더욱 거세지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박해가 복음의 진보로 이어지는 이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 내용을 두 가지 요인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요인은 사도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모든 시위대와 감옥 안팎의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바울의 투옥이 복음의 진보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서 “매임”이라는 표현은 투옥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써 감옥과 관련된 모든 관계자들과 죄수들에게까지 복음 전파의 기회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요인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면서 로마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투옥이 복음의 진보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수신자들의 직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절 말씀에 따르면,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직분자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1장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전한 사람들이 형제 중 다수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형제 중 다수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원어로 보면 이 표현은 형제 자매를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남자들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는 순간에 누가 그 일을 할 것이냐.”라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직분을 받은 감독들이 할 것이냐. 아니면 집사님들이 할 것이냐. 권사님들이 할 것이냐. 장로님들이 할 것이냐. 이런 직분에 대한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는 데 있어서만큼은 어떤 직분 맡은 사람들이 그 일을 주로 감당해야 하느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형제 자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복음의 진보가 일어났으니, 그럼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것이 다 잘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1장 15절 16절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기까지, 불특정 다수의 지체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으나, 모든 사람이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투옥 생활에 압력을 가중시킬 것을 기대하면서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 전파 안에 죄악된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들의 복음 전파 사역 안에, 이단적인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이 널리 전파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 드리자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되, 사도 바울의 권위를 훼손하고 본인들의 어떤 입지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불순한 의도가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복음의 진보라는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개인적인 불편한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복음의 진보에 대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황이 어떠하든 관계없이 복음은 계속해서 전파되고 있고, 복음의 진보라는 열매를 맺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크게 기뻐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 바울에 대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도 바울의 권위를 깎아내리려 하는 사람들, 사도 바울의 지도력과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불순한 의도로 복음을 전하더라도, 이단적인 사상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적용하면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사도 바울의 투옥과 복음의 진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그려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내용을 적용해야겠습니다.
첫째로, 복음 전파는 사람의 힘으로 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은, 바울을 따르는 지체들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 전파 사역이 전체적으로 중단될 만한 심각한 사건이었던 것이죠. 사도 바울이 잡혀 들어갔으니, 당분간 조심하자. 몸 좀 사리다가, 때가 되면 다시 힘을 내보자.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든지 관계없이, 불특정 다수의 형제 자매들이 겁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오늘날 복음 전파에 대한 선입견을 모두 떨쳐내야만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이것 저것 다 따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전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우리 인생에서 기쁨을 누리는 참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 오늘 본문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복음의 진보가 기쁨의 주된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만, 본문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은, 복음의 진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복음의 진보가 성도님들의 삶에 기쁨의 주된 원인이 되십니까? 우리는 이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수적으로 늘어나는 표면적인 현상만으로 기뻐하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반대로 표현하자면, 교회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속상해하는 분들이 계시죠.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그런 감정을 품을 만한 정당성이 있으려면,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서 부흥이 되었느냐. 아니면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아서 성도의 숫자가 줄어들었느냐. 이런 척도로 판단을 해야만 영적으로 참된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사람이 많고 적음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누리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적인 정체성을 망각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자녀가 성공해야 기쁘고, 가정이 형통해야만 기쁘고, 이런 부분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자녀의 성공 여부, 가정의 형통과 평안. 이런 요소에서 기쁨을 찾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의 진보에서만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진보하는 상황 가운데서 사도 바울 개인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 자신의 영향력을 떨치려는 사람들, 복음 전파라는 고귀한 사명보다, 개인의 사적인 목적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면, 그것만으로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기억하시면서, 복음이 진보하도록 힘쓰시며, 그 가운데 참된 기쁨을 누리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주님 한분만 의지하며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악하고 타락한 세상 가운데,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삶에 행복의 요소를 다른 곳에서 찾기보다, 복음의 진보라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영적인 참된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 한분만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으로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하시면 되겠습니다. 주기도문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